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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암 기자 / 기사승인 : 2019-08-02 17: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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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저널 시민포럼
▲ 왼쪽부터 이현호 역사교사,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이현미 시민기자. ⓒ이종호 기자

 

“6.10 만세운동은 지방에서도 이뤄 졌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자 처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이하 배)=산업화 시기 이후에 울산으로 대거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도시가 울산이다. 울산의 과거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울산교육청 사업을 진행하면서 묻혀 있던 분들을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의미가 크다. 동구 보성학교 성세빈 선생 말고도 이효정 선생, 조영진 선생, 야학운동이나 어린이교육에 앞장섰던 안태윤 선생, 언양 지역의 야학운동을 이끌었던 이무종 선생까지 다섯 분을 새롭게 조명하고 드러낸 것이다.

이현호 역사 교사(이하 이)=1926년 6.10 만세운동이 서울에서만 있었고 지역에서는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3.1운동과 똑같이 지방에서도 있었다. 그날 이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인산일이었고, 이미 독립운동쪽에서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본 역시 다 알고 있었다. 이 운동은 지역 차원에서도 대립관계가 보였다. 당시 울산에서도 순종 사망 이후에 망곡을 하고 경성 쪽을 향해 요배를 했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다 닫았다. 당시 학교 교장들이 대부분 일본인인데 이런 행위들을 학생들에게는 대부분 금지시키게 된다. 그러자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동맹휴학을 한다. 울산에서도 울산초, 남목초, 병영초와 심지어는 야학 같은 데서도 동맹휴학을 한다. 지역 언론쪽에서 인산일에 참가하는 참배단을 조직해 서울로 올라가려 하니까 일본경찰들이 그것을 막았다. 일본 경찰들을 속이면서 몰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는 뒷얘기들도 전해졌다. 6.10 만세운동이 서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역 모든 곳에서 있었고,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한 계기가 된 것이 6.10 만세 운동이라고 본다.

박현미 시민기자(이하 박)=최근에 이관술 기념사업회 기사를 봤다. 이관술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고 이분을 얘기하면 노덕술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배=이관술 선생은 학성이씨 집안의 유력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학성이씨 중에 범서읍 지금 입암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 일대가 평야인데 많은 땅을 소유하고 부를 일궈간 유력가문의 재력있는 집안의 아들이 이관술선생이었다. 공부도 잘해서 지금의 일본 동경대 사범학과를 들어가게 된다. 이관술 선생은 적극적이고 모범적이며, 타협하지 않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변장의 달인'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 경찰에 잘 잡히지 않았다. 옥고도 많이 치렀지만 탈출도 잘 했다. 유력한 집안의 엘리트와는 전혀 다르게 숯장이로 변장해 전국을 돌면서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노덕술은 장생포 출신인데 가난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울산에서 순사로 시작해 동래와 통영 등을 돌면서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으며 계급이 점점 올라갔다. 그는 경상남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가나 신간회를 탄압해 경성까지 올라가게 되고 조선인 경찰로는 상당한 고위직으로 올라가게 된다. 노덕술이 종로서에 있을 때 이관술 선생과 조우하게 된다. 이관술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것이고, 노덕술은 조선인 이지만 일본 경찰 안에서 높은 고위직 관료로 직접 이관술을 고문하는 역할 을 했다고 한다. 그 고문이 너무나 혹독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 반민족행위자, 친일과 부역했던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처벌이 이뤄지지 못한 채 넘어간다. 반민특위법이라는 이름으로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그나마 법정에 올렸던 이름이 노덕술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바로 풀어줬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언급 됐다. 당시 대통령이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관술 선생은 해방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위조지폐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기 징역으로 감옥에 갇힌다. 그 후 한국 전쟁이 터지자마자 아무 법적인 절차 도 없이 위법한 형태로 총살당했다. 이 위법한 형태의 총살에 관해서는 국가가 잘못했다는 배상 결정이 나기도 했다.

“미군정, 조선공산당에 인플레이션 책임 물어”
“조선공산당은 오히려 정치자금 많이 있었던 상황”


박=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미군정이 검거했다는데 이해가 안 된다. 그게 다 조작된 것이지 않는가?

이=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간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 미국이 승전국으로 서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를 대신 통치하게 되는데, 이것을 미군정이라고 한다. 그 시기에 경찰을 통제한 것은 미군정이었다. 조선정판사 사건도 미군들이 처음 우리나라에 왔는데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몰랐고, 미군들 가운데 우리말 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 없었다. 당시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정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미군이 자신들의 통치를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친일했던 사람들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던 거 다. 반대로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사람들은 미군이 봤을 때 도움이 안 됐던 거 같다. 미군은 자신들의 통치에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이 방해가 됐다. 그 세력을 쳐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돈줄을 막는 거다. 그 돈줄을 잡고 있던 사람이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었던 이관술이었다. 그래서 이관술을 쳐야만 조선공산당의 목줄을 죄는 것이 됐다. 그때 정판사는 식민통치 기간 때 돈을 찍어내던 회사가 있던 자리다. 거기서 공산당 지시로 가짜 지폐를 만들어서 너희들이 쓴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사회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건 전부 너희들 책임이다’ 고 뒤집어씌운 거다. 그래서 억울하게 이관술 선생이 죽게 됐던 거다.

배=이관술 선생을 고문할 때 노덕술의 지휘를 받는 경찰들이 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미군정 자료들을 오랫동안 접근할 수 없었는데, 한국외대의 임성욱 박사가 논문으로 정판사위폐 사건의 조작된 부분들을 학술적으로 드러내는 형태의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정판사위폐 사건에 대한 전말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정판사는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근처에 있던 건물이다. 당시 그 건물 에는 조선공산당이 입주했는데, 조선 공산당은 애초에 돈 찍어내는 것이 필요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인쇄기가 이미 있으니 자신들 기관의 목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미 일본인 휘하에서 인쇄공을 했던 사람들이 지폐원판을 빼돌린 과정이 있었다. 미군정이 도착하기 전까지도 일본 엔화를 썼고, 이런 무정부 상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서 일본의 인쇄업자들은 위조지폐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판을 빼 돌린 사건이 있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미군정이 조사하면서 조선공산당에 덤터기를 씌우기 좋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공산당의 상황은 위폐를 찍을 필요도 없이 수많은 정치자금이 이미 들어왔었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 세력이나 사회주의 계열이 북으로 넘어 가거나 남한에서는 지하에 숨을 수밖에 없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의 발단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울산대 역사학과 허영란 교수를 비롯한 구술사 모임 기억과기록에 서 작년 10월 3일 울산보도연맹 학살지를 다녀왔는데 4.19 이후 유족회가 꾸려져 묻혔고, 5.16 군사정권 때 파헤쳐졌다고 하는데?

배=처음 보도연맹 관련해 울산학살사건 얘기를 들은 건 2004년도였다. 생명과평화결사라고 도법스님이 전국 탁발순례를 돌았는데, 도법스님이 울산에 도착했을 때 그 얘기를 들었다. 울산 성안동에 있는 백양사 앞에 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그 무덤이 5.16 쿠데타 이후에 쿠데타 정부에 의해 바로 파헤쳐져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원혼을 달래는 진혼제를 올리자고 해서 참가했었는데, 이때부터 가졌던 관심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다. 정판사위폐사건이나 이관술 선생, 노덕술 얘기가 다 연관이 돼 있는 거다. 일제강점기 때 해방으로 가는 과정에 실제 변절하지 않았던 우리가 존경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있는데, 그분들 중 다수가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다. 많은 옥고와 탄압이 있었는데 변절하지 않고 항일정신을 유지해갔던, 민중들과 함께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잡혀도 탈출하고, 고문받아도 변절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정치집단이라고 봤다. 박헌영, 여운형, 이관술 이런 분들이 정치여론조사를 했을 때 상위권에 들어 갈 정도였으니까. 김구 선생이나 미국 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압도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거다. 그런데 미군정이 통치를 하려고 보니까 자신들의 통치 기반은 없는데 사회주의 계열이 세다 보니 이것을 억누르기 위한 방식으로 친일파들이나 친일부역자들 중에서 언어가 되는 사람들을 적극 채용하게 된 것이다. 일제 때 경찰의 고위관료나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이 그대로 미군정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니 독립운동가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고, 친일파는 세력이 강해지게 된다. 그 후 전쟁이 터진 과정에서 친일파에서 경찰이나 군인으로 갔던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 계열의 후손 들이나 지인, 가족, 형제들, 그 많은 당사자들을 공격하고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역사상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가장 참혹하고 잔인하고 불법적인 국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노덕술 관련해 재밌는 뒷얘기를 말씀드린다면,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잡혔다가 풀려났는데 그 후 6.25 전쟁이 일어나 육군헌병으로 특채가 되고 중령까지 올라가게 된다. 중령급 이면 어떤 한 지역 단위의 지구대 사령관 정도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모종의 사건에 걸려서 군복을 벗게 되고 이후 사라진 줄 알았는데 4.19 혁명 이후에 노덕술이 울산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그때 자신을 뭐라고 설명하냐면, ‘빨갱이를 때려잡던 반공투사’ 라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했다. 그 당시 분위기가 반공이라는 부분에 사람들은 굉장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노덕술은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선거에서는 떨어졌다. 그 후 또 사라졌다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 1968년도에 궁정동에서다. 노덕술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궁정동이 바로 후에 청와대의 안가가 된 것이다. 이건 분명 노덕술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던 인맥이나 정보라인들이 그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거다.

배=군대에서 예편하는 과정도 사실상 그 이유가 뇌물횡령수수사건이었다. 노덕술은 천인공노할 친일파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반민특위에서도 ‘단 한 명을 처단해야 한다면 노덕술’ 이라고 했는데도 그가 살아남았던 것은 장택상이나 이승만 등 최고권력자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최고권력자들도 더 이상 비호할 수 없었던 것이 뇌물 사건이었고 결국 노덕술은 예편을 하게 됐던 거다. 지난 군사정권 시절 이근안, 박처원 같은 공안라인들의 수사 방식들이나 수형자를 대하는 태도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때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 뿌리의 중간에 노덕술이 있었다고 본다.

“대운산 등에서 쇠줄과 탄피 2트럭 분 나와”
“희생자들에 대한 다독거림과 존중 있어야”


이=보도연맹은 1949년도에 조직 됐고 국가에서 만든 단체다. 사상전향 한 사람들을 국가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보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나니까 겁이 난 것이다.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내가 되려 당하지 않을까 겁을 먹었던 것이다. 울산 같은 경우는 1950년 음력 7월 7일을 앞뒤로 한 시기에 많은 학살이 있었다. 대운산, 청량의 반정고개, 또 소규모지만 방어진 앞바다에 수장을 한 경우도 있다. 또 일부는 옥동의 법원 쪽에서도 소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이후에 사건이 묻혀 있다가 4.19혁명 직후에 과거를 밝혀내는 유족회가 구성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 지게 됐다. 유족회가 처음 만들어진 장소가 울산의 삼호다리다. 삼호다리 밑에 유족대표들이 면 단위로 모여서 울산군 유족회를 만들었다. 면 단위기 때문에 책임자들이 다 있었고, 당시 장면 정권이었기에 장면 정권을 통해서 밝혀달라고 한 것도 있었다. 1950년 당시 870명이 학살을 당했는데, 한 명이 살아남았다. 그분은 학살터로 끌려가는 도중 탈출했다. 탈출하면서 도망을 가는데 농가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니까 주인이 놀라서 집을 버리고 도망을 간 거다. 곧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잡으러 오니까 저수지에 들어가서 코만 내 밀고 숨어 있었다. 그분은 4.19 때까지 근 10년 간을 집 뒤에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4.19혁명 직후에 유족회가 구성되고 난 뒤 이분이 나와 서 증언을 하게 된다. 증언을 듣고 유족회는 대운산 등을 갔는데 총살터 같은 곳에서 쇠줄과 탄피가 2트럭분이 나왔다. 이분의 증언에 의해 대부분이 밝혀지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울산의 김수선 의원이 개입하면서 울산보도연맹사건은 전국 단위로 알려지게 되고 국회 차원에서 조사가 이뤄지게 된다. 후에 백양사에 비석과 무덤까지 쓰면서 추모제도 지내게 됐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세력은 비석을 때려 부수고, 무덤을 파헤쳐서 해골을 끄집어내 화장해서 버렸다고 한다. 그때 활동했던 유족회 회원들은 면 단위 책임자까지 전부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됐다. 그 중 살아남았던 분이 그 비석을 군인들이 와서 깼는데, 백양사 앞 터에 묻었다고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파헤치고 싶다고 말하더라.

배=울산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4.19혁명 이후에 보도연맹이나 민간학살을 폭로하고 그것과 관련해 유족회를 구성했던 대표자들이 피해를 받게 된다. 울산은 4명이 구속되고 처벌까지 받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족들이 한 달 동안 그 지역을 다 뒤져 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때 820여 개의 두개골과 탄피가 나왔는데, 유족들은 이런 처참한 과정을 눈물로 수습했을 것이다. 그 중엔 어머니의 뱃속에 잇다가 유복자로 태어난 분들이 있다. 10년이 지나 열 살 나이에 엄마와 친척들을 따라서 생판 보지 못한 아버지 유골을 찾겠다고 한 달 동안 같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허리띠의 버클은 내 동생 것이야’ , ‘여기 단추는 남편 거야’ 라고 하면서 유골들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런데 5.16 쿠데타 이후 단 3일 후에 유족회 핵심간부들이 연행됐다. 그 소문을 듣고 나머지 간부들은 타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 군부는 유골들을 몰래 파헤쳐 가지고 가서 3일 밤낮을 화장을 하고 유족들 모르게 뼛가루를 뿌리게 된다. 왜 이 아픈 역사를 우리가 제대로 감싸 안지 못하고 있을까? 물론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이후 에 유족들이 재판을 했고, 재판에 참가하신 분들 중 다수가 배상도 받았고 울산시가 매년 추모제나 고유제를 지내고 있지만 이것을 너무 조용히 묻어 둔 채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역사를 드러내는 것을 유족들에게만 맡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나서서 품을 수 있는 사회적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다. 희생자들은 10대에 서 50~60대까지 걸쳐있는데, 주로 희생된 분들은 20~30대분들이 많았다. 지역으로는 농소, 방어진, 대현, 범서 이 지역에 가장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다. 이 분들 중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1948년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질 때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이다. 당시 보도연맹 명단을 채우려고, 이걸 가입하면 배급에 우선권이 있다든지 등의 말에 솔깃한 경우도 있었고 내가 신청된 지도 모르고 있다고 나중에 끌려가서 이름이 있었던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당시 울산경찰서에 수감돼 있을 때 사람들이 돈을 싸들고 가서 빼내려고 했지만, 이 노력들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과거를 돌이켜보는 이유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알아보기 위한 것 이다. 내가 미래에 어떻게 될 건지 알려면 과거에 내 행적이 어떤지를 알아 야만 미래가 잘 보이는 것이다. 서로가 대립과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과거를 제대로 기억해내고 그것을 올바르게 정리해내야만 앞으로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밝은 미래가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런 것들을 알아내고 널리 퍼트리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배=100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긴 것 같지만, 사실 보도연맹 사건은 국 내 한국사 속에서 있었던 여러 과정에서 현재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시기까지는 70년이라는 시간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 평범하게 살고 있는 분들까지도 그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그때 일어났던 갈등이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있지 않나. 해방 이후에 잘 풀어냈으면 좋았겠지만 못 풀어내지 않았나. 최소한 먼저 앞서서 희생되신 분들, 그 과정에서 아직까지 그 고통을 인내하고 사는 후손분들을 봤을 때 이런 사회적 아픔에 대해서는 처벌까지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희생자분과 그 후손들에 대한 다독거림과 존중이 있어야 하며, 이에 울산이 앞장서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이기암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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