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斷髮)’의 역사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1-01-28 00: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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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1895년 고종 32년, 조선 정부는 위생에 좋고 활동에 편리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단발령을 단행했고, 곧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을미사변으로 고조돼 있던 조선사회의 반일감정은 단발령으로 폭발했고, 의병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급기야 당시 내각 총리였던 김홍집이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내각이 바뀐 후에는 고종황제의 머리를 강제로 깎았다는 죄명으로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역사다. 그럼, 그 이후에 조선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됐을까?

짧은 머리의 양복신사는 당연, 여성의 단발은 사회문제

30여 년이 지나자,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은 상투를 틀어 올린 머리가 아닌 요즘과 같은 짧은 머리 모양이다. 하지만 여성의 역사에는 여전히 단발(斷髮)이 허용되지 않았다. 1924년 11월 15일자 신문의 ‘여자단발을 주장함’이라는 글에서는 ‘근래에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남자의 단발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이지만 여자의 단발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26년 1월에는 동광청년회 주최로 ‘여자단발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청중이 대만원을 이뤘고 열기가 뜨겁다 못해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단발미인, 선망과 조롱의 아이러니

1920년대 신문 제목에는 ‘양장미인’, ‘단발미인’이라는 제목이 많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이 길거리에 나타나면 ‘신식여자, 최신식의 단발미인’이라 하며 이목이 집중됐다. 서양식 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은 ‘미인’으로 불리며 대상화됐다. 단발미인이라는 표현이 긍정적 의미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1925년 11월 7일 조선일보에 ‘단발미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는데 지나가는 단발여자를 향한 혐오의 표현으로 가득했다. 품행이 나쁜 여자가 남편에게 잡혀서 중벌로 머리카락이 잘린 것 같이 보인다, 여승이 되려고 머리를 깎다가 돈이 부족해서 그랬나 보다, 남편이 술주정하면 머리채 잡힐까 봐 예방하려고 잘랐나 보다는 등의 말로 단발한 여성을 조롱하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의 표현으로서 단발

사회적 비난여론에도 여성운동가들은 단발을 감행했다. 1925년 3월, 기생 강산월은 단발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노리개가 되는 것을 한탄’하고 자기도 ‘사람의 생활’을 해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기생 박연화도 ‘여성운동을 하겠다는 자각을 가지고 종래의 인습을 부인하는 의미’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김활란, 김미리사처럼 편리하고 위생에 적합하며 경제적이라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단발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여성운동가들도 있었다. 1920년대 초반 단발여성은 손가락질을 받는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여성의 단발도 ‘사회문제’나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이 아닌 헤어스타일의 하나가 된다.

‘단발(斷髮)’의 또 다른 역사

보통 ‘단발(斷髮)’의 역사는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한다’는 극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재현된다.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단발’ 행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상투를 자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모든 사회구성원을 대표해버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댕기머리는, 쪽진머리는 어떻게 됐는지도 알고 싶다. 일제시기의 조선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의 다층적인 경험들이 ‘가장 중요한 역사’ 속으로 수렴돼 흐릿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끊임없이 재현될 역사의 장면에는 흐릿한 배경이었던 이들의 모습도 선명하게 함께 등장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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