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과 반성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 기사승인 : 2019-01-30 1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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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산촌 통신

말에 어떤 이미지가 연결되어 본래 뜻이 퇴색하는 경우가 있다. 반성(反省)이 그렇다. 청소년기에 반성하라는 꾸중 안 들어본 사람은 없고, 반성문 안 써본 사람도 없다. 반성이라는 말에는 잘못이 있는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묻어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면 반성이라는 말 대신 성찰이라는 말을 쓴다. 의원이 공무원에게 “반성해요!” 소리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여전히 반성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나무랄 때나 쓰인다. 결국 어른들은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다. 물론 성찰도 잘 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는 어른들이 이 사회를 이끈다.


그런데 성찰이란 말이 고상하게 들리지만 반성이란 말이 훨씬 철학적이다. 노자(老子)는 도(道)가 작동하는 원리를 설명하면서 반(反)이라는 글자를 썼다(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부연하자면 진리와 이치는 평화롭고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로 격렬하고 불편하고 힘겨운 뒤집음(reverse)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반성이라는 말은 성찰보다 명쾌한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은 그냥 스스로 살필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반(反)을 해야만 비로소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귀농은 반성이다. 귀농은 반(反)이다. 이 말을 하려고 서두가 길어졌다. 귀농은 반성에서 출발하고 그 과정도 반성이며 결과도 반성이다. 따라서 반성이 없는 귀농은 귀농이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사이비(似而非)라고 부른다. 반성 없는 귀농은 사이비 귀농이다. 진짜 귀농과 가짜 귀농을 가르는 지점이 바로 반성이다. 오늘은 귀농이 가진 반(反)의 속성 두 가지만 보자.
첫째, 귀농은 도시에 대한 반성이다. 도시로 상징되는 물질문명과 물신주의와 무한경쟁, 이 미친 달리기에 앞서있는 사람이든 뒤처져 있는 사람이든 지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러다보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의심하며 회의하며 반성도 하지만 생각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중 몇몇은 생각을 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간다. 도시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도시에 작별을 고하고 떠나고 돌아가리라. 그게 귀농이다.


둘째, 귀농은 농(農)에 대한 반성이다. 귀농은 문자 그대로 농으로 돌아감이다. 그러면 대한민국 농업농촌농민은 푸근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아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기대부터 버리는 것이 농에 대한 반성의 출발이다. 요즘 농촌 인심이 예전과 다르다고 쯧쯧대는 사람, 원주민들이 귀농귀산촌하겠다는데 배척부터 한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반성이 필요하다. 왜 환영해야 하는가? 도시가 농촌을 망쳤는데 도시민이 곱게 보일 턱이 있겠는가?


정리하자. 도시에 대한 반성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수십 배 어렵고 오래 걸리는 반성은 농에 대한 반성이다. 기존에 지니고 있던 농에 대한 고정관념은 버리고 생각들은 뒤집어야 한다. 왜 대한민국 농업농촌이 이 지경까지 피폐해졌는지 뒤집어 묻고 뒤집어 공부하고 뒤집어 반성해야 한다. 그러면 안타까움과 허탈함과 분노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때쯤 되면 농민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게 된다. 농민은 그런 귀농자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지, 땅 사서 집짓고 돈 벌려는 반성도 공감도 없는 도시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


귀농은 반성을 그 속성으로 한다. 반성이 처절할수록 귀농은 철저해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반면에 반성하지 않고 덤비면 농에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고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이비 귀농만 늘어난다면, 농촌에는 또 다른 재앙이 더해질 뿐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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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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