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나주역 사건 속 그 여학생들은 무엇을 했을까?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0-11-04 0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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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11월 3일은 학생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돼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국적 독립운동이 됐다. 이 거대한 움직임은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을 발단으로 시작됐다. 일본인 남학생의 행동을 목격한 조선인 남학생이 항의했고, 이로 인해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경찰은 일본인 학생 편을 들며 조선인 학생을 구타했다. 이러한 차별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조선인 학생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은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 11월 3일에 광주 시내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로 한다.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 규모가 커지자 일제는 광주 시내 중·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학생시위 주모자를 검거했고, 부상으로 병원을 찾은 학생들까지 무차별로 체포했다. 이러한 탄압에도 학생 비밀결사 단체인 ‘독서회’ 학생들은 광주 지역 청년단체와 협의해 11월 12일 2차 시위를 벌였다. 광주 학생들의 시위는 신문을 통해 알려져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했으며 간도, 연해주, 상해, 북경, 일본 등 해외에서도 집회와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1462명의 학생이 검거됐고, 582명의 학생이 퇴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국적 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나주역 사건 속 그 여학생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에서 나주역 사건 속 여학생들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고 단지 사건의 피해자로 언급되는 정도에 그치는데, 최근의 연구 중에서 이들에게 주목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윤효정(국립순천대 인문학술원 학술연구교수)은 ‘여성주의 관점의 지역 여성사 서술을 위한 제언–광주학생운동 전후 광주 지역 여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에서 나주역 사건 속 여학생들의 다른 모습, 능동적인 행위자로서의 모습을 포착했다.


사실 나주역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여학생들이 일본인 남학생의 행위에 대해 어떤 발언이나 행동을 했는지는 기록 또는 기억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기록과 기억은 그들의 침묵을 보여주고 있다. 피식민지 국민, 학생, 여성이라는 점은 복합적으로 그들의 침묵을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당사자 중 한 명이 먼저 침묵을 깼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시위에 함께 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부상 남학생들을 구호하고 응원”한 여학생들은 ‘소녀회’ 회원들이었던 “장매성 이하 11명”이었다. 이 11명 중 한 명이 나주역 사건의 이금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였다. 그는 계속된 침묵을 거부하면서 행동을 결심하고 실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체화를 가능하게 했던 동기는 ‘소녀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1928년 결성된 비밀독서회 소녀회는 조선인 여학생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피압박 민족으로서, 무산대중으로서, 여성으로서 억압받는 상황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들은 소녀회를 결성했다. 조선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조선인으로 자란 이금자, 그는 소녀회 활동과 나주역 사건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주역 사건 당사자 중 한 사람인 이광춘(광주여고보 3학년)은 이후 백지동맹의 주도자가 됐다. 광주 지역의 학생시위가 진정되고 휴교했던 학교들이 개학하면서 그동안 치르지 못한 시험이 시작됐다. 이때 광주 지역 학생들은 구속된 학생과 함께 시험을 치를 때까지 시험에 응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백지 답안지를 내기로 하고 백지동맹을 결성했다. 이때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백지 답안지 제출을 독려한 이는 나주역 사건의 이광춘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시험 당일 이광춘은 “최후까지 분투하여 목적을 관철하라”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나주역에서, 광주학생시위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던 그는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시험 거부라는 형태로 역사적 사건에 개입하며 스스로 행위의 주체로 등장했다. 또, 나주역 사건의 당사자였던 박기옥(광주여보고 3학년)은 1930년 2월 자퇴함으로써 일제의 교육을 거부했다. 당시 신문에는 “우리가 공부를 잘해서 큰 인물이 된다 해도 다수 동무가 고생하는 생각을 하면”이라는 그의 소감이 실렸다. 조선인 여학생으로서 교육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중대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 앞에서의 연설과 언론 인터뷰는 여성의 언행을 단속하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미덕으로 여기는 젠더 규범을 깨는 행위이기도 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나주역 사건의 당사자인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는 ‘피해자’로 명명됐지만 이후 주체적인 행위자로 등장했다. 우리가 그들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학생시위의 참여자, 백지동맹의 주도자, 자퇴를 통한 식민지 교육의 거부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여학생 규범을 깨고, 젠더 규범에서 이탈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내 처음 질문을 정정해야겠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나주역의 그 여학생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광주 여학생들에게 그리고 조선의 여학생들에게 광주학생운동은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전국 각지 그리고 해외까지 퍼져나간 학생들의 항일운동 속에는 민족적 차별에 저항함과 동시에 젠더 규범을 깨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스스로 발을 디딘 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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