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가야사를 찾아서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19-12-06 22: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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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자연이야기-
▲ 김해국립박물관 주변에 심은 나무들이 대부분 우리 고유 수종이라 식물원 같기도 했다.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이 온다.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지난 주말에는 김해국립박물관에 들렀다. 울산지역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을 이곳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울산에도 가야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고 있지만 우리는 가야사에 어둡다.
가야사가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식민지배에 정치적인 목적성을 강하게 띄었고,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왜곡하기 위해 연구된 자료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가야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1970년대 이르러서이고, 가야사는 그야말로 철저히 왜곡돼 만신창이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거친 발굴이 혼란을 더 부추겼다. 그동안 가야사도 삼국시대 승자국인 신라를 중심으로된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내용에 근거를 많이 두었다.
약체였던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병합한 이면에는 가야 사람들이 역할이 컸다. 4세기 초반까지 오랫동안 한(漢)의 전진기지로 기능해 온 낙랑군과 대방군이 313년, 314년 소멸되면서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야사회가 성립하게 된 중요한 계기를 맞는다. 이로 변한연맹체의 내부질서가 무너지고 재편되면서 가야가 등장했고 변한연맹체가 해안가 세력이 주축이었다면 가야사회로 내륙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기 가야인 금관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낙동강 방면에 진출함에 따라 낙동강이 물류중심의 교통로였다가 신라와 금관가야 간 긴장감 도는 국경선으로 바뀌면서 낙동강 수로가 막히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는 내륙 중심인 대가야가 부상하고 섬진강이 안정적인 통로로 개척되는 변화를 맞게 된다. 가야문화는 서쪽 방면으로 대가야의 문화적 영향력으로 확대, 확산되었다. 금관국을 중심으로 하는 낙동강 중하류 세력은 4세기가 전성기로 6세기 초에는 약체가 된다. 낙동강 서쪽지역을 교두보로 확보하려는 신라입장에서는 호기를 맞아 집중공략했고 마침내 법흥왕대 532년 금관국은 자진해서 항복을 한다. 먼저 병합된 금관가야는 신라에서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 자진 항복했고, 처음으로 복속한 나라였기에 신라는 대외적인 목적에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다른 가야세력이 아직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친백제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금관국의 마지막 구해왕은 세 아들과 함께 신라 왕경으로 가 진골귀족으로 편입되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다.

 

가야사의 일부인 안라국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라국의 멸망이 ‘삼국사기’와 ‘동국통감’에는 법흥왕대로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안라국이 이후에도 계속해 대가야(가라)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세력이라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에 안라는 6세기 중반 일본 왜와 가장 밀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백제와 신라, 그리고 대가야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라공격에 끝까지 저항을 한 세력이라 그 후예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가야는 안라국의 견제로 신라처럼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고 562년 내부 반란으로 가야 최후의 보루도 무너지고 대가야와 잔존세력이 신라에 복속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1998년 개관한 김해국립박물관 본관은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 한 검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우륵은 대가야인이었다. 신라영토를 넓힌 진흥왕은 충북일대에 머물면서 우륵과 그의 제자인 니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 음악을 지극히 사랑한 군주 진흥왕의 인민에 대한 애정은 진흥왕순수비에 잘 나와 있다고 전한다. 당시 대가야의 마지막 국왕인 도설지는 우륵이 만든 음악에 심취해 주지육림에 빠졌었다. 우륵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제자를 데리고 신라로 망명한 것이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다행이 음악을 즐기는 군주를 만난 것이다.

 
우륵이 악(樂)의 극치를 보여줬다면 대가야 귀족 자식인 강수는 예(禮=유학)의 극치를 보였다. 신라 무열왕이 즉위했지만 당이 보낸 조서를 이해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 강수를 불러 물으니 막힘없이 해석을 했다고 한다. 이로서 드디어 나당연합군의 결성 밀약이 이뤄진 것이다.


또 무(武)에서 주목할 만한 능력을 보인 이가 금관국계 구해왕의 둘째 왕자인 무력이었다. 무력의 이름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진흥왕순수비와 단양신라적성비 등 당대 금석문에도 많이 보여 군사활동과 무공을 엿볼 수 있다. 무력의 아들이 바로 서현(舒玄)으로 김유신의 아버지다. 금관계라 신라 왕족과 귀족으로부터 차별을 당했던 서현은 젊은 시절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흠모하여 야합에 성공한다. 서현이 충북 진천인 만노군의 태수로 발령받자 숙흘종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명을 탈출시켜 만노군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 김유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만노군으로 보내다 왕경으로 돌아와 화랑이 된다.


김춘추가는 그의 할아버지였던 진지왕이 정난황음(政亂荒婬,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을 이유로 귀족들로부터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맞이해 귀족들과 반목하는 관계였다. 동병상련 마음이었던 경계대상 집안 출신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를 내세워 김춘추와 정치적 동맹을 맺는다. 사라진 가야는 두 사람 힘이 합쳐 삼국통일을 이루는 강력한 힘이 되었고 통일을 이룬 국왕의 시호가 바로 문무왕(文武王)이다.

 

문과 무의 핵심이 바로 가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하니 가야사와 가야문화에 더 관심이 간다. 가야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창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와 고령박물관, 고성박물관, 함안박물관 방문을 권한다.
<이 글은 ‘가야사 새로읽기’ –주보돈-님 책을 많이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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