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오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19-11-19 22: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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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나마타에서 온 나가노 미찌(永野三智) 씨
소박하지만 끈끈하게 연결된 한일 민간교류
▲ 나가노 미찌 씨는 시민단체인 소시샤에서 일하면서 미나마타 지역 환자들을 보고 겪은 일들을 칠판에 적어가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울산미래공생연구소는 2016년 4월 15일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강도 6.5의 지진이 일어나자 민간교류와 복구지원 차원에서 그곳을 방문했다. 원래는 근처 공동체마을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주변의 권유로 미나마타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일본 미나마타병센터 소시샤(相思社)의 상임이사인 나가노 미찌(永野三智) 씨와 인연의 출발이었다. 최근 포항 형산강 수은 오염도 걱정되고 한국에 방문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산미래공생연구소 김연숙 씨는 나가노 미찌 씨를 초대했다. 인터뷰를 한 날은 마침 오전에 두동초등학교 방문 어린들에게 미나마타 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려온 길이었다. 인터뷰하는 내내 나가노 미찌 씨는 시종일관 낮고도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 나가노 미찌 씨는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나?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울산미래공생연구소 김연숙 씨 때문이다. 2016년 후쿠오카 구마모토현 지진 피해를 입었을 때 민간교류 차원에서 일본에 지원활동을 왔는데 미나마타 지역까지 와서 만나게 됐다. 당시 후쿠오카 공항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이토시마’는 후쿠시마 사태 이전에도 산, 바다, 강이 모두 있어 귀촌지로 각광 받는 곳이었는데 후쿠시마 이후에 젊은 부부들, 가족들, 아티스트, 장인들이 본격적으로 이곳으로 이주해 와 지역공동체가 활발해지는 곳이다. 그중 환경운동하는 사람이 미나마타에 가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미나마타에 온 것이었다. 약 20명 정도가 5일간 있었다. 사람들이 다 다른 캐릭터인데 대가족 같은 느낌이라서 아주 편했다. 아주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김연숙 씨에게 활동하는 미나마타 이야기를 하고 싶고 포항 수원지역에 수은오염 문제가 생겨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편의를 봐 줄 테니 오라 해서 방문하게 됐다. 오늘 두동초등학교를 갔을 때도 아이와 부모, 선생님들이 같이 모여 가족과 같은 분위기여서 아주 좋았다. 두동초를 방문했더니 학생들이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었고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져 선생님들도 놀랐다고 한다.

2. 포항 형산강 유역에서 수은이 과다 검출됐을 때 한국 취재진이 미나마타시를 방문했다. 이번에 포항을 둘러봤나?
형산강 하류에 재첩이 나오는데 포항시장에서 환경부 단속에 기준치 이상의 농도가 나옴으로써 밝혀진 것이었다. 시에다 통보를 했고 포항시는 ‘형산강에서 재첩 채집을 하지마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그 현수막을 본 포항MBC 방송국 PD가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장성훈 PD는 수은중독에 대해 조사를 하고 미나마타 소치사를 취재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집요하게 취재를 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분이라고 여겨 이번 한국에 온 김에 형산강을 가 봤다.
현재 있는 미나마타 현립기념관은 공립이다 보니 공무원이 수시로 바뀌어 네트워크 구축이 안 된다. 미나마타병센터 소시샤는 45년간 활동을 한 전문가들이니까 신뢰가 생긴다. 미나마타병을 함께 한 사람들, 전문가, 의사들 네트워크가 발달돼 있어 포항 시의원들이 내년에 초대하면 도움을 주려고 한다. 지금 포항지역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계가 걸려있는 문제니까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금 나처럼 미나마타병을 먼저 겪은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를 풀어 가는 데 훨씬 수월하다. 국제교류와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2017년 7월 26일 포항MBC방송에 의하면 형산강과 만나는 포항 철강단지로 이어지는 구무천 강바닥에서 발견한 수은 수치가 916mg/kg으로 허용량의 1만3000배로 나왔다. 이 오염농도는 일본 미나마타병이 발병할 정도의 수은 농도였다. 현재 포항시는 구무천 근처에 형산강 개발 프로젝트를 하는데 개발행위보다 더 시급한 것이 환경보호라고 포항 시민단체들은 보고 있었다.

3. 미나마타병이 밝혀진 과정을 설명해달라.
미나마타시는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임업, 농업, 소금, 어업지역이었다. 1908년 미나마타시에 ‘치소(Chisso)’라는 회사가 화학비료공장을 만들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사업을 다각화해 1932년 화학약품인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들면서 문제가 생겼다. 황산수은을 촉매로 사용해 메틸수은이 함유된 폐수를 하천으로 흘려보낸 것이 미나마타병의 시작이었다. 1932년 처음 발병하기 시작했는데 생선을 먹은 고양이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었고 바다에 뛰어들기고 해서 ‘고양이병’이라고도 불렸다. 수은 독에 노출된 어부들은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었기에 발언권도 없었다. 당시 기자들이 취재를 왔는데 마을에 일어난 이상한 괴질 정도의 에피소드로 보도했다. 1956년 처음으로 환자를 발견했을 때도 기자들은 고양이 100마리, 쥐들이 미쳐 돌아다니고 정말 재미있지 않냐고 기사를 썼다. 그때 기자가 진지하게 기사를 썼더라면 이렇게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나마타 주민은 고향을 등지고 일본 전역으로 흩어졌고, 미나마타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직은 물론 결혼도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을 숨기고 살았다. 그만큼 병이 들어도 오랫동안 은폐됐던 이유기도 하다.

4. 문제가 심각해졌는데도 왜 대처가 늦어졌나?
당시 치소는 일본이 생산하는 플라스틱 재료의 80%를 생산하는 등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도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구마모토현은 그 말을 듣고도 주민을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전후 10년 된 국가는 전후 복구나 경제 성장이 화두인 시대였다. 1956년 5월 미나마타 내 신일본질소비료 부속병원 원장이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중추신경계를 파괴하는 병이 퍼지고 있다”는 보고서를 시 공중보건소에 제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지만 식품위생법으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공식적으로 법률적으로 생선을 먹거나 잡으면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었다.
질소비료공장의 병원장 호소카와 하지메는 1959년 7월 공장의 폐수가 첨가된 음식을 고양이들에게 먹이로 주는 실험을 통해 유기수은 중독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숨기고 연구를 중단했다. 조사를 계속해 온 구마모토대 연구팀은 1963년 2월 “신일본질소비료에서 강으로 흘려보낸 유기수은이 바다 속 어패류에 축적돼 그것을 먹은 주민의 뇌세포를 파괴했다”는 최종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차일피일 대책을 미뤘고 환자와 사망자는 속출했다.

5. 정말 치소 회사나 구마모토현, 중앙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
치소(신일본질소비료) 측은 자사를 지역경제의 버팀목으로 인정하고 있는 여론(이 회사 및 직원들이 미나마타시의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가 넘었고, 지역 일자리의 25%가 이 회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을 이용해 1959년 12월 ‘위로금 30만 엔 지급 계약’을 환자들과 체결했다. 계약서에는 위로금이 신일본질소비료의 ‘후의’라는 점이 강조됐고, 앞으로 신일본질소가 원인으로 드러나더라도 새로운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일방적인 조항이 들어있었다. 이후 치소는 비료공장 가동을 계속했고, 피해는 확산됐다. 작은 하천을 통해 폐수를 흘려보내다가 바다를 통해 버리다보니 미나마타병으로 공식 인정받은 환자 수는 2950명이 됐고 그중 천여 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환자 수가 1만 여명 정도 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구마모토현 지사는 ‘기존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것을 바다로 보내면 농도가 묽어져서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은은 먹이사슬을 통해 사람 입으로 들어 올 때 10만 배 이상으로 농축돼 돌아왔다. 그 후 조치는 ‘다시 폐수 배출구를 하천으로 하라’는 조치였다. 또 하나는 수은 배출구 입구에 기계장치를 설치해 수은과 물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구마모토현 지사는 망을 넣은 제거장치에서 걸러진 물을 직접 마시며 “이젠 수은이 없어요”하는 식의 퍼포먼스를 했다. 이후 기자들은 치소 폐수는 안전하다고 보도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 뒤에도 환자는 계속 발생했다.
1968년 치소사 플라스틱 제조법이 바뀌었다.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들기 위해 촉매제로 수은을 쓰던 공정에서 이제 석유에서 바로 원료를 뽑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미나마타병은 1965년에 발생했는데 1968년부터 싸움이 시작됐다.

5. 미나마타병이 인정되기 시작한 계기는 누구를 통해서였나.
1956년 5월 1일 치소기업 부속회사 의사가 최초로 발견, 인정받은 것이고 그 뒤 1959 7월 구마모토대학에서 유기수은에 의한 병이라고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고들은 유력한 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했다.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최종 유기수은이라는 것은 1968년 9월 8일 위생성에 의해 최초로 밝혀졌고 공해병으로 인정받았다. 1969년에야 환자들은 정식 재판으로 가게 된다. 환자들이 보상금을 걸고 1972년에 승소를 했다. 이후로 자신도 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계속 나오게 됐다.
하지만 치소의 경제적인 여력 때문에 환자로 인정받는 것은 소수였다. 재판도 많이 일어나니 재판은 재판이고 국가로부터 화해권고가 많이 나와 합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5년까지 화해한 사람은 1만3000명이고 2016년까지 화해한 사람이 6만5000명으로 총 7만8000명이다. 정식으로 환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2만2000명이고 지금은 미나마타 환자로 인정받는 것이 더 엄격해졌다.

6. 현재도 계속되는 미나마타병에 대해 알려 달라.
미나마타 환자에 대한 배상이 늦게 이뤄지고 있다. 1968년 이후 수은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1969년 11월 30일 태어난 아이까지 인정해준다. 미나마타에 산다는 이유로 예전에 차별을 받았고 결혼도 못해서 신청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치소 관계사를 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신청하기를 꺼렸던 사람들도 몸이 너무 고통스러우니 그냥 환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유기수은은 사람 내장으로도 가지만 뇌로 가서 뇌를 파괴한다. 여자가 임신하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다. 심하면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거나 의식이 없어 죽는다. 지금 미나마타병에 걸린 사람들은 두통, 이명을 호소하거나 몸이 피곤하거나 맛을 잘 못 느끼거나 하는 식의 증상을 호소한다. 손가락 발가락 등 말단 부분만 마비가 오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신체 부분에 마비가 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50대 아주머니들은 손의 감각이 없어져 불이나 끓는 물에 대여도, 낫질에 손가락이 잘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보통 사람 3배의 두통이 온다. 수은이 들어가면 반감기가 있어서 70일 정도면 배설물로 밖으로 나오지만 몸속을 돌면서 장기와 뇌를 손상시킨다고 보면 된다. 미나마타 해안에서 나는 생선을 계속 먹기 때문에 반감기가 의미가 없다. 일단 파괴된 뇌세포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 지금 어려워하는 것은 휴유증이다.
우리 소시샤 단체는 미나마타 환자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병원 간호사는 “나가노상과 소시샤 단체는 가짜 환자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며 “동네가 어두워지고 피폐해질 것이다. 재판하는 사람에게는 그만 둬라”고 비난했다. 3년이 지나자 그 간호사가 병원을 그만두고 우리 단체에 신청하러 왔더라. 깜짝 놀라 “환자를 비난하던 사람이 여기 왜 왔냐”고 물으니 “몸도 아프고 경제적으로 힘드니 불안해져서 신청하러 왔다”더라. 예전 미나마타 간호사들은 주사를 제대로 놓지를 못했고, 환자의 맥을 짚을 수도 없어 청진기로 맥을 알았다. 간호사는 환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6. 지금의 미나마타 지역과 치소는 어떤가?
미나마타시 인구가 5만 명인데 5000명이 치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미나마타 시장은 치소공장의 전직 공장장이었다. 시의회의원의 반이 치소 출신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소 출신이 시장을 하고 있다. 미나마타에는 뭐든 치소와 관련돼 있다. 아이들도 치소에 취직하고 싶어 한다. 현재 치소는 폐수를 분류해 보내는데 국가 환경성에서 엄격하게 체크하는 식으로 방류한다. 지금은 디지털 액정을 만드는데 많이 만들 때 액정의 46%를 만들어냈고, 지금은 30% 정도를 생산한다.
지금은 발병을 해도 환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50년 전 생선 먹은 영수증을 가져오라’는 식으로 요청한다. 1년에 300명 정도가 환자 신청하러 찾아오는데 그 중 단 한 명이 미나마타병 환자로 인정받았다. 다행히 영주증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조건이 더 강화돼 가족 중에 화해나 인정을 받는 사람이 있고 그 당시 생선영수증이 있어야 한다.
1997년까지 40년 동안 어업금지령이 내려졌다. 지금인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만 초기 어획량의 1/3~1/4정도로 떨어졌다. 수산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지역 수산물에 대한 이미지는 흐려졌다. 미나마타 지역 주민들은 미나마타가 가진 이미지로 편견과 차별을 받고 있다. 지금은 지역사람들이 자연농법으로 사과나 감을 생산하기에 그걸 팔아 소시샤 활동 경비에 쓰고 있다. 활동가들이 판매활동도 해야 하니 아주 바쁘다.  

 

▲ 포항MBC가 미나마타를 방문해 취재를 하고 간 이후 나가노 미찌시가 기고한 기사 내용.  자료=나가노 미찌 제공


7. 수은이 검출된 포항을 직접 가봤는데 어떤가?
수은 환경허용수치가 해산물 kg당 0.5mg인데 형산강 유역에서 kg당 928mg이 나왔다. 포항시의회에서 수은 중독의 위험성을 이야기해 달라 해서 어제 가게 되었다. 그 지역은 100미터 도 위가 상수원 취수 지역이다. 2016년 포항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미나마타 지역으로 취재하러 왔을 때 방송국 PD와 포항시의회 의원들을 안내했는데 그 기사가 실렸었다. 그 후 포항 지역에 수은이 많이 검출됐던 사례를 일본지역 사람들에게 많이 소개했다. 우리가 수은으로부터 먼저 고통을 받았고 그런 일들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까 “포항은 어떻게 되었대요?”하는 식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포항지역 사례는 미나마타 지역 상황과 비슷하다. 원인을 조사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렸기에 원인을 찾는 데 어려움이 많다. 포항시는 낚시 금지 조례를 만들었는데 벌칙이 없어 그냥 계속하고 있었다. 어업 금지를 해도 시행을 하지 않고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오염지역은 포스코 공단이 있는 곳이고 이 회사를 중심으로 지역발전을 이룬 곳이라 아무도 문제제기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포스텍이라는 지역대학이 연구하면 금세 원인이 나올 텐데 원인 규명을 못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미나마타 사람들은 포항MBC가 우리 지역에 취재를 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 아닌 것이다. 국가를 넘어 미나마타병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기에 서로 연대하기 위해 온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 어디서든 다시는 그런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8.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일본사람들은 한국인과 같은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고 순응적이다. 지난 촛불시위로 대통령을 탄핵한 일도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할 정도로 놀라워하고 있다. 의식 있는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가진 에너지를 받고 배우고 싶어 한다. 울산미래공생연구소 사람들이 미나마타 지역을 방문했을 때 놀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김연숙 씨처럼 에너지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김 상은 바로 한국’이라는 등식이 생길만큼 인상이 깊었다.
한일 정부 관계는 순탄치는 못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일본 민간 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미나마타병은 아주 오랜 전부터 겪은 일이지만 포항 형산강지역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을 온 이유기도 하다. 내년에 45년 동안 미나마타병과 싸워 온 경험을 가진 활동가, 일본 의사, 학자 등 전문가들과 같이 다시 올 것이다.  

이동고 기자 

 

▶나가노 미찌 씨와 통역 인터뷰는 울산미래공생연구소 김연숙 씨의 도움을 받았다. 

 

 

   2010년 5월에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가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서

  열린 ‘미나마타병 희생자 위령제’에서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했다. 일본 총리가 현지를

  방문해 직접 사과한 것은 발병이 확인된 이후 6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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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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