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의 단상, ‘그녀들이 있었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1-02-18 00: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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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기다리지 않아도, 설 명절이 왔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예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설은 설이고, 명절 노동은 비껴가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사회 경험을 가진 절친은 최근 어머니가 오랜 시간 생업으로 이어오던 가게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지요. 가게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탁자를 바꾸고, 닭을 튀깁니다. 보슬보슬하게 튀겼다가, 바삭바삭하게 튀겨 봤다가,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가 맛을 봅니다. 맛에 민감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친구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이도 저도 맛이 좋습니다. 


주 6일을 일하게 된 친구의 명절 차례 준비를 대신해 주는 이는 없습니다. 가게 출근 전,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지지고…. 가게에 와서는 청소하고 다시 닭을 튀긴다는군요. 다행히 손아래 동서가 차례 음식의 일부를 맡아줘 조금이나마 수월했답니다. 많이 줄였다는 음식의 종류와 양에 놀라는 내게 “이만큼은 해야지” 합니다. 


남편을 잃고 처음으로 혼자 명절을 맞이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차례를 책임지고(?) 지내본 적이 없는 친구이기에, 고민이 아닐 수 없답니다. 시어른들이 안 계시니, 남편의 형제자매들과 의논했답니다. “알아서 해”라는 답이 돌아왔다는군요. 말 그대로 받아들이려다, 말의 행간에 숨겨진 감정을 읽은 친구는 조촐한 차례상을 차리기로 했답니다. 이렇게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여성들의 명절 노동은 2021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야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하지만, 어떤 것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변화가 늦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랜 시간 되풀이되는 일상에 지치기도 합니다.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가! 


명절 연휴에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봤습니다. 좋아하는 배우가 둘이나 나오는 영화라 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진그룹에 입사한 여사원들이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1990년대 대기업 촉탁직 여사원들의 일상이 그려집니다. 상업고등학교에서 1~2등 하던 여학생이,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요. 그녀들의 꿈은 커리어우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용경로가 시작부터 달랐기에, 8년 동안 근무했지만, 회사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늦게 입사한 인간적이지만 어리바리한 대졸 남성 사원은 대리가 됐고, 주인공은 그의 일을 대신 처리해 주기도 합니다. 대졸 사원과 고졸 여사원들의 차이는 숨겨지지 않습니다. 사복을 입은 대졸 사원과 회사 유니폼을 입은 고졸 여사원의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차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일과는 대졸 관리직 사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출근해 사무실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관리직 사원 개인의 기호에 맞게 모닝커피를 탑니다. 때론 구두닦이 심부름을 하고, 담배 심부름도 합니다. 회의자료를 복사하고, 음료를 준비합니다. 어쩌다 가진 재능을 발휘할라치면, 대졸 여성 사원으로부터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혼해 임신이라도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데려와 가르쳐 일할 만하니 덜컥 임신을 했다”며 권고사직을 강요받습니다. 강단 있는 사람이라도 버텨내기가 힘듭니다. 근무경력이 많은 유능한 여직원은 결국 퇴사합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영화 속 1995년의 모습입니다. 그 속에 차별받는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영화 속 3명의 주인공은 어려움 속에서도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고, 대리로 승진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업무를 하게 됩니다. 주인공들이 커리어우먼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현실에서 1990년대 20대 청춘이었던 그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2021년 그녀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요? 꿈을 꾸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그녀들이 새로운 꿈을 꾸길 바라며 명절 연휴 마지막 날을 보냅니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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