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고 또 편안한 땅의 역, 안강역

황주경 시인 / 기사승인 : 2020-02-19 14: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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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산수 좋은 곳에 자리한 서원과 산사는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어긋난다. 서원이 공자를 말한다면, 절은 부처를 이야기하고, 절이 신라를 말하면 서원은 조선을 연상케 한다. 서원이 귀족적 요소가 짙다면 사찰은 귀천이 없다. 전자가 인으로 현실을 논한다면, 후자는 극락으로 이상을 말하고, 서원의 동력이 냉정이라면 절의 동력은 순수다. 서로 다르면서도 너무나 이질적인 두 공간의 공통점을 억지로라도 찾으라면, 적어도 한 대륙의 통치이념이었으며, 한반도 역사로 국한해서 보면 두 곳 다 나라를 경영하다 본질을 잃어버림으로써 파멸을 맞았다는 것이다.

경주와 포항 사이 형상강가에 안강安康이 있다, 편안하고 또 편안한 땅이라는 뜻이다. 무려 신라 경덕왕 때부터 내려오는 지명이니 이름 그대로라면 안강은 철학에서 말하는 이상세계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이 고을에는 조선시대 지배이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 문화유산이 두 곳이나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양반마을인 양동이고 또 하나는 옥산서원이다. 이 모두가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 회재 이언적과 관련된 곳이다. 양동마을은 회재의 출생지이고 옥사서원은 그가 타계한지 19년 뒤인 1572년 선조 6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건립한 사액서원이다. 

 

▲ 안강역 구내 전경


▲ 역사 마당에서 바라본 안강역
▲ 안강읍과 갑산을 잇는 철교


지난해 7월, 우리나라 서원 여덟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필자는 그중에 고향과 지척인 옥산서원이 도산, 병산, 돈암서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소식에 더욱 기뻤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불현듯 해가 바뀌기 전에 옥산서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경주의 이 모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선생은 회재의 먼 후손으로 모 신문사 편집국장 출신이다. 조부가 옥산서원장을 지낸 한학자이셨기에 어릴 때부터 옥산서원을 제집 드나들 듯했던 양반이다.

우수수 낙엽이 일제히 져내리던 어느 날, 안강역 앞에서 흔쾌히 가이드를 자처한 이모 선생을 만나 옥산서원으로 향했다. 승용차가 큰길에서 벗어나 옥산서원으로 이어진 한적한 길로 들어서자 이 선생이 “예전에 이 길은 도포에 갓 쓴 우리 할아버지가 말 타고 서원에 다니시던 길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말은 주변의 풍경마저 물들인다 했던가? 이 선생이 추억 속 자신의 할아버지를 무심히 소환했을 뿐인데, 옥산서원으로 향하는 외길이 갑자기 50여 년 전의 흑백사진처럼 아득해졌다.

 

▲ 세심마을 개울을 따라 형성된 고목숲
▲ 옥산서원 전경
▲ 역락문


▲ 타지에서 방문한 유림들에게 직접 서원의 내력을 설명하는 옥산서원장 모습.

 

▲ 무변루에서 바라본 구인당.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옥산서원이 앉은 곳은 세심마을이다. 마을은 영천과 경계를 이루는 도덕산 골짜기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마을 앞을 지키는 자옥산과 병풍 역할을 하는 어래산도 편안한 거리다. 


마을에 들어서면 개울을 따라 늘어선 고목숲이 가장 먼저 과객들을 맞는다. 고풍스러운 멋을 더해주는 고목숲은 너무 나이를 많이 자셔서 이도 빠지고 머리도 없는 노인네 같지만,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 이치를 다 꿰뚫는 혜안으로 이 마을의 내력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더없이 귀한 존재다. 


서원 앞 계곡은 세심洗心, 즉 마음을 씻는다는 이름처럼 물소리도 청아하고 책을 쌓아 올린 듯 넓고 평평한 너럭바위도 운치가 있다. 회재는 이곳 5개 바위에 각각의 이름을 붙이고 새겼는데 그 중에 ‘세심대’洗心臺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역락문’亦樂門은 서원의 입구다. 이 선생이, 역락문은 논어 학이편 1장의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유명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선생이 “황 선생,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라며 우리 일행을 문장 속의 주인공인양 쳐다보며 엷게 웃어 보였다.


역락문 바로 앞에는 가로로 서원을 관통하는 수로가 인상적이다. 서원을 앉힐 때 밖으로 물길을 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최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은 흔적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경치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뜻 무변루, 더 들어가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곳 구인당이 옥산서원 현판을 달고 근엄하게 앉아 있다. 마침 그날은 현 옥산서원장이 도포를 입고 타관의 유림들을 맞아 직접 옥산서원의 내력을 설명하는 귀중한 시간과 겹쳐 일반 관람객들의 발길 또한 오래도록 붙잡았다.

독락당獨樂堂. 옥산서원에서 시간적 배열로 보면 서원 북쪽으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독락당의 건립이 서원보다 먼저다. 회재 이언적은 김종직의 문하생인 손중돈에게 가르침을 받아 1513년 생원시와 1514년 문과에 급제한다. 입신 이후 41세 때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 관직을 박탈당해서 낙향한다. 그리고 번잡한 세상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풍경 속에 자신의 사랑채 독랑당과 계정溪亭을 짓게 된다. 


정치적 경륜보다 성리학의 본을 바로 세웠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회재는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확립한 학자로 추앙받는다. 훗날 조선은 그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이라 칭하며 성균관 문묘에 위패를 안치한다.

독랑당은 건축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건물이다. 도덕산자락의 적당한 골짜기와 좌우 산수가 하나가 된 듯한 공간 배치가 멋스럽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독락당에서 가장 멋진 구조물은 계정 앞 살창을 지닌 담장이다. 마루에서 문을 열면 담장의 살을 통하여 계곡의 풍경을 즐길 수 있게 했다. 

 

▲ 독락당 솟을산문 전경
▲ 계정 대청과 살창 담장. 마루에서 살창 담장을 통해 개울을 감상할 수 있게 설계했다.
▲ 독락당 사당 전경. 유교의 본거 사당에 새겨진 절만자가 특이하다.
▲ 독락당(獨樂堂) 안 계정(溪亭) 전경

 

이 선생에 의하면, 독락당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건물은 사당에 새겨진 절 만卍자다. 조선 성리학 중 주리론의 본거라 할 수 있는 댁의 사당에 어떻게 사찰문양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를 유추해보면, 인근의 사찰과 인연이 있다. 독락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년고찰 정혜사가 있었다. 회재는 청년기에 이곳을 자주 들렀으며 중앙에서 밀려나 독락당을 짓고 살 때도 이곳 스님들과 교류했다. 이 선생은 독락당 창건 때 인근 스님들의 도움이 있었으며 그 증표가 사당에 새겨진 절문양이라고 추정했다.

사실 조선의 지배층인 유림에게 절집은 ‘을’ 중에서도 ‘을’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는 불교라는 지배이념이 그대로 이양된 통일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와는 판이했다. 유교로 지배이념이 바뀐 나라에서 불교와 스님은 적폐이자 갑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일신라나 고려 때 붙여진 명산절경의 고유명사가 불교식에서 유교식으로 대거 바뀌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사찰은 유림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또 사찰은 조선시대에 우후죽순으로 건립된 서원의 요긴한 인력·자재 수급처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정혜사 역시 유림의 을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옥산서원의 재산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스님들의 신분 또한 노예 신세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정혜사는 1834년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다. 한편, 지난해 옥산서원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을 관람해 그 존재를 다시 일깨웠다.

회재는 명종8년 1553년 강계에서 생을 마감한다. 당시 47세로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파직된 후 유배된 상태였다. 정치인으로서는 강계에서의 유배가 불행한 일이었지만, 학자로서는 귀중한 기회였다. 회재는 유배 생활 6년 동안 <대학장구보유> <속대학혹문> <중용구경연의> <구인록> <진수팔규> 같은 빛나는 저작들을 완성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했던가? 회재의 주검은 서자로 태어난 잠계 이전인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진다. 이전인은 회재의 유배 생활 7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엄동설한 속에서도 3개월 동안 그의 주검을 죽을힘으로 다해 운구했다. 옥산서원창고에는 그때 썼던 대나무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전인은 양주 석씨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감포만호 석귀동의 천첩에서 태어나 회재의 첩이 되었기 때문에 이전인은 천인 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애석히 여긴 석귀동이 그의 딸과 외손자를 양인으로 속신시켰다. 회재는 양주 석씨를 매우 사랑했다, 관직에서 내쳐져 세심마을에 독락당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전인은 아버지 사후 그의 신원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세심마을에는 아직도 이전인의 효심이 없었으면 회재도 없었다는 이야기가가 전해진다.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혜사는 신라시대 천년고찰로 도덕암 등 12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

 

▲ 도덕산 중턱 도덕암 전경. 원래는 두덕(斗德)암이었으나 회재가 도덕(道德)암으로 고쳤다.

▲ 독락당 주차장 앞 숨은 맛집 '자옥상회', 라면과 파전 맛이 일품이다.

 

독랑당을 나와 이 선생이 “안강에서 파전과 라면 맛이 가장 좋은 집”이라며 주차장 바로 앞 자옥상회로 일행을 이끌었다. 밀가루와 풀냄새가 전혀 없는 파전과 라면 맛에 감탄하며 막걸리 잔을 기우렸다. 맛도 맛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부딪는 술잔에 달라 오르는 두 볼이 붉게 타들어가는 가을만큼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 추신- 옥산서원을 찾는 분이라면, 꼭 서원에서부터 정혜사지십삼층석탑, 장산서원을 거쳐 도덕산 중턱에 자리한 도덕암道德庵까지 걸어보길 권한다. 필자는 지난 가을 방문 이후, 올 해만 해도 두 차례나 더 다녀왔다. 그리 깊은 골도 높은 산도 아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자연 그대로의 호젓함이 남아 있는 길이다.

■ 안강역安康驛-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안강리에 위치한 동해선 역이다. 과거 안강역은 이용객이 많아 새마을호 이하 모든 열차가 정차했지만 수요 감소로 새마을호가 폐지되고 동대구~포항 간 무궁화호만 정차하게 되었다. 2020년 12월 31일 즈음에, 동해선의 태화강역~모량역 구간의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폐역 되고 신역사는 갑산리로 옮겨질 예정이다.

■ 1918년 12월 28일 :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 1945년 7월 10일 : 표준궤로 개량
■ 1966년 9월 21일 : 현 역사 준공
■ 1992년 12월 5일 : 새마을호 열차 정차 개시
■ 1994년 1월 11일 : 화물 취급 중지
■ 1997년 10월 1일 : 소화물 취급 중지
■ 2013년 11월 7일 : 부산진 기점 129.9km로 변경
■ 2015년 4월 2일 : 서울역~포항역 새마을호 운행 종료
■ 2016년 4월 29일 : 부산진 기점 126.3km로 변경
■ 2018년 12월 28일 개업 100주년
■ 2020년 12월 동해선 선화 준공 이후 폐역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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