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북경에서 고북구

문영 시인 / 기사승인 : 2020-11-18 00: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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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로 읽는 열하일기

막북행정록은 8월 5일에서 8월 9일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막북행정록에서 막북은 북쪽의 변방으로 만리장성 바깥을 뜻한다. 북경에서 열하까지 과정을 기록한 이 부분은 고난의 여정이면서 ‘야출고북기’와 ‘일야구도하기’ 등의 명문장을 낳은 곳이다. 연암은 ‘막북행정록 서’에서 “열하는 실로 장성 밖의 요충지다. 강희제 때로부터 늘 여름이면 이곳에 행차하여 더위를 피하였다. 궁전들은 채색이나 아로새김도 없이 하여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이름하고, 여기에서 서적을 읽고 때로는 숲과 시내를 거닐며 천하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는 짐짓 평민이 되어 보겠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속내는 이곳이 험한 요새이어서 몽고의 목구멍을 막는 동시에 북쪽 변방 깊숙한 곳이었으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避暑)라 하였으나, 실상인즉 천자 스스로 북쪽 오랑캐를 막음이었다”라고 했다. 강희제가 ‘피서산장’을 건립한 숨은 뜻을 간파한 말이다.
 

▲ 경산에서 연암이 간 고루가 멀리 보인다.

 

▲ 동직문(1915년). 연암이 통과한 문

 

▲ 왼쪽 도로변 지역이 목가곡으로 사신이 갔던 곳이다. 고북구 이정표(우)

북경에서 고북구로 가는 여정

건륭제의 명으로 연암 일행은 1780년 8월 5일 새벽 서관에서 열하로 부랴부랴 출발한다. 사신단 281명 중 74명이 선발돼 이 고난의 여정을 겪는다. 조선사신 일행은 자금성을 따라 황성 북문인 지안문(1950년대 도로를 만들면서 철거됨)을 통과한다. 이곳에서 직선도로로 가서 고루와 종루에서 동쪽으로 꺾어 동직문(1910년대 철거됨)으로 나간다. 이날은 북경 외곽에 있는 손가촌(당시 손가장)에서 숙박한다. 


8월 6일 둘째 날, 새벽 손가장에서 출발해 순의현과 회유현을 거쳐 백하를 건너다 쏟아지는 비를 맞아 악천고투한다. 한밤중에 밀운성 소씨 집에서 잠깐 숙박한다. 순의현과 회유현과 밀운성은 지금은 북경시 순의구, 회유구, 밀운현으로 바뀌었다. 백하는 밀운 서북쪽 산악에서 흘러 내려오는 조하 등의 물줄기와 합쳐진 강이다. 백하는 현재 밀운현 중심을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흐르는데 강변에는 아파트와 공원 나무숲이 잘 조성돼 있다. 연암 일행이 백하를 건널 때는 거친 바람으로 황토물이 넘실거렸다. 이곳에서 연암의 마부인 창대가 말발굽에 밟혀 고통을 호소하면서 뒤처진다. 연암은 백하를 건너 천둥과 비바람을 뚫고 나아가는 당시의 모습을, “밀운성을 바라보니 겨우 몇 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채찍을 날려서 빨리 말을 몰았으나, 바람과 우레가 더욱 급해지고 빗발이 비껴 치는 것이 마치 사나운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듯하여 형세가 지탱할 수 없으므로, 재빨리 길가 낡은 사당에 뛰어 들었다”라고 했다. 연암이 말한 밀운성은 현재 밀운현청사와 밀운문화관이 있는 곳이다. 나는 이곳을 지나가면서 밀운문화관 벽에 한시가 있어 사진에 담았다. 마오쩌둥이 쓴 ‘심원춘-눈(沁園春-雪)’이라는 시였다. 내용은“북국의 풍광, 천리에 얼음이 얼어 덮이고, 만리에 눈발이 날리네(北國風光, 千里氷封, 萬里雪飄)/ 만리장성 안팎으론, 오직 분분히 날리는 눈 망망한 설원뿐, 얼어붙은 황하는 흘러감을 멈추었네(望長城內外, 惟餘莽莽 大河上下, 頓失滔滔)/ 산은 춤추는 은빛의 뱀이고, 들판은 달음질치는 하얀 코끼리, 하늘과 높이를 겨루고 있네(山舞銀蛇, 原馳蠟象, 欲與天公試比高)/…(중략)…/ 애석하구나! 진시황과 한무제는 글재주가 부족하고, 당태종과 송태조는 시인이 아니었네(惜秦皇漢武, 略輸文采, 唐宗宋祖, 稍遜風騷)/ 천하를 지배한 칭기즈칸도 독수리를 향해 활 쏠 줄만 알았네(一代天驕, 成吉思汗, 只識彎弓射大)/ 아, 모든 일은 지나갔고, 수많은 풍류 인물을 찾으려면, 지금의 세월을 보아야 한다네(俱往矣, 數風流人物, 還看今朝)”이다. 호방한 기백과 문체가 마오쩌둥의 문화적 역량을 보인 작품으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 밀운문화원과 모택동 시

 

▲ 밀운수고(밀운저수지)

8월 7일 셋째 날, 뜬눈으로 지낸 연암은 새벽에 밀운성 소씨 집을 나와 목가곡에서 아침밥을 먹고 험한 고개를 넘고 거센 강물를 건너 석갑성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어 쉬지 않고 남천문 고개를 지나 한밤중 고북구에 도착한다. 목가곡은 오늘날 목가곡진인데 고북구로 가는 101번 도로와 밀운수고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그런데 현재 목가곡진 북쪽 지역부터 석갑성까지 40여 리가 되는 지역이 밀운수고(밀운저수지)로 인해 물속에 잠겼다. 밀운수고는 둘레가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북경 최대의 상수원이자 공업용수원이다. 옛 조선사신들이 갔던 길은 목가곡과 석갑성 일부와 사라지고 없는 남천문 부근 시골길에 흔적이 남아있다. 


열하일기 여정에서 가장 험해서 고초를 겪은 곳이 고북구를 지나는 구간이었다. 사신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마부와 가마꾼를 비롯한 수행 하인들의 고생은 극한상황이었다. 그 예가 고통을 무릅쓰고 연암을 뒤쫓아 온 마부 창대였다. 연암 또한 이런 고난을 직접 겪는다. 이런 과정에서 연암은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의 명문장을 낳는다.
 

▲ 고북구 마을 입구

 

▲ 다시 고북구성 입구. 고어도
▲ 고북구 마을 표지석

 

▲ 고북구성 북문 표지석

 

▲ 고북구 마지막 관문-연암이 글씨를 남긴 곳

 

▲ 고북구 마지막 관문-야출고북구기 현장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의 현장

내가 열하일기 기행 가운데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이 고북구였다. 그것은 이곳이 험난한 구간이면서 한족과 북방 세력과 치열한 다툼을 벌인 역사적 공간, 만리장성 원형을 많이 간직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이곳에서 탄생한 명문장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 현장을 발로 확인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나는 세 번째 방문 때 그곳을 찾아 읽었다. 


옛 조선사신들이 넘었던 남천문 고갯길은 지금 101번 국도와 만난다. 이 지점에서 고북구 쪽으로 들어오면 ‘고북구(古北口)’ 표지석 있다. 이 표지석 부근에 옛 고북구 남문이 있었다. 남문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좌측에는 터널이 있고 우측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고어도(古御道)’다. 터널은 1938년 일제가 만든 철도 터널로 현재는 열하로 가는 국도다. 고어도는 청나라 황제의 북방순행 길이다. 열하로 갈 때는 이곳을 지나갔는데 고북구는 황제의 어가가 머무른 행재소다. 연암은 이 길을 따라 북문으로 갔다. 당시 이 길은 절벽 길이었으나 지금은 토사로 메워져서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연암의 일행은 8월 7일 밤중에 고북구 북문을 지나 마을을 거쳐 마지막 관문에 이른다. 연암은 이 성벽에 “건륭 45년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가다”라고 써 놓는다. 바로 이곳이 ‘야출고북구기’의 현장이다. 연암이 글씨를 남긴 관문은 101번 국도변에 성벽이 조금 남아있다. 그곳은 반룡산 서쪽 끝자락으로, 도로를 따라 조하가 흐른다. 이곳은 조하의 상류로 ‘일야구도하기’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을 연암은, “물가에 다다르니, 길이 끊어지고 물이 넓어서 아득히 갈 곳을 찾을 수 없는데 다만 너덧 채의, 허물어진 집들이 언덕을 의지하여 서 있었다. 제독이 달려가서 말에서 내려 손수 문을 두드리며 백천 번 거듭 그 주인을 불러 호통 쳤다. 그는 그제야 대답하며 문을 나와 자기 집 앞에서 곧 건너는 법을 가르쳐 준다. 돈 5백 닢으로 그를 품사서 정사의 가마를 인도하게 하여 마침내 물을 건넜다.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고 나서야 겨우 물을 벗어날 수 있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지금도 조하의 강물은 장성을 돌아 흐른다. 그런데 강물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둑을 쌓고 강을 정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강물이 소리를 낸다 한들 버스 안에서 강물 소리를 제대로 듣겠는가. 더구나 현대인은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인터넷, SNS와 전자기기 등에 눈과 귀가 현혹되어 살아가니까. 

 

▲ 일야구도하기 현장-고북구 조하

 

 

▲ 고북구 반룡산장성

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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