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嶺湖) 동학농민군의 최후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5-31 15:3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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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진교에서 영호 동학농민군 일본군・관군과 첫 교전

일본군은 10월 5일에 고성에 도착해 토포사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한 후 진주의 구해창(舊海倉)을 거쳐 10월 7일에 곤양군으로 들어왔다. 곤양읍에는 성곽이 있어 병력이 주둔하기에 좋았고 하동・진주・사천・덕산 등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최적의 주둔지였다. 곤양에 도착한 일본군은 해창에서 체포한 동학 접주 임석준(林石俊) 등 동학농민군을 8일 정오에 성내 북쪽 장터에서 군중을 모아 효수하고 동학농민군 17명도 학살했다. 일본군은 군중을 모아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동학농민군과 백성을 분리시키려 했다.

 
경상도 서부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과의 첫 번째 전투는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安心里) 뒷산인 금오산(金鰲山) 줄기의 시루봉에서 시작했다. 하동접주 여장협(余章協)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하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진다리(辰橋)에서 서쪽 4km 떨어져 있는 안심리와 고하리(古下里) 일대에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진교・양보・고전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시루봉에는 2백여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10월 9일 동학농민군이 이곳에 집결해 있음을 탐문한 일본군은 곤양에서 10일 새벽에 출동했다.


동학농민군은 시루봉 정상에서 나팔과 징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며 일본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과 관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시루봉을 포위하고 신안리와 성평리, 그리고 시루봉 동쪽의 세 방향으로 공격해 올라갔다. 동학농민군은 화승총과 활, 돌멩이 등으로 대적했지만 반나절 만에 무너져 고전면으로 도주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안심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5명 사살, 28명 생포, 총 3자루 등의 노획물을 획득했다고 했다. <경상도관찰사장계>에는 관군이 동학농민군 8명을 포살시키고, 21명을 생포했다고 기록하면서 일본군도 동학농민군 9명을 생포했다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안심리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날인 10월 10일 진주 남강변 상평(上坪)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정확한 전투의 규모와 결과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지난 7일 상평촌 공격 때 관군 10명을 인솔했는데 아병에게 오히려 방해가 됐다”는 짤막한 기록이 보인다. 일본군이 남강을 건너올 때 진주의 상평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인 듯하다.

고성산(古城山)에서 치열한 저항

진주지역 동학농민군은 손은석 대접주를 중심으로 여러 접주들이 일본군의 출동에 대비해 시천・백곡・송촌(松村)・집현산(集賢山)・정정(頂亭)・원본정(院本亭)・수곡(水谷)・상평(上坪) 등지에 집결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주력부대는 북서쪽에, 나머지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배치해 일본군과 관군에 대비하고 있었다. 서부 경남의 세 번째 전투는 10월 14일 하동 옥종면 고성산 일대에서 벌어졌다. 고성산 전투는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결전이었다.

 

▲ 하동 고성산 정상의 청수대(淸水臺). 경상도 서부의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하동 고성산성에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모여 청수를 모시던 청수대와 돌의자가 아직도 남아있다.


앞서 동학농민군이 진주 북쪽을 장악했다는 첩보에 일본군은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허탕 치는 일이 있었다. 즉, 10월 13일 스즈키(鈴木) 대위와 엔다(遠田) 대위는 동학농민군이 모여 있다는 송촌(松村)과 집현산(集賢山) 쪽으로 각각 출동했다. 그러나 이미 동학농민군은 단성 지방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성과 없이 진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은 10월 13일에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손은석 휘하의 병력을 은밀히 백곡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백곡지>에는 “웅구(손은석) 등은 또한 크게 두려워 난을 일으키고자 10월에 18포의 무리 10여 만을 백곡평에 모아 발동하니 돈과 식량을 탐내어 생민을 학대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했다. 손은석 대접주는 일이 있을 때마다 백곡 지역에 동학도를 집합시켜 왔다. 4∼5천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은 백곡평인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玉宗面) 북방리(北芳里)의 들판과 고승당산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안 일본군은 10월 14일 새벽 4시에 진주에서 수곡으로 출동했다.


아침 7시경에 덕천강(德川江) 동쪽에 당도한 일본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동학농민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8시가 되자 일본군이 강을 건너오자 전방에 출동했던 동학농민군이 선제공격의 포문을 열어 전투는 시작됐다. 대포 2문으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소리만 요란했을 뿐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신식무기로 맹렬히 반격해 오자 전방에 있던 동학농민군은 후퇴해 주력부대가 있는 고성산으로 합류했다. 고성산은 해발 185m의 야산이지만 정상에는 자연 암석이 성곽처럼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은 고성산에서 2시간 가까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산상 첩벽(疊壁)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방어했다”는 일본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학농민군은 정상 부근의 자연 암석에 돌성을 쌓아 은폐물을 만들어 놓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저지했다. 동학농민군은 이 고지를 내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패배해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일본군은 고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186명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오하기문>에는 “4백여 급을 참했다”고 했고, <백곡지>에는 “죽은 자가 5∼6백인이라”라고 했다. 일본군은 전투 직후에 파악한 숫자였고 또 의도적으로 사살자의 수를 줄여 기록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기록보다 훨씬 많은 동학농민군이 전사했다. 주민들은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이 전사했다고 증언했다.

광양 섬거역에서 영호동학군 패전

고성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일부는 지리산 덕산 방면으로 후퇴했고, 나머지는 섬진강 쪽으로 후퇴했다.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은 섬진강 쪽으로 후퇴한 동학농민군을 뒤쫓아 하동의 황토치(黃土峙)까지 왔다가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진주로 돌아갔다. 일본군 140명은 18일에 하동부로 들어왔다. 이튿날인 19일 일본군은 곤양으로 철수하다가 섬진강 건너 광양 귀등산(龜嶝山)에 동학농민군이 모여 있다는 것을 알고, 팔조면(현 고전면) 목도리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이곳의 동학농민군 7, 8명을 사살하고 하동부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20일 광양으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이날 광양에서 30명의 동학농민군을 살상했고, 22일에도 다시 광양으로 건너와 섬거역에서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벌여 7, 8명을 사살했다. 광양의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은 일본군이 하동부를 비우자 병력을 이끌고 하동을 공격했으나 우병영 포군 100명이 하동에 당도하자 해산했다. 이들은 하동의 두치(豆峙) 쪽으로 향하다가 지석영의 관군과 만났다. 동학농민군은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나 오히려 11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생포되는 등 피해를 입고 광양으로 후퇴했다. 23일에도 흩어진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마을을 탐색했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이 순천 방향으로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24일에 곤양으로 철수했다.

 

▲ 광양면 진상면 섬거리 전경. 사진의 앞 오른쪽에 보이는 진상초등학교 건물 뒤에 섬거역이 있었다. 12월 6~7일 이곳에 숨어있던 동학농민군 130명이 일본군과 관군과 저항하다 체포돼 포살됐다. 김인배도 이곳에서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김인배의 영호동학농민군 좌수영 공격 감행

하동에서 밀린 김인배의 영호동학농민군은 여수의 좌수영 공격에 집중했다. 9월 하순에 좌수영 공격을 감행하다 실패했던 김인배는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기 위해 좌수영 장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 차례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받았던 좌수영에서는 10월 중순 들어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다. 영호대도소는 11월 10일 좌수영 공격을 위해 영호의 동학농민군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16일에 덕양역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17일 좌수영의 뒷산 종고산(鍾鼓山) 일대에 집결했다. 밤을 기해 좌수영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한파가 몰려와 밥이 얼어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공격을 포기했다.

 
20일 다시 종고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좌수영 영문을 수차 공격했다. 3백 명의 수영병으로 방어가 어려워지자 수사 김철규는 통영항에 정박 중인 일본 츠쿠바호(筑波號)의 함장인 쿠로초카 타테와키(黑岡帶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쿠로초카는 최정예인 일본 육전대 1백여 명을 상륙시켜 좌수영 공략을 위해 덕양역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일본군과 수영군의 협공으로 동학농민군은 종고산 정상으로 올라가 저항했다. 그러나 신식무기와 일본군 최정예인 육전대의 공격에 밀린 동학농민군은 순천 방향으로 후퇴했다. 동학농민군은 밤에 다시 좌수영을 공격했으나 일본군과 수영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11월 27일 밤 동학농민군은 다시 좌수영 공격을 감행해 일본군과 관군을 좌수영 안까지 내몰았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이튿날인 28일 다시 공격을 하지 않고 순천으로 물러났다. 확률이 높은 좌수영 공격을 포기한 이유는 식량과 추위 때문이었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도 순천으로 물러난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가라앉았고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 소문에 기강도 해이해졌다.

영호대도소의 몰락과 김인배의 최후

영호대도소의 동학농민군 조직이 무너지자 지금까지 동학농민군에 협조하던 구실아치들도 동요해 동학농민군에 등을 돌렸다. 이들은 여수민과 합세해 민보군을 만들어 12월 6일 오후 4시경 영호대도소를 기습했다. 민보군의 기습으로 김인배는 도망쳤으나 영호도집강 정우형(鄭虞炯)을 포함해 150명의 동학농민군이 체포돼 포살당했다. 순천부의 영호대도소에서 간신히 피신한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劉夏德)은 광양으로 숨었다. 그러나 광양현감과 이속들의 밀고로 김인배와 유하덕을 포함한 동학농민군 90여 명도 체포돼 포살됐다. 김인배와 유하덕은 광양관아 앞에서 참살돼 광양객사 앞에 효수됐다. 김인배는 처형될 때 “장부가 나서 죽을 자리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라는 유언을 처남에게 남기고 남은 가족을 부탁했다.

 

▲ 광양 객사 자리. 영호대접주 김인배와 유하덕은 참수돼 이곳 광양객사 앞에서 효수됐다.

 

▲ 광양 동학농민군 체포 책자. 12월 7일에 영호대접주 김인배 등이 효수, 포살됐고, 다음날인 8일 수접주 유하덕이 효수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민보군에 의한 동학농민군 색출 및 학살이 이루어졌다. 12월 10일 좌수영 영병과 일본군 1개 중대는 하동에서 만나 섬진강 건너 다압면 월포부터 동학농민군 색출에 나섰다. 이날 오후 이들은 섬거역으로 들어가 숨어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해가 바뀐 1895년 1월 3일에는 좌수영병 5백여 명이 순천부 사항리 산 위에 숨어있는 동학농민군 41명을 학살했다. 1월 8일 일본군과 좌수영병은 보성으로 진출해 19일까지 보성 동학의 수장 양성좌・허성보・허범용, 장흥 접주 김보열 등을 잡아 효수하는 등 닥치는 대로 동학농민군을 잡아 죽여 수백 명이 학살당했다. 특히 12월 10일 섬거역에서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영호대도소 도접주 김이갑을 포함한 130명이 붙잡혀 포살됐다. 하동의 민보군도 광양까지 진출해 동학농민군 소탕에 나서 1백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동학농민군은 흥양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구례의 백운산 등지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 이렇게 영호동학농민군의 동학혁명도 막을 내렸다.

 

▲ 광양 유당공원, 광양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이 참형을 당했다. 관군들은 동학농민군을 이곳의 나무에 묶어 갖가지 방법으로 동학농민군을 참살했다. 하지만 유당공원 어디에도 동학혁명에 관한 안내는 없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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