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청을 통해 동학농민군의 폐정 개혁을 시행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1-30 16: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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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교정청(校正廳)의 설치와 개혁의 시도

동학혁명은 정부 조직을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1894년 5월 8일 동학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고 전주성을 점령했던 동학농민군이 철수하자 정부에서는 시급(時急)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됐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전라도에서는 전라관찰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협의로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현장에서 동학농민군의 주도로 폐정을 개혁해 나가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동학농민군의 요구 사항을 국정에 반영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홍계훈은 전주화약을 통해 동학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을 고종에 상주(上奏)해 시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 12일부터 정부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날 고종은 개혁과 관련한 대경장(大更張) 윤음(綸音)을 발표했다. 그중 개혁과 관련한 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관리들은 쓸데없는 일로 여기고 전혀 정신을 차리지 않으니, 이는 바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법령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인도하고 바로잡는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심하며 깊이 반성하고 크게 경장(更張, 개혁)하려 하니, 감사나 수령 가운데 혹시 또 백성의 생활을 침해하고 포학하게 구는 자가 있으면 나는 법으로 처단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어서 긴급히 해야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다. …… 해당 각읍(各邑)에서 특별히 구제하게 하되, 집이 없는 사람은 살 곳을 마련하여 살아가게 해 주고 본토박이는 안착하게 해 주며, 이졸(吏卒)과 평민(平民)으로서 죽은 자는 묻어 주게 하고 생전(生前)의 신역(身役), 환곡(還穀), 군포(軍布)는 면제하며, 고아나 과부 등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모두 더 잘 돌보아 주고, 묵은 논밭에 대해서는 조세를 적당하게 감면할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에서도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 개혁을 수용하기로 했다. 고종의 대경장 발표와 함께 정부에서는 내부 기강의 숙정(肅正)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고 동학농민군의 요구 사항을 반영하기 위한 정부기관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정청(校正廳)이었다. 동학혁명 시기 설치된 교정청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식 정부조직이었다. 정부는 동학농민군이 주장하는 폐정 개혁안을 받아들여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판단해 교정청을 설치했다. 그만큼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피지배층의 요구 사항을 대부분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교정청의 설치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 <승정원일기>의 교정청(校正廳) 설치 부분(고종31년, 1894년 6월 11일). 맨 마지막 줄에 “묘당으로 하여금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여 날마다 모여 상의하고”라는 내용이 보인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부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와중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일본은 공사(公使)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를 통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했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5월 23일 고종을 알현해 세계의 대세를 논하고 내정을 개혁할 의견을 담은 ‘내정개혁방안강령(內政改革方案綱領)’ 5개 조항을 올렸다. 오토리가 요구한 내정 개혁 방안에는 ‘중앙 및 지방 제도의 개정과 인재의 채용, 재정 확충 방안 개발, 법률의 정비와 재판법의 개정, 국내의 민란의 진정과 안녕(安寧)을 유지할 병비(兵備)의 설치, 교육제도의 확립’ 등 국정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정부를 의정부로 복구하고, 육조판서의 권한을 확립하며, 세도 집정의 폐를 바로 잡을 것. 궁중과 부중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궁정이 정부를 간섭하는 일을 폐할 것. 외교의 책임을 명확히 하여 전임대신을 임명할 것” 등 27개 항의 세부 조항을 3~10일 내에 실행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이는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군이 해산하면서 청군과 일본군의 철군을 요구하자 일본군을 국내에 상주시키고자 하는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요구에 우리 정부는 신정희(申正熙) 등을 위원으로 임명해 오토리 게이스케 등과 남산의 노인정(老人亭)에서 회담하는 한편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김병시(金炳始) 등 대신들은 “일본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내정 간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망국(亡國)을 강요하는 협박이므로 개혁요구안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이미 국체(國體)를 잃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잃었던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원로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묘당(廟堂, 의정부)에 6월 11일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라고 전교했다.

 

▲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3~1911). 1889년 주청국(駐淸國) 특명전권공사를 지내다 1893년 7월 조선공사도 겸임하게 돼 조선에 부임했다. 동학혁명 당시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갔으며,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출처: 위키백과)

교정청은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 6명을 총재관으로, 당상관 15명과 낭청 2명을 위원으로 차출했고, 의정부 예하에 두어 모든 공문에는 의정부의 인신(印信)을 사용하도록 했다. 총재관에는 신응조(申應朝), 심순택(沈舜澤), 김홍집(金弘集), 김병시(金炳始), 조병세(趙秉世), 정범조(鄭範朝)가 차출됐고, 위원 중 당상관급으로는 김영수(金永壽), 윤용구(尹用求), 박정양(朴定陽), 민영규(閔泳奎), 신정희(申正熙), 이유승(李裕承), 김만식(金晩植), 조종필(趙鍾弼), 심상훈(沈相薰), 김종한(金宗漢), 조인승(曺寅承), 김사철(金思轍), 박용대(朴容大), 이용직(李容稙), 어윤중(魚允中)이, 낭청(郎廳)으로는 김각현(金珏鉉), 정인표(鄭寅杓)가 차출됐다. 이들 중 신정희와 심상훈은 1880년 초반 동학의 탄압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어윤중은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보은 교조신원운동 때 동학 대표와 면담한 인물이었다.


교정청의 ‘정치혁신조항 12개 조’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교정청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왕명을 받들어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당상관 15명을 두고 먼저 폐정 몇 가지를 개혁하니, 모두 동학당이 주장한 것이다. 우리 힘으로 개혁하여 일본인이 끼어듦을 막고자 하였다. 6월 16일 혁폐 조건을 전국에 보내 시행토록 하였다.

김윤식은 교정청이 동학당이 주장한 폐정의 개혁 방안을 만들기 위한 기관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고관들이 교정청에서 열심히 개혁에 박차를 가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내정간섭을 벗어나고자 하는 측면도 있었다. 교정청에 모인 관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회의를 열어 동학농민군들의 요구를 국정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6월 16일에 정치혁신 조항을 만들어 각 도에 통고해 시행하게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교정청의 정치혁신조항(政治革新條項) 12개조’다.

1. 이포(吏逋, 착취한 세금)가 많은 자는 일절 너그러이 용서하지 말고 법대로 처리하라.
1. 공사채(公私債)를 물론하고 족징(族徵, 친족에게 군역을 대신 책임 지움)을 절대로 금하라.
1. 지방관은 부임지에 토지를 매입하거나 묘를 쓸 수 없다. 만일 이를 어기면 토지는 몰수하고 묘는 파내어 옮겨라.
1. 채무에 관한 소송은 30년이 지난 것은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
1. 각 읍 이속(吏屬)은 신중하게 뽑아 안(案)에 올리고 이를 임명하는 데 만일 뇌물을 써서 법을 위반하는 자는 공금 횡령으로 다스려라.
1. 세력에 기대어 남이 먼저 써놓은 묘를 빼앗는 것을 일체 엄금하고 묘는 일일이 적발하여 세금을 거두어라.
1. 각 읍관(邑官)에 쓰이는 물건은 시중 가격을 따르고, 진상 물품 역시 시중 가격의 낮음에 따를 것이다. 소위 관지정(官指定, 관아에서 알아서 정한 것)은 혁파한다.
1. 부보상(負褓商) 이외에 이름을 칭탁(稱託)해 무리 짓는 것을 각별히 금할 것이다.
1. 경각사(京各司, 중앙의 각 관청)에서 따로 복정(卜定, 하급 관청에 공물을 배정하는 것)하는 것은 반드시 정부에 보고하고, 만일 사사로이 백성에게서 거두는 이는 반드시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1. 원결(原結, 토지세) 외 추가로 더하거나, 호포(戶布) 외 더 걷는 것은 금지한다. 만일 드러나면 곧바로 다스린다.
1. 경우리(京郵吏) 역가미(役價米)는 구례(舊例)로 시행하고, 20년 이래 가마련(加磨鍊)은 아울러 거론치 말라.
1. 민고(民庫)는 혁파하라.


교정청의 정치혁신조항 12개 조는 전적으로 동학농민군들이 주장하던 폐정개혁안을 반영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이 주장하던 탐관오리의 엄징과 농민의 보호, 농민의 공사채 면제와 고리대의 시정, 지방관의 부정 엄징, 묘지 약탈 금지, 보부상의 횡포 엄단, 삼정의 문란 시정, 토지 평균 분작 등을 담고 있는데 이는 동학농민군이 주장하던 폐정개혁안에 모두 포함돼 있는 내용들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과 내정 간섭

일본은 우리 정부가 자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자 군사적 대응으로 맞섰다. 정부에서는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해 비록 미진하지만 내정 혁신이 10년 전부터 전개되고 있고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단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일본이 기한부로 개혁을 시행하려는 것은 내정 간섭이라는 의견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 그러자 일본은 교정청의 설치와 정치혁신 조항을 청국 숭배자의 회의 결과에서 나온 권모술수라고 비난했다.

 

▲ 남산골 한옥마을의 노인정(老人亭). 일본 공사 오토리가 고종에게 내정개혁방안 5개조를 제출하자 고종이 내무독판(內務督辦) 신정희(申正熙), 내무협판(內務協辦) 김종한(金宗漢)과 조인승(曺寅承)에게 명해 이곳에서 일본 공사 오토리와 만났다.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자 일본공사 오토리는 6월 21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인천에 들어왔던 일본군을 동원해 경복궁을 전격 습격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그동안 민씨(閔氏) 일파에게 소박당하고 있던 대원군을 불러들여 섭정(攝政)의 이름 아래 내정 개혁을 단행하라고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김홍집의 친일개화당 내각을 수립하고 교정청을 폐지하고 6월 25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했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바탕으로 자주적 개혁을 추구하던 교정청이 문을 닫고 일본의 의견이 반영된 갑오개혁이 실시됐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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