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에서 사슴을 쫓는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1-30 17:20:41
  • -
  • +
  • 인쇄
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천하제일협곡, 함곡관

형승편간십이제 높이 솟은 관문이라 열두 봉우리가 평평하게 내려다보이고
하림무로상무제 내려가는 가는 길도 오르는 길도 없네
토낭약주황하북 마치 흙부대로 막은 듯 황하가 북쪽으로 막혔고
지축구련백일서 땅의 중심은 해 지는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천의이귀삼척검 하늘의 뜻은 이미 한고조의 삼척검에 돌아갔는데
인심귀특일환리 함곡관 관문을 막는다고 인심이 돌아가랴
추화만무풍진정 가을 들판에 곡식이 익어가고 전쟁판도 그치었으니
온과정안청오계 한가로이 말 타고 가며 낮닭 우는 소리만 정겹게 듣는다
이제현(고려말 시인이자 학자)


‘함곡관’은 중국 허난성 북서쪽에 있어 동쪽 중원으로부터 서쪽의 관중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황허강 남안의 링바오(영보)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동서 8km에 걸쳐 형성된 황토고원의 깊은 골짜기로 양쪽 산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고, 벼랑 위의 수목이 햇빛을 차단해 한낮에도 어두우며, 그 모양이 ‘함’처럼 깊이 깎여 세워져 있어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외길 하나 밖에 없는 곳이다.

 


‘관중’은 천하의 요새인 동쪽의 함곡관, 서쪽의 대산관, 남쪽의 무관, 북쪽 소관 한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에 명명된 이름이다. 동서남북 어디에서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각 관에 의지하여 얼마든지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고, 인구가 많고 토지는 넓고 비옥하다. 이것이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와 같은 역대 왕조들이 관중에 도읍을 정한 이유다.
춘추전국시대 때, 관중에 자리 잡은 진나라는 수도인 함양을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함곡관을 적절히 활용한다. 합종책을 주창한 장의의 변설에 따라 나머지 6국 연합군이 진나라를 쳐들어갈 때마다 번번이 이곳 함곡관에 가로막혀 격퇴 당하곤 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탈출할 때 밤이라 함곡관의 문이 닫혀 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그의 식객 중 한 명이 “꼬끼오”하는 닭울음소리를 내 수비병들이 동이 튼 줄 알고 문을 열어줘 탈출에 성공했다는 일화, ‘계명구도’라는 고사성어도 이곳에서 생겨났다. 또한 수.당 교체기에는 이세민과 왕세충의 건곤일척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노자는 이곳에서 ‘도덕경’을 완성해 함곡관은 도교의 성지가 되었다.

 


원래 중국이라는 천하에는 따로 주인이 없었다. 누구든지 천하를 통일시키기만 하면 천하의 주인인 천자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중국 땅 안에는 하나의 민족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변방의 오랑캐라 할지라도 무력만 있으면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다. 군웅이 천하를 두고 다투는 일을 중국에서는 ‘중원에서 사슴을 쫓는다’고 표현한다.


항우가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진승과 오광의 난을 평정했던 장수)이 이끄는 진나라 주력군을 거록전투(기원전 207년)에서 무찌른 후 함곡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틈을 타 유방은 함곡관을 피해 남쪽으로 돌아 무관을 거쳐 함양에 먼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에 분노한 항우를 달래기 위해 유방은 항우를 찾아가 거짓 항복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앞서 쓴 글 ‘홍문지연’의 사연이다.


한편 항우는 ‘제일 먼저 함곡관으로 들어가 관중을 함락시키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회왕의 약속을 자기 마음대로 어기고 관중의 서쪽인 파, 촉, 한중을 유방에게 떼어준 뒤 한왕으로 봉한다. 또한 자신을 관중왕으로 봉하기에는 스스로도 염치가 없었는지 관중을 항복한 진나라의 장수들에게 3등분하여 나누어 주고 한왕 유방이 동진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항우가 유방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실수는 천하의 중심인 관중을 버리고 팽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었다. 한편,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 유방의 군대는 서촉으로 가는 유일한 길, 잔도를 불태웠기 때문에 안심하고 방비를 게을리 하고 있던 관중을 급습해 드넓은 관중을 차지한다. 한신은 촉에서 빠져나오는 샛길이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이 샛길을 통해 관중을 기습한 것이다. 한신은 이어서 함곡관을 나와 동쪽으로 계속 진군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마저 함락시킨다. 본격적인 ‘초.한전’이 시작된 것이다.


삼국시대 때, 동탁 토벌을 위해 모여든 제후들, ‘천하 18로 군’은 함곡관 동쪽에 모였기 때문에 관동군이라고도 불렀다. 동탁은 농서(감숙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세력 기반은 농서 지방에 있었다. 낙양에 있다가는 관동군에게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고립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헌제와 함께 낙양을 버리고 함곡관을 빠져나가 장안으로 돌아갔다.


190년 2월, 동탁이 낙양을 떠날 때 수백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으며 낙양에 있는 궁전과 민가들을 모두 불살라 버려 사방 200리 안팎은 개와 닭조차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 시켰다. 이때 불탔던 낙양은 120년이 지난 후 흉노의 침략으로 다시 한 번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당나라 때 양귀비의 양자였던 안록산은 체중이 230근(200kg)이나 됐을 정도로 뚱뚱보였다. 그의 튀어나온 뱃살은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범양, 하동, 평로의 휘하 병력과 거란과 해의 군사까지 끌어 모아 총 5만의 병력으로 낙양을 함락시키고 수도 장안을 공략하기 위해 함곡관으로 진출했다. 가서한 장군이 함곡관을 지킬 때 매일 밤 봉화를 올려 동관이 무사함을 알리도록 했으나 어느 날 밤부터 봉화가 오르지 않았다. 날이 새자 당 현종은 1천명의 친위군만 대동한 채 장안성을 빠져나와 서남쪽 촉으로 향했다.

 


장안과의 거리가 100여 리 되는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따라온 친위대의 모반으로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이 목이 베어 죽고 양귀비마저 목을 매어 죽게 된다. 양귀비가 죽은 후 10여 일만에 수도 장안은 안록산에게 함락된다. 현종은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기병이 강한 회흘(신강위구루)의 군대를 불러들였는데 “성을 탈환하면 그곳 토지와 사서는 당나라로 돌려주되 금이나 비단과 자식들은 회홀이 갖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장안과 낙양을 탈환한 후 회흘 병사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겁탈한 행위는 반란군보다 더 포학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757년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양귀비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고 슬픔과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78세에 타계했다.

 


당나라 말기인 880년 12월, ‘황소의 난’ 때 함곡관은 북상한 60만 황소군에게 단 하루 만에 돌파된 기록이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에서 한 나라가 망하고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일이었다. 그리고 천하를 놓고 영웅들끼리 싸우는 전쟁터의 중심지는 늘 함곡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함곡관을 찾아갔다. 올려다보면 뒤로 넘어질 것 같은 깊고 높은 산이 가로막고, 구절양장보다 더한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오싹한 낭떠러지가 나오는 협곡을 기대 했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낮은 구릉 사이에 밋밋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함곡관 입구의 문은 굳게 잠겨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게시판을 훑어보니, 보수공사 중이며 2020년에 개장한다는 안내 글이 적혀있다.


같이 갔던 게스트 하우스 주인 리젠장(이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간 술을 마셨고 친구가 되었다)이 문을 두드려 “한국에서 온 손님이다”라고 한참 설명을 하자, 문을 열어 주었고 게다가 관리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와 친절히 안내를 해 주었다.

 


그는 중국의 사학자들이 함곡관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중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196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찾아냈으며, 2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형이 바뀌어 평지가 되었고, 국공내전 당시에는 전쟁터였기 때문에 그나마 낮은 산이 뭉그러져 지금과 같은 구릉지대로 바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또 함곡관 앞에 흐르는 작은 강물은 2천년 전에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파 놓은 해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오른쪽 낮은 구릉 위로는 기차가 다니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개장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듯했다. 함곡관 입구에는 동으로 만든 병사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구릉 사이에 옛 성곽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함곡관 입구 왼쪽은 발굴 현장인 듯 양철로 덮여 있는데 꼭 공사판 함바집 느낌이 났다. ‘발굴 현장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만드는’ 중국의 문화재 관리 정책상 이 자리에는 조만간 박물관이 들어서리라.


함곡관 성곽 위에 올랐다. 내가 온 방향, 낙양은 곧 중원이고 뒤돌아서면 관중 땅이다. 이 땅을 스쳐간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이름과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무수한 전쟁사를 하나씩 호명해 본다.


역사란 무엇인가!


박종범 자유여행가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박종범 자유여행가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