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분단 그리고 미군정 시기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2-21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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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올해는 10년 단위로 끊어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억해왔던 주요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기,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70년. 그 중 한국전쟁은 그 뒤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과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 해방을 맞이한 1945년부터 만 5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초기 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다가올 미래를 포함해 시간적 위치를 찍는 좌표가 찍혀 있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 새롭게 출발하려면 직시해야 할 순간이다. 더구나 울산은 한국전쟁 발발 뒤 3개월 안에 최소 87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는 국가기구에서 공식 조사해 발표한 결과지만 ‘언제, 왜, 어떻게’ 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게다가 학살이 빚어낸 상흔이 여 전히 남아있으며 시민사회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1945년 해방 후 울산부터 1950년 한국전쟁 기간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의 해법을 찾아가고자 한다. <편집자 주>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민중의 지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국내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이는 앞서 살펴 본 ‘사상보국연맹’과 ‘방공연맹’ 결성 이유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민족주의 계열 중 친일로 돌아선 변절자들을 ‘천황 만세’와 ‘전쟁 참가’를 독려해 경쟁을 시킨 이상으로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전향 작업에 공을 들였다. 


1940년대 초반 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검거와 수배 그리고 체포를 견디면서도 변절하지 않고 비밀결사와 옥중투쟁을 벌인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해방 후 민중들에게 커다란 신뢰와 지지로 이어지게 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국내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박헌영(1900~1956), 이관술(1902~1950), 이주하(1905~1950), 김삼룡(1908~1950) 등이다. 그들은 일제 경찰이 만든 감시망을 피해 전국을 떠돌며 활동했고, 감옥에 갇혀서도 변절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이했다. 재일조선인 독립운동가 중 김천해(1898~?)도 모두 17년간 투옥생활을 했고 해방 이후까지 감옥에 있다 출소했지만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로 일왕 암살 시도 죄명에 장기 수감됐던 박열(1902~1974)이 1935년 옥중 전향한 것과 대비됐다. 


해방 후 2개월 뒤인 1945년 10월 중도성향 단체 선구회가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인’ 여론조사 결과를 했다. 결과를 잡지 <선구> 창간호에 발표했는데 앞부터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순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하고 1, 4, 5위가 모두 사회주의 계열인데, 다른 항목에 정부 내각 적임자를 뽑을 때도 우세했다. 해방직후 민중의 지지가 조선공산당과 인민위원회에 집중된 첫 번째 이유도 가장 치열하게 일제에 저항한 세력에 높은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신탁통치 오보’로 시작된 좌익에 대한 공격

조선공산당으로 민중의 지지가 쏠렸을 때 가장 경계한 쪽은 북위 38도로 선을 긋고 남쪽으로 진군한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북쪽에 들어온 소련군에 대한 경계심만큼 자신들이 점령한 남쪽 민심을 장악해가는 조선공산당이 눈에 가시였다. 그 결과 남한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과 몰락을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첫 번째로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 일제강점기 친일파와 부역자들을 대부분 복권시켰다. 미국 정부가 대놓고 밀어준 정치인 이승만도 귀국 뒤 빈약한 권력기반과 정치자금을 마련키 위해 친일파를 적극 받아들였다. 


두 번째로 민중의 지지를 걷어내기 위한 조작 사건을 주도하거나 배후에서 조종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신탁통치(信託統治) 기간을 논의한 1945년 12월 16~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 회담(모스크바 3상회담) 결과에 대한 오보다. 회담 과정 동안 신탁통치 기간을 늘리자는 쪽은 미국이었으며, 소련은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신탁(후견)하자고 주장했다.


모스크바 3상 회담 결과를 국내에 첫 인용 보도한 <동아일보>는 사실을 완전히 뒤바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각 독립 주장’이란 제목을 달았다. 요새 말로 ‘가짜 뉴스’와 다름없는 것으로, 단순히 오보로 보기 힘든 기사를 냈다.


실제로 회담 최종 합의문은 소련 쪽이 주장한 것을 원안으로 작성됐다. 먼저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임시정부와 타협해 최장 5년 동안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다고 결정했다. 좌익과 중도계열 신문이 뒤따라 제대로 된 회담 결과를 전했지만, 한번 뿌려졌던 오보는 정정되지 않았다. 결국 오보에 휘둘렸던 초기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조선공산당이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거대한 찬반논쟁이 시작됐다. 이런 혼란은 오랜 시간 이어졌는데 해방 후 처음으로 전체 민중이 둘로 쪼개져 대립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신탁통치 오보’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폐 사건’

다음으로 미군정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1946년 5월 15일 전격 발표한 ‘조선공산당 위조지폐 제작유포 사건’이다. 미군정은 적산(敵産) 건물인 근택빌딩에 있던 인쇄소 ‘정판사’에서 일제시절 조선은행 지폐도판을 유출한 범인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근택빌딩에 조선공산당이 입주하기 전 벌어졌고, 일제강점기부터 인쇄소에서 일했던 직원 중 일부가 빼돌린 것을 조선공산당에 뒤집어 씌웠다.


재판 과정에서도 유효한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다. 오히려 주범으로 몰린 이관술과 박낙종은 위폐를 인쇄했다는 시기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물 중에는 기소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것이 없었고 정판사에서 압수한 인쇄판으로 만든 위조지폐 역시 제출되지 않았다. 

 

▲ 정판사 위폐 사건 현장검증. 1946년 9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법원이 내린 판결은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거한 정황증거만 갖고 이뤄졌다. 그리고 정황증거들은 여러 피고인들이 경찰과 검찰에서 고문해 허위 진술했다며 법정에서 번복했다. 그러나 바뀐 진술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쇄소 공장장 안순규의 경우 위증죄로 추가기소를 당했다. 


정판사 위폐 사건이 조작됐다는 주장은 최근 학술 연구로도 드러나고 있다. 임성욱 박사가 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에 따르면 미군정 또한 조선공산당의 범행을 확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위폐 사건이라고 증거로 확보한 도판과 찍힌 위조지폐가 일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은 유출 시점 등에 대한 증거를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재판이 진행 중인 1946년 9월 19일 담당검사 2인 중 김홍섭이 사표를 제출한 것도 무리한 진행에 대해 반발해 윗선을 압박을 받았다고 해석됐다. 그러나 결국 조선공산당 재정국장이었던 이관술을 비롯해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3명은 징역 15년이란 중형을 선고했다.
 

▲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을 밝힌 임성욱 박사 연구서(왼쪽), 안재성 <이관술 평전>(오른쪽)


조선공산당, 불법단체로 추락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미군정 경무국 수사결과 발표 직후 성명을 발표해 조선공산당의 결백을 주장했다. 박헌영과 이주하는 각각 미군정청과 제1관구 경찰청을 방문해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묵살했을 뿐 아니라 경찰에 함구령을 내려 사건에 대해 일절 말하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 본부와 해방일보사, 조선정판사가 함께 입주해 있는 소공동 근택빌딩을 급습해 압수수색하고, 해방일보사와 조선정판사를 폐쇄했다. <해방일보>를 폐간시켰으며, 적산관리 규칙 위배를 구실로 근택빌딩을 몰수하는 초강경 조치를 단행했다.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한 것이다. 조선공산당 본부는 남대문 일화빌딩으로 옮겨가야 했고 해방 후 가졌던 막강한 정치영향력도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조작된 위폐 사건이 우익 언론에서 대서특필됐고, 미군정의 수배 검거가 쉼 없이 진행됐다. 그렇게 불법단체가 된 조선공산당은 선택의 여지 없이 지하정당으로 전환하게 됐다. 박헌영을 비롯해 검거를 피한 핵심 지도부는 월북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남로당과 북로당으로 둘로 나뉘게 된다. 남로당 역시 미군정 아래서 불법정당이 된 뒤로 북조선로동당은 조선로동당으로 탈바꿈한다. 해방직후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사회주의 세력은 남쪽 미군정 아래서는 불법이란 낙인이 찍힌 반면, 북로당과 조선로동당이 들어선 평양은 사회주의 계열의 적자(嫡子)가 된 것이다.

민중항쟁과 미군정 친일파, 부역자 복권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을 미군정이 불법으로 낙인찍고 공격을 시작하면서 민중 탄압과 내부 이념대립으로 인한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미군정이 1946년 상반기부터 검거와 수배로 탄압을 노골화하자 사회주의 세력은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다시 지하로 들어갔다. 


미군정은 1946년 9월 6일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 등 좌익 계열 신문들도 모두 정간시켰고 언론사 간부 10명을 검거했다. 그러자 미군정 토지개혁과 식량배급 실패 등으로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를 시작으로 총파업이 시작됐다. 부산지역 7000여 철도 노동자들이 참여했는데 이후 전국으로 확산돼 4만여 철도 노동자가 참가했고 금속, 화학 등 전 산업 분야 노동자 15만 명이 동참했다. 주된 요구는 ‘쌀 배급’ ‘임금인상’ ‘해고 반대’ ‘노동운동 자유’ ‘민주인사 석방’이었다. 


9월 27일에는 서울 중학교, 전문학교 학생 1만5000명이 가세해 ‘학원의 자유’ ‘식민지 교육 철폐’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고, 이후 국방경비대와 해상경비대 일부도 동참할 만큼 파장이 커졌다. 그리고 10월 1일 대구에서부터 우발적으로 시작된 10월 민중항쟁으로 이어진다. 

 

▲ ‘10월항쟁유족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굴한 1946년 10월 대구 경찰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에 친일·부역했던 경찰관을 다시 불러 모아 대치전선을 그렸다. 일제 경찰 중 80~90%를 미군정에서도 경찰병력으로 활용했다. 수도경찰청 관내 일제 경찰 출신자들의 재등장 비율을 각 계급별로 보면 총경, 감찰관, 경감급 100%, 경위급 75%, 경사급 약 60%, 순경급 약 2%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월 4일 미군정 경무국장으로 발령받은 조병옥은 기자들을 만나 “고의로 자기의 영달을 위해 민족운동을 방해했거나 민족운동자를 살해한 자 이외에는, 일반 경찰에 전직 경험이 있는 경찰관 출신자를 프로 잡(Pro Job)으로 인정하고 국립 경찰관으로 등용했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는 독립운동을 박해했던 전직 친일 경관들을 그대로 요직을 임명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도 일제강점기에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를 처벌 대신 오히려 일계급 승진시켜주는 방식으로 친일전력 경찰들을 적극 포용했다. 


경찰조직 외곽에는 여러 우익단체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북에서 월남했거나 해외 귀환자 중 북쪽 고향 대신 남을 선택한 이들이 1946년 3월 5일에 결성한 서북청년단이 있다. 김두한 등이 이끄는 정치폭력배들을 비롯해 여러 우익단체들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날개를 폈다. 우익청년단은 경찰과의 공조 속에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때 형성된 경찰과의 공식적인 협조관계를 바탕으로 1947년부터 남한 전 지역으로 우익행동부대가 돼 활동영역을 넓히게 된다. 


이런 변화들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로 전환해 지방 행정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과 강한 마찰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10월 항쟁 기간 조선민청, 전평, 민전, 전농 등의 사회주의 계열 외곽 단체를 모두 범죄 집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친일경력을 가진 경찰들과 우익단체들은 미군정이 내린 ‘간부 전원 체포령’을 등에 업고 전과를 올려갔다. 

 

▲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서북청년단.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자료

 



경찰병력은 1946년 7월 중반 2만5000명에서 2년 뒤 1948년 8월이면 3만4000명으로 늘어난다. 미군정은 경찰에게 사회주의 계열이란 혐의만 있어도 구금할 수 있도록 ‘백지위임장’ 같은 절대권한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 1948년 말에 좌익 수감자가 2만2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일제강점기 사상범 수감 숫자 1만여 명(1928~1935년 기준)의 2배가 넘은 수였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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