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와 용문석굴, 백거이가 잠든 향산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1-23 1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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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동한의 2대 황제 명제 때(64), 명제의 명을 받고 낙양을 떠나 천축으로 가던 사신단은 우연히 인도의 고승 ‘가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나 이들과 함께 불경을 실은 백마를 타고 낙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68년 낙양에 ‘백마사’가 세워졌다.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백마사는 낙양시 동북쪽에 있으며 낙양으로부터 10여km 떨어져 있다. 정문인 산문에 들어서자 길 양쪽으로 석비가 나온다. 오른쪽 석비 ‘낙경백마사조정기’는 원나라의 태조 쿠빌라이가 보수한 것으로, 백마사의 유래에 대해 글이 새겨져 있다. 서예가 조맹부가 비문을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의 석비 ‘중수서경백마사기’는 송나라 태종 조광의가 보수한 것이다. 이 비문은 특이하게 위에서 아래까지 글씨를 꽉 채우지 않고 자유롭게 줄 바꿔 쓰기를 해 놓았다. 그래서 문장이 끊어져 있다는 의미의 ‘단문비’라고 불린다. 이 석비는 유명해져 ‘백마사 6경’ 중 하나로 불린다. 단문비는 석비의 상단부가 잘려 있다.

 


천왕전 앞, 종루와 고루 중 특히 종루에 걸린 ‘마사종성’(백마사의 종소리)은 달 밝은 밤에 종을 치면 수십 리 밖에서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고 멀리 떨어진 낙양 종루에 걸린 종도 화답해서 울린다고 한다. 백마사 6경 가운데 하나인 마사종성은 ‘야반종’으로 불린다.


종루의 동쪽에는 가섭마등과 축법란의 무덤이 있다. 두 스님은 백마사에서 불경을 번역했고 이곳 백마사에서 입적했다. 두 스님의 무덤인 ‘등란묘’도 백마사 6경에 속한다. 백마사 5대 불전(천왕전, 대불전, 대웅전, 접인전, 비로전) 중 접인전을 지나면 6m 높이의 ‘청량대’가 나온다.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불경을 번역했던 장소다. 역시 백마사 6경에 속한다.

 


동한 시대의 중국에는 아직 중국인들의 전통 종교인 도교가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백마사가 있는 남쪽에는 둔덕 두 개가 있는데 이것이 ‘분경대’다. 동한 71년 도교의 도사들과 천축에서 온 가섭마등, 축법란과의 법력 대결이 있었는데 도경은 불에 탄 반면 불경과 사리에 불을 붙이자 사리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나왔다고 한다. 이날 법력 대결이 벌어졌던 분경대 역시 백마사 6경에 속한다.


‘제운탑’은 ‘구름과 높이를 나란히 한다’는 뜻으로 13층 높이의 벽돌로 쌓은 탑이다. 백마사 산문 밖에 있다. 동한 때 처음 세워졌다가 훼손돼 금나라 때 재건축되었다. 백마사 6경 중 하나다.

 


2천 년 역사를 지닌 백마사에는 다른 여러 나라의 불전이 세워져 있다. 백마사가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실크로드의 문화가 중국에 몰려들던 시기였다. 미약하게 출발했던 불교는 북위시대에 이르면 도교를 밀어내고 맹위를 떨쳤다. 북위 말엽인 518년 낙양에는 사찰만 1367곳에 이르렀고 전국의 승려 수는 200만 명에 이르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모든 종교가 사라졌던 중국에서 21세기를 맞이해 불교가 다시 중흥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311년, 흉노는 서진의 수도였던 낙양을 함락했다. 폐허가 된 낙양의 부흥을 다시 이끌어 낸 것은 북위의 효문제였다. 효문제는 낙양을 수도로 삼으면서 남쪽 교외에 대규모 석굴사원을 조성한다. 바로 중국 석각예술의 최고봉인 ‘용문석굴’이다.


이수가 흘러가는 양쪽에 두개의 산이 있는데 서쪽의 용문산과 동쪽 향산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산 암벽에 벌집을 뚫어놓은 듯한 석굴이 조성돼 있다. 대략 남북으로 1km 정도 달하는 구간에 불상만 10만 개가 있다. 이 용문석굴은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석굴은 대부분 서산 용문산에 분포돼 있다. 돌산을 높이 9m, 바깥에서 안쪽으로 7m 파고 들어간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놀라웠다.


서산에 있는 석굴 중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될 불상은 빈양중동, 빈양남동, 빈양북동으로 구성된 ‘빈양삼동’에 있는 불상이다. 빈양삼동 중 빈양중동에 있는 불상만이 북위 때 완공된 것이다. 빈양중동의 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인도식 불상과 달리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다. 이는 북위 효문제가 추진했던 선비족의 한화 정책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불상의 모습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수척한 얼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빈양남동과 빈양북동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풍만한 몸매의 당나라 시기 제작된 불상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봉선사의 노사나불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기상으로 단정히 앉아 있다. 그(그녀?)의 신비하고 사색에 잠긴 듯한 은은한 미소는 ‘동방의 아테나’로 칭송 받는다. 노사나불은 크기부터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높이 17m, 머리 높이만 5m에 귀 길이만도 1.9m에 이른다.


봉선사에 자리한 두 천왕과 두 역사도 당나라의 위대한 시대적 상징으로 칭송된다. 노사나불이 자리한 봉선사는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한 675년에 완공되었다. 완공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측천무후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로 등극한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690년, 그녀의 나이 67세였다.


서산을 둘러본 뒤 이수를 가로지르는 만수교를 지나면 동산(향산)에 이른다. 동산의 주요 석굴은 뇌고대 삼동, 만불구의 천수천안관음 상감, 서방정토변감, 고평군왕동, 간경사, 이연화동, 사안동이다.


이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석굴은 간경사에 있는 ‘29존나한군상’이다. 이 나한 부조는 당나라 시대 최고의 나한 군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29존 나한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불법을 전수받아 내려오는 29대까지의 종사들이다.


그런대 29존 나한 군상에서 첫 번째 종사인 마하가섭상이 뜯겨져 있다. 제국주의 시대 때 약탈되어 외국으로 반출된 것이다. 2001년 4월, 마하가섭상은 이를 소장하고 있던 캐나다 국립박물관에서 중국으로 반환한다. 캐나다 정부와 국립미술관 측의 자발적 결정이었다. 캐나다 국립미술관 홈페이지에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라는 글귀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용문석굴에서 약탈된 수많은 불상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갤러리를 장식하고 있다. 용문석굴에서 사라진 유물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고 그 다음이 미국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거이는 당나라 때 활동했던 뛰어난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인 ‘비파행’과 ‘장한가’는 “어린아이도 장한가를 읊조릴 줄 알고, 오랑캐도 비파행을 노래할 줄 아네”라고 할 만큼 유명했다. 젊은 시절 백거이는 시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그 의지가 꺾인 뒤 삶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곤궁해지면 홀로 자신을 잘 지키고, 영달하면 천하를 더불어 구제한다”는 ‘독선기신 겸제천하’(맹자)는 중국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다.

 


58세 되던 해 낙양에 정착한 백거이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벗 삼아 무위도식하며 지내다가 75세에 세상을 뜬 후, 이곳 향산에 묻혔다. 용문석굴이 있는 동쪽 산인 향산에는 백거이의 숨결이 가득하다.


향산사는 천축 고승의 무덤과 중국 선종의 2대 선사 혜가스님이 수행한 곳이다. 백거이는 스스로를 향산거사라 칭하며 이곳을 자신의 귀속처로 삼았다. ‘향산사 구로정’에는 백거이와 함께 은거했던 아홉 노인들의 화상이 걸려 있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가 향산사에 들렸다가 칭송한 석비 ‘건륭어비정’도 남아 있다.


향산사에는 ‘장송별장’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장제스와 그의 아내 쑹메이링이 36일간 지냈던 곳이다. 장제스의 50세 생일을 앞두고 1936년 10월 29일 이곳에 온 장제스는 부하들에게 공산당 토벌에 집중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장쉐량은 내전을 멈추고 일치단결해 항일에 힘쓰자고 장제스에게 간언한다. 이때 장쉐량이 공산당을 토벌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장제스는 12월 4일 시안까지 가서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다가 12월 12일 역사적인 ‘시안사변’을 맞게 된다.

 


‘백원’은 백거이의 묘원이다. 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청윤’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백거이가 벗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짓던 곳이다. 정자 옆에 ‘낙천당’이 나온다.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백거이가 앉아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취음선생’(백거이의 호, 술에 취해 시를 읊는다)의 모습이다. 이곳을 지나 더 올라가면 비파봉 정상이고 바로 이곳에 백거이가 잠든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는 ‘당소부백공묘’라고 적힌 비석이 있고, 무덤 옆에는 ‘취음선생전’이 새겨진 자연석비가 있다. 무덤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비파행’이 새겨진 석각이 나온다. 중앙의 요직에 있다가 좌천돼 지방관리로 내려와서, 가을 밤길을 걷다가 배에서 나오는 비파 소리에 끌려 한 여인을 만난다. 이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듣고 비파 연주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백거이. 한국은 겨울이고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있지만 이곳 낙양은 아직 늦가을이고 한낮의 날씨는 제법 포근하다. 가을바람에 실려 백거이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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