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평화를 위한 철학적 기획,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읽고

이해규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회원 / 기사승인 : 2022-01-25 0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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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평화를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경제력, 군사력, 동맹과의 유대관계, 높은 도덕성 등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다, 오래전부터 힘의 균형을 통해서 그 속에서 역설적으로 평화가 가능하다는 현실주의와 국가 간에도 이성적 해결을 신뢰하고 제반 조약과 규범의 확보를 통해서 평화가 가능하다는 이상주의는 늘 대립해왔다.


이성과 도덕으로 전쟁과 폭력의 해결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던 71세의 노(老) 철학자 칸트(1724~1804)는 항구적인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1795년에 <영구평화론(이한우 역, 1992, 서광사)>이라는 설계도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 유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서 프랑스 혁명과 이어진 프랑스의 제국주의의 발호와 이에 맞서던 영국, 프로이센(독일), 러시아, 스페인의 합종연횡 속에서 전쟁은 더 이상 제어가 안 되는 형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자연의 법칙으로 전쟁을 옹호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 자체를 근본적으로 종식시켜서 영원한 평화를 구축할 수는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평화를 위한 발칙한 아이디어는 인간의 이성을 확신하고 그것의 발현을 강조했던 칸트이기에 이성적 인간이 모인 국가라는 조직체도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전쟁보다는 평화를 이룩하는 것도 인간의 의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책의 요지는 국가 간의 영구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으로 여섯 가지를 나열하고 이어서 확정 조항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조항마다 칸트답게 자신의 생각을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는데 칸트의 문체가 난해하듯이 조항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 독자의 입장에서 고도의 집중력과 행간을 파악하는 데 다소간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예비 조항과 확정 조항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자. 칸트는 금지 형태의 예비 조항에서 국가 간의 조약 체결에 있어서 미래의 전쟁의 화근을 유보한 채 맺어진 조약은 진정한 평화조약이 될 수 없고, 이웃 국가에 대해서 상속・교환・매매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국가의 상비군의 점진적 철폐, 대외전쟁을 위한 국채 발행 금지, 타 국가에 대한 일체의 간섭 금지, 전쟁을 함에 있어서도 상호 신뢰를 해치는 잔학한 적대행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확정 조항에서는 영구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3개의 적극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는 공화정으로 가야 하고, 모든 국가는 완전 평등상태에서 연방 체제 속에 존재할 것과 마지막으로 세계 시민으로서 우호적으로 이웃 나라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제1 확정 조항에서 공화제를 옹호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법률이나 정책을 입안함에 있어서 국민의 동의가 필요한데 전쟁도 마찬가지로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이 손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반드시 공화정을 채택할 때만 영원한 평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음에도 모든 국가가 공화정체가 아니기에 여전히 실현 가능한 제안인지 의문이 떠오른다.


특히 20세기 와서 제1 확정 조항은 두고두고 논쟁의 소지가 돼왔는데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칸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확정 조항이 현대 국제관계에서 약소국(제3세계)에 대한 침탈의 명분으로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제2 확정 조항에서 강조한 연방 체제는 모든 국가가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존재하면서도 평화를 위해서 일정한 통제와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0세기 1, 2차 세계대전 속에서 창설된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은 칸트의 연방체제론이 현실 속에서 발전된 것이다.


칸트는 부록의 형태로 제시한 제1 추가 조항 ‘영구평화의 보증에 대하여’에서 “전쟁을 통해 모든 지역에, 극히 불모의 지역에까지 인간을 쫓아 보내 그곳에 살도록 했고 역시 마찬가지로 전쟁에 의해 인류가 다소간이나마 상호 간 법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했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자연의 교묘한 설계라고 주장했는데 이 대목에서 칸트가 한편으로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교묘하게 정당화하는 것 같아서 그의 평화 사상에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단순히 시사적인 문제를 상식 수준에서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 철학, 도덕 철학 및 정치 철학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논의하며, 영원한 평화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한 것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전쟁이 칭송되고 힘이 곧 정의라는 시대는 이 책이 출간된 이백 년 전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다. 여전히 현실주의로서 전쟁과 평화를 바라보는 강자의 논리는 견고하다. 그 속에서 강대국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 군사력을 강화하며 무기를 만드는 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다.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점과 분단, 한국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바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과 힘의 논리의 희생양이 됐던 대한민국의 과거에 속할 뿐 아니라 여전히 이 나라의 현재를 생생히 규정하고 있는 조건들이다. 아직 분단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근대적 과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강대국의 틈바귀 속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실정이다.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대화와 협력, 상호 신뢰 속에서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평화를 강조한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그 자체가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구축하는 데 충분한 지향점을 제시해주면서 평화를 위한 담대한 여정에 철학적 지평을 넓혀주는 훌륭한 고전임에 틀림 없다. 한국인이여, 아니 세계인들이여. 평화를 열망하는가? 그렇다면 <영구평화론>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이해규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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