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 존재자들을 위한 유물론적 주술을 위하여

이수영 미술작가 / 기사승인 : 2020-10-15 0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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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재의 지도> 레비 R. 브라이언트

 

 

시(詩)는 주문(呪文)과 같다. 장정일의 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 빵 사이에 낀 소고기 패티를 먹고 있는 나는, 순간 저 먼 곳 지구 반대편 거대한 숲 아마존과 한 몸이 된다. 지난 10년간 축구장 830만 개가 넘는 넓이의 숲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햄버거를 먹으면 저 먼 곳 숲이 사라진다. 사라진 숲, 화상 입은 땅엔 소‘고기’ 플랜테이션이 들어선다. 


‘나-햄버거-식산업-아마존 숲 파괴–기후위기’라는 이름의 회집체는 단일한 하나의 존재자다.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의심하고 의심해 얻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단단하고 근원적인 명사형 본질이 아니라, 지금 접속해 작용하고, 조작하고, 행하는 것이 존재자다. ‘물질의 흐름을 끌어들여 자신의 조작 과정을 거쳐 그 생산물로서 새로운 형태의 흐름을 산출하는’ 역능과 행위가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브라이언트가 불러낸 이름은, ‘기계’다. 모든 존재는 기계이며, 기계들의 회집체다. 


존재의 들판에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소, 말, 인간, 나무는 뛰놀지 않는다. 짐을 운반하는 소는 운반기계이며, 고기로 길러져 소비되는 소는 식품기계이고, 밭을 가는 소는 농기계이며, 줄에 매달려 백남준에게 끌려가는 바이올린은 예술기계이고, 햄버거를 먹는 나는 숲을 파괴하는 식산업 회집체에서 내밀하게 작동하는 기계다. 단지 햄버거를 먹었을 뿐인 나를 가본적도 없는 아마존 숲 파괴에 연결시키는 브라이언트의 정치적 윤리적 유책성은 뼈아프다. 


원거리 유책성이 가능하려면, 응시하는 주체인 인간의 시선과 그 시선 앞에 원근법적으로 펼쳐진 객체들의 세계라는 이 오래된 이항대립을 넘어서야 한다. 주객의 이항대립을 넘어서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을 하먼은 객체라고 부르고 브라이언트는 기계라고 부른다. 주체인 인간이 저쪽에 있는 객체인 사물을 바라보는 세계는 앎으로 충만하겠지만, 연기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는 세계는 변혁과 생성이 들끓는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내게 걸었던 브라이언트의 주술은 유물론적이다. 원래 주술이라 함은 존재를 물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 약발이 없는 것이다. 식산업이라는 중력장에 빨려 들어가 그 시공간의 곡률에 갇혀 작동하는 ‘나’, ‘햄버거’, ‘아마존 숲 파괴’는 ‘기후위기’를 생산하는 벡터로 움직이는 회집체다. 빠르게 간단하게 저렴하게 먹어야 하는 도시 생활자 동선에는 어쩜 그렇게 마침 딱 그곳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지. 아마존 숲은 이국적이고 신비한 자연으로 저 멀리 있고, 동물을 먹는 것은 (인류가 지구상에 거주한 이후 수 만 년 이어진)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기후위기는 심각하지만 우리가 당장 어떻게 하기에는 너무 멀고 큰 문제로 여겨진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무죄인 햄버거와 당장 급하지 않을 것 같은 기후위기 사이에 숨은 식산업 폭력은 미디어에서도 국회에서도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 


이 존재의 지도를 해체하고 다른 대지를 만들기 위해선 올바른 이데올로기나 강인한 정신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물질적 기계를 구축해야한다. 먹거리 생산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로컬푸드 유통구조를 만들거나, 동물의 공장식 사육 참상과 기후위기에 대한 재난문자 알림 서비스를 온 국민에게 하거나, 지구를 파괴하는 식산업을 제재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여하튼 물질적 기계를 바꿔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상을 조직하는 물질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브라이언트에게는 법률기계도 물질이다. 그에 따르면 법률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내용이나 의미가 아니다. 동의를 안 하든 해석을 달리 하든, 글로 쓰인 법률은 독자적인 사물이 돼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같은 텍스트 신체를 공유하는 결과를 산출한다. 글이라는 매체의 물질적 특성과 역능으로 법률은 인간 활동과 관계를 실질적으로 수정하기 때문이다. ‘매체가 메시지다.’ 


브라이언트의 존재지도학에는 오로지 물질적 존재자들이 있을 뿐이다. 물질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없다. 어떠한 강력한 절대정신도 삼라만상을 하나의 의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못한다. ‘만물의 영장’이 없는 포스트 휴먼 생태론은 무정부적인 존재론이다. 단일한 통치 원리가 없는 기계들의 네트워크다. 인간/비인간의 경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루되는 화엄의 세계에는 티끌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 그 티끌에 들어있는 우주는 일원론적 우주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닌 유물론의 세계는 물질적 한계를 소중히 여긴다. 물질적 특성들과 한계들은 존재자들이 서로 관계를 맺거나 맺지 못하게 해 빛나는 복수의 우주, 플루리버스(pluriverse)를 가능하게 한다. 모든 것이 원자로 환원되는 그런 식의 유물론적 일원론과는 다르다. 수소와 산소의 역능은 물(H₂O)의 역능과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기계, 다른 존재자다.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와 아마존 숲과 같은 비인간의 목소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애인, 비이성애자, 난민처럼 회집체 안에 있으면서도 목소리를 가지지 못하는 기계를 브라이언트는 희미한 객체라고 부른다. 비인간 존재자들은 희미한 객체 중 가장 희미한 객체다. 


희미한 목소리에 대한 응답은 변화를 원하는 우리에게 정치이며 윤리다. 비인간들에 대한 응답은 주체의 자리에 있던 인간의 안정성을 뒤흔들어 새로운 존재의 지도를 그리게 할 것이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식산업, 새로운 에너지 생산 기술과 제도, 새로운 도시 구성이 비인간 기계들을 중심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비인간 존재자들을 위한 유물론적 주술을 위해 <존재의 지도>라는 비인간기계의 목소리를 전한다. 


이수영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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