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0-10-22 00:00:37
  • -
  • +
  • 인쇄
다향만리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을 뒤돌아보며 눈을 감는다. 그 뜨겁고 치열했던 여름 한 철 수많은 이야기들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저무는 가을 날 전설이 돼 차곡차곡 떨어지고는 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참으로 가을은 생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고 그 분 앞에서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 같다. 또한 시인 김현승이 노래한 것처럼 ‘모국어’로 가장 비옥한 시간들을 가꾸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다.


분주했던 시간의 파편들을 모아 정리하고 잠깐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면 지난날들이 내게는 고독하고 힘든 길이었다. 중양절(重陽節. 음 9월 9일)을 맞아 아내와 함께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을 찾았다. 충담(忠談)스님처럼 망태기에 다기(茶器)를 챙기지는 않았지만 보온병에 보이차를 끓여 담고 가을 길을 나섰다. 이 가을 천년향화지지(千年香花之地)에서 흰 눈이 추억의 발자국들을 다 덮어버리기 전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적은 지금 더 늦기 전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존재의 의미조차 묻어버리며 안일한 잠에 취해 있을 때 이놈 하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주며 호통 칠 수 있는 그런 스승, 그런 어른,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저무는 가을 날 뒷짐을 지고 언덕길을 넘어 갈 때 뒷모습이 아름다운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은 것이다. 


늦은 밤 지친 몸을 끌고 찾아갔을 때 맨발로 달려 나와 내 여린 손목을 잡아끌며 들어가 찻잔 앞에 놓고 밤을 새워 이야기해 주는 그런 친구, 그런 사람 하나 진정 만나고 싶다. 그냥 바라만 봐도 영혼이 맑아지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고 그런 이름 하나 가지고 싶다. 외로운 사역의 길에서 조용히 손잡아 주며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아는 듯 고개 끄덕여 주는 그런 동역자, 그런 사람 하나 이 가을에 만나고 싶다. 내가 자꾸만 작아 보일 때 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은 것이다.


지난여름에 봐 뒀던 남산의 호젓한 길을 찾아 나섰다. 가을이 오면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걸어 보고 싶었던 길이었다. 내가 지나 가기를 기다렸단 듯이 원색의 가을 옷을 입고 반갑게 맞아 준다. 산벚나무 잎이 단풍 들어 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있어 곱게 물든 한 잎을 땄다. 그 잎 하나하나에 만나고 싶은 사람 이름을 적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위 위에 앉아 팬을 들었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사람 하나 없는 것인지 손에 든 단풍잎에 좀처럼 한 사람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 갑자기 서글퍼진다. 수많은 만남들이 그냥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갈 뿐이다. 그래서 마르틴 부버는 ‘만남’을 그렇게도 강조했나 보다. 충담대선사도 서라벌 화려한 거리에서는 차 한 잔 나눌 사람이 없어 이곳 삼화령에 와서 석조미륵불상 앞에서 차를 나눴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아내와 함께 충담이 마셨을 것 같아 보이는 자리에 앉아 찻잔을 놓고 눈을 감는다.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은 사람 하나, 그는 나의 임이다. 날마다 초원을 밝히는 푸른 별처럼 가슴 따뜻한 임이다. 나는 지금 60 중반의 가을 길을 걸으며 진정 그 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늦게 찾는 임이기에 더욱더 기다려진다. 인간이기에 너무나 인간이기에 나는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이 길을 서성이는지 모른다. 가을은 유난히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자작나무 아래 서성이며 임을 그리는 노래를 불러보았다. 길을 떠난 내 노래들은 아직 돌아오질 않는데 그만 가랑잎 하나가 어깨위로 떨어져 떨고 있다. 이 가을, 조용히 눈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며 가슴 저미는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 누구에게 ‘사람 하나’이고 싶다.


김상천 시인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상천 시인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