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으며

성강현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22-05-04 00: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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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한 윤석중 선생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 노래’의 1절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이 노래는 모르는 이가 있을까? 이 노래를 부르며 선물을 기대하던 추억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학생이던 1980년대 초 이 노래를 지은 석동(石童) 윤석중(尹石重, 1911~2003) 선생의 강의를 직접 들었다. 천도교청년회에서 연 ‘내가 만난 소파 방정환 선생’이라는 강의였다. 색동회 회원이며 소파 이후 <어린이>의 편집인을 맡았던 어린이 운동의 산증인인 선생으로부터 직접 강의를 들었다는 경험은 지금 생각해보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40년 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선생의 강의를 기억하는 이유는 강렬했던 선생의 카리스마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 소파 방정환(<어린이> 제1권 10호, 1923.11.)

넉넉한 풍채의 중키인 선생은 백발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강의실에 들어오셔서는 인사도 하기 전에 대뜸 “강사가 강의를 잘하려면 여러분들이 호응을 잘 해주셔야 합니다. 박수 한 번 보내주세요”라고 강의를 시작했다. 들어오자마자 자기소개도 없이 손뼉을 치라는 얼떨한 상황이라 소리가 클 리가 없었다. 그러자 선생은 “이렇게 박수 소리가 작으면 강사가 힘이 나겠습니까? 강사의 강의는 여러분들의 박수 소리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께서 강의실이 떠나갈 정도로 박수를 치면 저도 없는 힘을 내서 강의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충 적당히 하고 갈렵니다. 어떻게 할까요?”라고 다시금 말했다. 그제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우리는 강의실이 떠나가도록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던 선생은 자기소개와 함께 두 시간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강의하셨다.


당시 70대의 고령임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선생은 우리를 쥐락펴락했다. 선생은 마치 어린이 운동이 한참이던 20대의 청년으로 되돌아 가 계신 듯했다. 강의 내내 우리를 가지고 놀던 선생은 “저는 소파 방정환 선생 근처에도 못 미칩니다. 소파 선생이 강연하는 걸 들으면 울다 웃다 눈물 콧물 다 빼놓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라고 하시며 자신도 소파 선생께서 강의하는 것을 곁눈질로 배워 이만큼이라도 강의하고 있다고 소파 선생과 함께했던 추억을 들려주셨다. 강의가 끝나고 ‘대가(大家)는 역시 다르구나’라고 느꼈다. 선생의 강의에도 소름이 돋는데 선생이 배웠다는 소파 선생의 강의는 어땠을까?

올해는 역사적인 어린이날 100주년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한 지 꼭 100돌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소파(小波) 방정환과 소춘(小春) 김기전(金起瀍)이 주도한 천도교소년회에서 1922년 5월 1일 사상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 행사를 열었다. <동아일보>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천도교소년회에서는 어린이를 위하여 부모의 도움이 더욱 도탑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 1일을 기회하여 ‘어린이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십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그 소년회원이 거리거리에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할 터이라는데, 이러한 일은 조선소년운동의 처음이라 하겠으며…

“항상 십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는 슬로건을 내건 ‘어린이의 날’의 시작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제는 ‘어린이의 날’ 행사를 당일 아침까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천도교단 고위층의 노력으로 오후 1시가 돼서야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 허가 즉시 천도교소년회에서는 준비하고 있던 세 대의 자동차로 선전대를 편성해 종로의 큰길을 비롯해 서울 각지를 순회하며 ‘어린이의 날’ 탄생을 알렸다. 자동차에는 ‘어린이의 날’, ‘소년보호’라는 글을 크게 써 붙이고 선전물을 뿌렸다. 이날 저녁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어린이 460명이 참석해 기념식과 함께 음악과 무용 공연으로 첫 ‘어린이의 날’ 행사를 즐겼다.


최초로 ‘어린이의 날’을 개최한 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5월 1일 발족했다. 일제하 10년간의 무단통치에도 우리의 독립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로 독립 의지를 되살렸다. 3.1 독립운동은 무단통치로 우리의 기개를 꺾었다고 자만했던 일제를 당황시켰다. 일제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고 제한적인 언론·출판·집회·결사를 허용하였다.


어린이 운동과 어린이날 제정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3.1 독립운동 직후 안변, 왜관, 진주 등에서 소년회가 결성됐다. 각지에서 싹트기 시작한 소년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는 1921년 4월 소년부를 두고 어린이 운동에 나섰다. 방정환과 김기전은 소년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해 이해 5월 1일을 기해 어린이 운동을 전담할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천도교소년회는 완전한 조직을 갖춘 최초의 소년회였다. 3.1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천도교는 당시 조직과 재정 면에서도 가장 탄탄했다.


천도교소년회의 조직과 ‘어린이의 날’ 행사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전기를 마련했다. 방정환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월에도 제1일을 잡아 ‘어린이날’로 정하여 운동의 기세를 크게 올리니 계획이 어그러지지 아니하여 소년운동의 필요는 전 민족적으로 깨닫게 되고 운동은 전 조선적으로 퍼져서 각지에 일제히 일어나니 반도소년회, 명진소년회 등 그 수가 일거에 백여를 헤이게 되었고 따로히 그 해 9월에 보이스카우트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회의 소년척후운동이 일어나고 불교소년회가 생기고 기독교주일학교에서 기독소년회 간판이 붙고 각 회의 소년부는 소년회로 독립하고 동리의 체육부까지 소년회로 개조가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날’ 행사로 촉발된 전국적인 소년회 결성과 함께 소년회 통합 운동도 진행됐다. 그 결과 1923년 4월 17일 천도교소년회·불교소년회·조선소년군 관계자들이 모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조선소년운동협회 조직 이후 개최된 1923년 5월 1일을 사회적으로 제1회 어린이날이라고 지정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만, 최초의 어린이날은 1922년 5월 1일이 맞다. 따라서 이번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를 100주년으로 치러야 한다.

‘어린이’의 탄생

어린이 운동에 촉진제가 된 것은 아동 문예 잡지 <어린이>의 출간이었다. 1923년 3월 20일 창간한 <어린이>는 어린이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어린이는 신분제 사회에서 존중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양반 신분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평민과 노비 출신들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존재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접어들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지 아래에서 더 고통받았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에 어린이에 대한 보수적이고 전통적 관념을 깨부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린이>의 보급은 당시까지만 해도 ‘아해 놈, 어린놈, 이놈, 저놈’이라는 비인격적인 호칭 대신 ‘어린이’라는 인격적 호칭으로 일반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우리의 어린이 운동에는 서구 사상의 영향도 있지만, 우리의 문화 역량을 바탕으로 성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천도교소년회에서 주도한 어린이 운동은 자주적 근대를 외쳤던 동학(東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인간은 본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중심 교리로 내세웠다. 동학 창도 직후 최제우는 자기 집의 노비를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았다. 이런 최제우의 인간 평등 실천은 동학 확산의 계기가 됐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은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라고 어린이도 생명체로 인격적 대접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했다.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 동학의 시천주 사상을 사회운동으로 구체화하고 어린이 운동을 실천했다.
 

▲ <어린이> 창간호(1923.3.20.)

모든 어린이의 벗 소파 방정환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은 소파 방정환이다. 방정환은 1899년 11월 서울 아주개에서 미곡상 방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자문을 익히고 7세에 미림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근근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1년 만에 중퇴했다. 16세에 생계를 위해 조선총독부 조사국에 입사했으나 이듬해인 1917년 천도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한 후 이듬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3.1 독립운동 이후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의 청강생이 돼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1923년 귀국해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소년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전념했다.


방정환은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을 모아 ‘소년입지회’를 조직해 구연동화 실력을 자랑했으며, 보성전문학교 시절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신청년>을 발행하는 등 작가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아동전문 잡지 <어린이>의 창간을 주도했으며 어린이 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색동회’ 조직에 앞장섰다. <개벽> 동경 특파원으로 특히 안창남 비행사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귀국 이후 <어린이>의 편집인으로 어린이 운동에 전념했다. 방정환은 어린이운동가, 구연동화가, 아동문학가, 교육운동가, 인권운동가, 언론인으로 1인 다역의 열성적 활동을 하다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해 뭇 사람을 슬프게 했다.


어린이 운동에서 소파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소춘 김기전이었다. 윤석중은 이 두 분에 대해 “소파가 소년운동의 실천가라면, 소춘은 이론가였다. 소파가 이상주의자였다면, 소춘은 현실주의자였다. 소파가 나선 운동가라면, 소춘은 숨은 운동가였다. 그러나 두 분은 다 같이 천도교인으로 <어린이>와 <개벽>을 꾸며내면서, 이론과 실천이, 그리고 이상과 현실이, 소년운동에 조화되고 중화되었다.”며 이론가와 실천가로 합심해 어린이 운동을 성공시켰다고 했다.
 

▲ 최초의 어린이날 기사(<동아일보>, 1922.5.1.)

우리의 어린이는 행복한가?


100년 전 ‘어린이의 날’의 선전문에는 어린이를 위한 어른들에 대한 당부가 포함돼 있었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敬語)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睡眠)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추어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대접해 주십시오.


이 선전문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어린이 인권을 위한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23년의 어린이날 행사에서는 위의 선전문을 더 구체화시켜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 동무들에게’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이는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어린이 인권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1924년 국제연맹에서 ‘어린이 권리 선언’을 제정했는데 우리는 이보다 2년이나 앞서 어린이 인권을 강조했다.

 

▲ <어린이> 편찬의 주역들. 사진 위가 방정환, 아래 왼쪽부터 윤석중, 최영주, 이정호. 건물은 <어린이>를 발행한 개벽사.

이렇게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만들고 어린이 인권선언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우리가 현시점에서 “우리의 어린이는 행복한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론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어린이 살해와 학대 기사, 공부에 짓눌려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상황을 보면 과연 100년 전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던 어린이들에 비해 크게 나아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100년 전보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어린이를 인격체로 대하고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인가에는 의문이 든다. 먼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에게 강요된 꿈을 심어주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으면서 소파 방정환이 염원했던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신기루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성강현 동의대학교 역사인문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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