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부부 이효정·박두복 이야기(4)

배문석 / 기사승인 : 2019-01-30 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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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울산 보성학교에서 보낸 1년

이효정은 1932년 3월에 동덕여고보를 졸업했다. 함께 4년을 보낸 친구들과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이효정의 몸과 마음은 크게 성장했지만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친구 그리고 동지로 지낸 벗들과의 이별이 무척 아쉬웠다. 절친했던 박진홍은 동맹휴업 때 퇴학을 당한 후 노동자로 공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경성RS독서회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돼 2년의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이순금은 효정과 함께 연행됐던 독서회 사건에서 불기소로 풀려나 졸업을 같이 했다. 그리고 오빠 이관술과 함께 조선반제국주의동맹 경성조직위원회(京城反帝同盟) 활동을 시작했다. 이효정의 또 다른 친구 이종희는 중앙상공주식회사(별표고무)에 들어가 노동자로서 여공들과 함께 활동했다.


가장 멀리 떠난 이는 이효정이었다. 경성에서 울산으로 삶의 공간을 옮겼다. 이효정이 울산으로 가게 된 것은 이관술의 조언이 컸다. 이관술은 제자이면서 친동생 같았던 이효정에게 무산아동에 대한 교육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효정은 이를 받아들여 울산 동면(東面 현재의 동구) 일산하리(日山下里 현재 일산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민족사립학교 보성학교(普成學校)에 교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여고보 졸업 후 첫 직장, 교사로 첫발을 내딛었지만 보성학교에 대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이효정이 서울을 떠날 때 이관술은 역까지 나와 직접 차표를 끊어줬다.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곳에 울산에서 마중 나온 이가 있었다. 장차 시댁의 어른이 될 박학규(朴學奎 1902~1950)다. 박학규는 동경 유학(명치대) 시절에 동경사범학교에 다녔던 이관술과 동향, 동갑이란 공통점으로 교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관술에게 교사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바로 박학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효정이 도착할 당시의 보성학교는 울산에서 유일한 사립학교였다.


동면에는 보성학교란 이름의 사립학교가 두 번 세워졌다. 앞선 1909년 일산리에 세운 보성학교가 1년도 안 돼 1910년의 국권피탈 뒤 너무 빨리 폐교됐다. 주변 아이들은 멀리 남목(南牧)의 보통학교나 동네 서당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3.1운동 후 다시 학교 설립을 준비하게 됐다. 먼저 노동야학을 1920년 4월에 만들었고 일제 경찰의 감시와 압박을 딛고 1922년 5월에 같은 이름으로 개교했다.

 
학교를 처음 제안한 이는 성세빈(成世斌 1893~1938)이다. 그는 1909년 보성학교 설립에 제일 많은 돈을 출연하고 앞장섰던 성수원(城水原)의 장남이다. 성세빈의 제안에 동참한 박학규, 김천해(金天海), 장병준(張丙俊), 천호문(千戶文)이 함께 시작했다. 이들은 부모세대부터 동고동락했는데, 앞서 한번 폐교당한 학교를 재 건립한 것은 위 세대의 뜻을 이은 셈이다.


더구나 모두 동면청년회(東面靑年會) 소속 회원이었고 이후 동면구락부(同勉俱樂部), 오월청년동맹(五月靑年同盟), 적호소년회(赤虎小年會), 울산군청년연맹(蔚山郡靑年聯盟), 울산청년동맹(蔚山靑年同盟) 동면지부, 울산신간회(蔚山新幹會) 동면지부 등 사회운동과 항일운동의 주체였다.

 

▲ 1932년 11월 6일 동아일보, 보성학교 교장과 교원 소개 기사

이효정이 교사로 왔을 때는 초대 교장 성세빈이 반강제로 퇴임한 후였다. 1928년 보성학교와 동면 그리고 일산리 주민들을 충격에 빠트린 ‘서진문 고문사(拷問死)’ 사건의 후과였다.


서진문은 동면 일산하리 출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던 중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에서 일본인의 폭행으로 크게 다쳐 돌아온다. 그때 보성학교에서 야학교사를 맡았다. 몸을 추스린 후 일본으로 돌아가 김천해 등과 재일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에 나섰다. 그러나 서진문은 1928년 10월 25일에 일왕 쇼와(昭和)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앞둔 대규모 검속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행됐다. 이때 고문을 당했고 이에 항거한 단식도 펼쳤던. 일본 경찰은 11월 16일, 빈사 상태로 서진문을 보석출옥 시켰지만 안타깝게도 단 하루 만에 ‘대한독립만세’를 포함해 3마디 유언만 남기고 세상을 먼저 떴다.


이 죽음을 두고 유족(아내 유상필, 딸 서정자)은 교토에서 열릴 일왕즉위식에서 암살을 계획한 것이 발각돼 고문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해당사건은 ‘모’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됐으니 기사검열과 보도통제가 필요할 만큼 중대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해를 넘겨 1월 11일, 고향 방어진에 도착한 서진문의 유해는 성세빈을 비롯한 오월청년동맹 회원들이 운구해 고향 월봉산 언덕(현 일산동 화정공원)에 묘를 쓰고 묘비를 세웠다. 방어진부터 일산까지 운구행렬이 이어지자 동면의 조선사람 대부분이 나와 추모했고 서진문에게 수업을 받았던 학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엄수했다. 이를 빌미로 일제당국은 곧바로 보성학교에 대한 압박을 가해 학교 폐쇄 명령(1929년 2월 18일)을 내렸다.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을 들먹였지만 장례 이전부터 보성학교가 동면지역의 사회운동과 항일운동 중심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설립자 성세빈과 당시 교사들이 퇴진한 뒤에야 학교를 이어 갈 수 있었다.
 

▲ 보성학교 교원 명단

위의 표에서 교원의 변화가 드러나듯 보성학교는 1925~29년 사이에 활발했고 서진문 장례와 학교 폐쇄 명령을 넘어선 1930년 이후 교원의 수가 급감한다. 이때부터 일제는 보성학교를 매년 등록을 갱신하는 교습소(학원)로 격을 낮췄다. 그리고 성세빈 강제 퇴진 후 학교 운영을 맡았던 성세륭 대신 1932년부터 윤덕조가 교장으로 역할을 바꿨다. 박학규가 나서 이효정을 보성학교의 교사로 초빙한 것도 그런 사정이 반영됐다.


1932년 봄, 이효정이 선생님으로 내려와 보니 거처할 숙소와 학교 건물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립학교치고 학생들 수가 적지 않았지만 공립학교가 받는 지원이 없어 지역유지와 청년들이 재정을 후원했다. 교실 유리창이 깨져 바람이 사방에서 들어오니 직접 깨진 곳을 막은 뒤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보성학교에서의 교사 생활은 1년밖에 할 수 없었다.


이효정은 사상이 불순한 교육을 한다고 일경 주재소로 자주 불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강제 해임 통지를 받았다. 이런 증언은 일경이 지속적으로 보성학교를 감시해 온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서울에서 여고보를 졸업한 후 부임한 교사의 과거 행적을 조사했고, 수업 내용까지 검열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효정은 울산에서 보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연을 만난다. 이효정이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인연이 이어져 결국 부부의 연을 맺게 될 청년 시절 박두복이다.

열혈청년 박두복(朴斗福)

박두복은 울산 동구 일산상리에서 19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박학문은 일명 박동실(洞首) 또는 박도감으로 불렸다. 도감은 조선시대의 관리 벼슬로 박학문의 선조들 중 울산목장(남목)의 감목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박학문은 명망 있는 지역유지였으며 동생 박학규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가세도 좋은 편이었다.


박두복도 보성학교를 나왔는데 1927년 졸업 이전에 동면소년회 활동을 했으며 적호소년회로 이름을 바꿔 창립(1926년 5월 9일)할 때는 임원으로 운동부를 맡았다. 적호소년회의 주된 활동은 정기모임을 열고 순회연극(소인극)과 강연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선배 조직인 오월청년동맹과 연계해 항일의식을 기반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 졸업 후에는 울산소년연맹 동면지부의 집행위원(1930)과 집행위원장(1931)을 맡아 소년운동을 계속했는데 성년이 된 후 부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한다.

 

▲ 김경출이 그린 박두복 초상화. 아들 박진수가 보관하고 있다.

이효정은 보성학교에 선생님으로 일할 때 학교로 찾아온 박두복을 만났다고 한다. 아주 짧게 봤지만 그 때의 박두복은 매우 인상 깊은 청년이었다. 서울 청년들과 달리 말끔하지도 않고 잘 차려입지도 않은 이가 불쑥 나타나 프롤레타리아 사전을 하나 빌려달라고 했다. 이효정은 그 사내에 대한 소문을 이미 소문으로 들은 바 있었다.


부산에서 일본 헌병을 죽이고 도망간 만주에서 붙잡힌 이야기. 집안에서 가장 좋은 땅을 팔아 급전을 마련 한 뒤 삼촌 박학규를 보내 사형 직전에 살려왔다는 것. 또 박학규는 가지고 간 돈가방을 만주의 헌병대장에게 그대로 던져 조카의 목숨을 담판지어 살렸다는 이야기다.


이효정은 그렇게 박두복이 독립운동 한 것을 알았기에 낯선 청년이어도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고 둘의 첫 만남이 사랑의 인연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열흘 동안 서너 번을 만날 정도로 두 사람 모두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수상한 세월이 가로막았다. 박두복이 다시 부산으로 떠난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적호소년회 회장을 맡았고 이후 진주사범전문학교(晉州師範學校)를 나와 부산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김경출(金庚出 1910~?)이 있었다. 둘은 고향에서 친형제처럼 어울렸고 항일운동에선 매우 신뢰하는 동지였다. 박두복이 일본 헌병을 죽였다는 곳이 부산이듯 고향에서 몸을 추스른 뒤 다시 돌아가 조직 활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박두복이 다시 구속된 것은 1933년 7월에 발생한 부산학생독서회 사건이다. 일본경찰은 이 를 시작으로 1933년 12월, 경남적색교원노동조합(慶南赤色敎員勞組) 사건으로 확대해 모두 80여 명을 검거했다. 책임비서 김두영(金斗榮)을 비롯해 전 현직 교사노동자 14명과 일반 사회주의자 15명을 검찰에 넘겼다. 그리고 그중 22명이 예심에서 형을 받았고 1명은 기소유예, 나머지 8명은 불기소됐다.


조직사건의 이름은 ‘교원노조’지만 정확하게는 학교를 넘어 공장을 아우른 ‘적색노조’였기에 교사가 아닌 박두복도 가입한 것이다. 이는 남부지역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재건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박두복의 주된 역할이 부산지역의 공장노동자 조직과 사회주의 학습 지도, 계급투쟁 선동이었다는 예심 결과가 확정됐다.

 

▲ 1933년 12월 11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릿기사와 함께 적색교원노조사건 주요 검거자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사진이 검열로 훼손돼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예심 판결문을 보면 박두복은 학생들과 사상공부를 하는 것과 더불어 부산지역 주요 공장의 노동자를 조직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방직회사(朝紡)와 환대(丸大)고무공장 등이 활동 대상이었다. 그리고 선전물을 만들어 부산과 창원에 배포했다는 죄목이 더해졌다. 이 사건으로 박두복은 징역 2년, 김경출은 징역 2년 6개월을 최종 선고(1934년 7월 5일)받았고 둘 다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36년 3월 18일에 가출옥했는데 첫 검속됐던 날부터 따져 보면 전체 옥살이 기간은 2년 6개월에 달한다.


배문석 시민기자, 울산노동역사관1987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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