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넘어갔던 것을 채워 넣을 때

김유신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1-02-26 00: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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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지난해 연말 울산의 교육기관을 주제로 각 구·군의 교육사를 다룬 통합연구지가 출간됐다. 한 번 정리, 연구된 것은 이후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 기존과 다른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 경우가 잘 없다. 이번 통합연구지는 이미 다뤄진 일제 시기 울산 교육 연구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데 그쳤다.


개인적으로는 추가로 다뤄졌으면 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학교를 설립한 주체, 두 번째는 옛 관청건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이유다. 


학교를 설립한 주체는 당시 울산의 여론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미치던 인물들이다. 한말~일제 시기에 울산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이 몇 있는데 이들의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중 몇몇 인물은 경상좌병영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유지가 된 것처럼 서술한 경우가 있는데 단순히 경상좌병영에서 근무했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지역의 유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근대이행기 울산에서 유력자가 된 인물들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울산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비어있던 옛 관청건물을 학교 건물로 이용한 이유다. 울산공립보통학교는 울산도호부의 객사인 학성관, 사립일신학교는 경상좌병영의 제남관, 사립개운학교는 남목관아 건물을 활용했다. 사립학교의 경우 옛 관청건물을 사용한 것을 설립자인 김홍조와 이재호가 과거 경상좌병영에서 각각 우후와 군부 주사로 근무했던 것과 연관 지은 경우가 있는데, 이들 학교가 설립된 것은 경상좌병영이 해체되고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또, 아무리 비어있다 하더라도 엄연히 국가 소유의 건물, 국유지를 한 개인이 쉽게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건물들을 이용하게 된 것일까.


1906년 3월 29일 대한제국의 고종은 “오늘날 급선무는 교육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짐은 늘 학교를 진흥시키는 정사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관립과 공립의 학제는 대체로 구비되었으나 학생들을 교육할 장소를 마련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것이 늘 걱정이니, 넓고 큰 건물들을 갑자기 도처에 짓기가 곤란하다. 여러 군(郡)에 있는 관사는 궐패(闕牌)를 두는 장소 외에도 아직 제법 큰 건물들이 있는데, 사신이나 손님이 머문 예도 없이 황폐하고 퇴락한 채로 방치하고 있으니 아무런 의의가 없다. 이제부터 모두 잘 수리하여 교사(校舍)로 만들어서 많은 인재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게 하라는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각 해당 도신(道臣)에게 통지하라.”는 조령(詔令)을 내렸다. 설립자가 관청에서 일했던 경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황제의 명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역에 대한 연구를 보다 보면 자기 지역이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경우를 볼 수 있다. 조선은 중앙집권국가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지방은 중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중앙에서 내려온 여러 법령, 규칙의 적용은 지방마다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보이곤 하는데 이 시간적, 공간적 차이와 그 의미를 알아보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앙에서 내려온 법령, 규칙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울산 지역사는 이전에 비해 연구 범위도 넓어졌고 성과도 축적됐다. 또한 수많은 자료가 발굴돼 데이터베이스화도 이뤄지고 있다. 활용할 수 있는 자료가 많아지고 그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 만큼 이전까지 여러 문장과 문단 속에서 “그랬겠지”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던 부분을 더 명확하고 개연성 있게 만들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유신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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