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의 마음 백신-베토벤 프로젝트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 기사승인 : 2021-01-27 00: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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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훌훌 훨훨

춤을 추고 싶다. 음악을 듣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진을 찍고 싶다. 연주를 하고 싶다. 걷고 싶다. 산에 오르고 싶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 저곳에 가고 싶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규제받는 환경에서 사람들의 ‘싶다’는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불온한 시절일수록 욕망이 더 간절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싶다’의 욕망과 그것을 해소하는 행위에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꽤나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과 여행’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 내게 역병이 창궐해 다니는 일이 힘들 터인데 여행 에세이 쓰는 일이 어렵지 않냐고 묻는다. 실은 무거운 배낭을 꾸리고 캐리어에 짐을 싣고 떠나는 먼 여행보다 내 주위의 가장 가까운 곳을 더 깊고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돼 좋은 점도 있다. 돈도 많이 들지 않고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가성비까지 10점 만점에 10점. 하지만 먹고 살기도 힘들어진 세상만사에 일상에서 몸을 분리시키는 여행과 영혼을 분리시키는 예술이라니, 결코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런 예술이 함께 하는 여행에 나는 독립 예술영화 관람이나 다양한 전시, 공연을 제안하고 싶다.


내 장소에는 내 상처가 배어 있고 내 아픔이 스며있고 내 욕망들이 머무르는 서사가 흐른다. 잠시라도 그 장소를 벗어나서 나를 지우고 나를 외면해본다. 그런 자발적인 잠시의 외면은 오히려 나를 더 보듬을 수 있는 심신의 여유를 가져다준다. 잠깐이지만 낯설고 호기심 가득한 시간과 공간에 젖어 본다는 것, 서로의 상처와 고통을 내가 바라본다는 것. 하면 조금이라도 몸과 마음이 아물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설사 돈을 버는 생산적인 일이나 고귀한 밥을 짓기 위해 하는 노동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 베토벤 프로젝트의 공연은 3부로 나뉜다. 1부 베토벤의 파편, 2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3부 베토벤의 영웅.

거창할 것 같지만 전혀 거창하지 않은 내 예술 여행지는 가까운 이웃 도시들이 대부분이다. 예매하고 기다리는 설렘, 가는 길 위의 풍경들, 도시 안으로 동그랗게 들어오는 바다를 품에 안은 부산은 내 사랑하는 고향이자 가장 자주 가는 곳이다. 좋아하는 식당이 몇 군데 있어 오가며 식사를 하고, 해가 지면 달빛을 걷는 길이 있고 순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을 찍어보는 산책까지 덤이다. 며칠 전 부산에서 상영된 공연을 다녀왔다.


2020, 벌써 작년이라는 수식이 자연스러워진 지난해, 누구나 다 억울하게 않게 산 사람은 없겠지만 죽은 사람조차 억울했던 해다. 그런 예술가가 있었다. 베토벤!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었다.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축하 기념행사와 기획 공연이 수년간 많은 예술인의 노력과 피땀으로 기획됐다. 그런 귀한 공연들이 시기에 맞춰 폭죽을 터뜨리려 했지만 그만 바이러스에 침공당하고 말았다. 그 여러 행사 중 기념비적으로 공연됐던 바덴바덴 축제극장에서 열렸던 발레 실황이 작년에 영상으로 나와 상영됐다. 바로 베토벤 프로젝트다. 세계적인 천재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 감독이 창작한 신작은 발레단과 베토벤의 음악, 관현악단 그리고 피아니스트 미할 비아르크가 참여했다. 실황에는 인터미션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어서 140분을 상영했다.

 

비대면의 시대에 많은 연주자가 온라인 공연을 했고 그나마 잡혔던 공연마저도 취소되는 상황에서 작년에 상영된 공연실황을 올해 다시 영상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가뭄의 단비 같은 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에 인간이 표현해내는 몸짓을 얹었다. 평일 한산했던 영화의 전당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코로나에도 많은 시민이 나와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띄어 앉기의 좌석을 비워두고 거의 모든 좌석이 다 찼다. 얼마간의 혹한과 가뭄에 마른 흙들이 빗물을 고요히 머금고 춤을 추는 겨울비가 내렸다.


베토벤 프로젝트의 1부는 베토벤의 파편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됐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혼란스러운 시기, 사랑과 연인 그리고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현대 무용 발레. 푸르고 붉은 벽을 배경으로 검은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피아니스트 미할 비아르크가 에로이카 변주곡을 연주한다. 베토벤 역을 맡은 알레시 마르티네즈의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입감 이는 열연. 표정까지 연기하는 발레리노의 연기가 정통발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꽤나 생소했지만 음악의 엑센트나 스타카토, 셈과 여림의 순간까지 동작과 음악을 맞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가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 3중주 5번 유령의 2악장이 흘러나왔다. 아무 방해도 없이 오로지 선율로만 감상하는 클래식 연주를 눈이 함께 어울려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고 특별했다.

 

▲ 베토벤과 이뤄지지 않은 연인의 역을 맡았던 안나 로더와 존 노이마이어 감독의 따뜻한 포옹.

2부의 제목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이었는데 흔히 알고 있는 불과 물로 불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제우스의 불을 합쳐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가 아니었다. 18세기 소설의 한 부분이라는 내레이션에서 프로메테우스가 돌덩이에 불과한 창조물에 다른 신들과 함께 춤과 노래를 가르쳐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내용이다. 현대 무용과 전통 발레를 함께 엮고 무대 예술까지 많은 이들의 열정과 수고가 경탄을 자아냈다.

 

▲ 2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에서 여러 신의 도움을 받아 온전한 인간으로 탄생하게 되는 장면.

마지막 3부는 베토벤의 영웅 에로이카. 교향곡 3번이다. 50여 분의 장대한 교향곡에 어떤 스토리도 얹지 않고 다만 무용수들의 몸짓과 표정으로 그 긴 시간을 채워 넣었다. 발레단의 유일한 한국인 발레리나 박윤수의 1악장과 4악장 등장에 눈길이 많이 갔다. 관현악단, 감독, 무용수, 그리고 베토벤 어느 하나 특별한 도드라짐 없는 완벽한 연주다. 140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마지막 부분에서 프리드리히 쉴러의 글이 화면을 채웠는데 글귀가 인상적이다. 옮겨보자면,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절대 부딪히지 않으며 어느 한 사람이 공간을 만들면 다른 사람이 그 공간을 차지한다. 모든 사람은 정교하게 자신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꾸밈없이 맞물려 있으며 각자 자신의 행동에만 집중하는 것 같지만 타인의 공간을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연주를 하면서도 조화를 잊지 말아야 하는 춤이 그러하듯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삶도 쉴러의 글귀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주는 위안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경계의 절박한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선해진다. 감동을 받는다, 그 감동으로 눈물을 흘려 본다. 모두 상처 이전의 순정으로 잠시 돌아가 마침내 우리가 닿아야 할 곳을 염두에도 둬 보는 것이다. 

 

▲ 함브르크 발레단 단원들과 연주자들의 커튼콜.

우리는 기억한다. 침몰한 타이타닉 배 위에서 죽음으로 향해가던 두세 시간 동안, 끝까지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연주했던 밴드를.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학살 장소로 가는 기차에서 탈출해 폐허의 도시 한 건물에서 맞닥뜨린 독일 장교를 감동시켜 살아남은 스필만을. 혹은 사랑보다 항상 혁명이 먼저였던 러시아 900일이 봉쇄된 레닌그라드 전투,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잿빛 도시 절망의 순간에도 레닌그라드를 사랑했던 쇼스타코비치를 떠올린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7번, 아내를 잃고 자식이 죽어 나가는 지옥의 도시에서 수십 명의 연주자를 모아 초연했던. 그 연주를 듣고 굶주림과 추위로 고통받던 시민들은 다시 삶을 꿈꾸고 희망을 가슴에 품었으며 전 세계에 러시아의 곤경이 알려져 사람들의 도움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 미국 태생인 독일의 현대무용가 겸 안무가인 존 노이마이어는 함부르크 발레단의 총감독으로 작품을 기획했고 천재 감독으로 세계적인 정평이 나 있다.

사람들이 모두 많이 화가 나고 힘들고 우울하며 끝도 없을 것 같은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시절이다. 날카롭고 예민해져 말 한마디 건네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힘겨운 시절이 사실은 파도처럼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반복되고 호러 영화의 소재 같은 요즘 시절도 다 지나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쓰인 서정시는 다 거짓말이라고 했지만 아름다운 서정시는 계속됐고 미를 향한 춤은 그칠 줄을 모른다. 지치지 말고 조금 더 견뎌보자.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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