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방어진에는 최란선도 있었다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0-12-02 0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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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방어진항은 일제시기 우리나라 최고의 어업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가옥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기도 해서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마을재생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100여 년 전, 방어진에는 항구의 발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삶은 더 힘들어진 이들이 있었다.


1927년 3월 4일자 신문에는 방어진에서 일하는 사람, 최란선의 이야기가 실렸다. 당시 방어진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과 요릿집도 증가했다. 최란선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요릿집 ‘천길루’에서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최란선이 병이 나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인 업주는 최란선에게 약을 주기는커녕 밥까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최란선은 그 동안의 일본인 업주의 악행을 낱낱이 적어 경찰서에 제출했으며 동료 여성 종사자 일동이 탄원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그 동안의 악행’을 고발한 최란선의 행동과 탄원서를 제출하는 적극적인 저항 행동을 보이는 동료들의 행동에서 조선인 접객업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최란선의 눈으로 보는 방어진항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최고의 어업 중심지 방어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최란선만의 일이 아니었다. 1920~1930년대 신문에는 최란선처럼 울산 지역 요릿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당시 가난한 농촌지역의 여성들을 속여서 도시의 접객업 노동자로 파는 인신매매 범죄가 증가했다. 1926년 5월 2일자 신문에는 울산 지역에서 여성들을 감언이설로 속여 방어진, 부산 등지에 팔아먹는 자들이 많은데, 경찰당국에서 제지가 없어 문제라고 전하고 있다. 1929년 6월 30일자 신문에는 달려오는 열차에 뛰어든 21세 여성의 이야기가 실렸다. 경남 산청군 출신의 접객업 노동자인 이 여성은 울산역에 도착하는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135원에 팔려 와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중 또 다시 부산으로 팔려가게 된 것을 비관”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1932년 12월 3일 신문에도 여성들이 접객업 노동자로 팔려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불경기 불경기 하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것이 술집이며 더해가는 것도 색주가이다. 시골에서 조금만 인물이 반반하다면 오십 원, 백 원의 값이 붙어 색주가로 팔려간다”고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농촌지역의 여성을 속여서 접객업 노동자로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사기, 협박, 인신매매 범죄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저항했다. 도망가기도 했고, 목숨을 내어놓기도 했다. 1935년 8월 16일자 신문에는 손님의 무례한 태도에 저항한 울산의 접객업 노동자 김옥도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는 손님이 ‘작부’ 운운하며 심지어 술잔을 김옥도에게 집어던지자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며 이제 이 직업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다. 최란선에게, 김옥도에게 방어진은, 울산은 어떤 의미의 장소였을까.


100년 전 방어진항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사람은 동양의 수산왕이라 불리던 일본인 수산업자 나카베 이쿠지로일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방어진은 기회의 땅이었고, ‘눈부신 발전을 이룬 장소’였다. 하지만 최란선과 그 동료들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고 ‘저항의 장소’였다. 그리고 일본인 어민들의 이주로 어장을 빼앗긴 조선인 어민들에게는 ‘빼앗긴 장소’였다.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임금을 받으며 일한 조선인 어업 노동자들에게는 ‘차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들 모두가 살았던 100년 전 방어진의 모습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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