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

울산저널 / 기사승인 : 2019-11-14 09: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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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선생님. 이번에 읽을 책은 <숙향전>이네요. 와우 우리 선생님 아주 고전적인 여성인가 봐요. 이렇게 고전에 선생님 이름이 올라있는 걸 보면요.” 중학생 녀석이 키득거리며 내 이름을 가지고 은근히 놀리고 있다. 나도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슬쩍 받아 넘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난 이미 이렇게 이름을 남겼으니 내 인생의 숙제는 다 한 셈이네. 부럽지?”

 

숙향인 내가 <숙향전>으로 독서지도를 하는 것이 퍽 재미있다. 이 소설은 중국 송나라를 배경으로 하며 숙향은 월궁항아의 인간이다. 다섯 살에 부모와 이별한 뒤 이십 세에 다시 부모를 만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칠십 세에 죽음’을 예언한다. 선녀도 나타나 같은 예언을 한다. 예언대로 소설의 내용이 펼쳐진다. 내 삶은 <숙향전>과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금 닮은 구석이 있어 더 흥미롭다. 

 

싫든 좋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이름은 크게 우여곡절을 겪었다. 여덟 살 때까지 내 이름은 행숙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려 이름 쓰기를 열심히 배우던 때였다. 연습할 마땅한 종이가 없어 신문지 위에 썼다. 글자에 가려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면서 종이가 찢어질 만큼 꾹꾹 눌러 이름을 썼다. 틀리게 쓸라치면 덤으로 언니들한테 딱 소리가 나도록 알밤을 맞기 일쑤였다. ‘조행숙’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문제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 일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마냥 신나기만 한 여덟 살 그날, 내 이름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은 족히 걸었지만 다리나 발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천천히 가라는 할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달리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에서 피가 났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팍에 매달린 흰 손수건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중년의 남자 선생님은 입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한 명씩 호명돼 교실로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좀처럼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지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가고 운동장이 텅 비어가고 있었다. 끝내 내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나를 데리고 갔던 할머니는 몹시 당황했다. 저만치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네 이름이 뭐니? 여기에 조숙향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는데 혹시 네가 아니니?”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저는 조행숙이에요”라는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평소 할머니는 살다보면 가끔 천지가 개벽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내게 그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내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읽어주는 주소를 확인하고 내 이름인가 보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앞집에 살고 있던 큰고모가 진실을 밝혀주었다. 딸을 많이 낳다보니 부모님이 내 출생신고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보기에 딱해서 큰고모가 면사무소를 찾아갔단다. 행숙이라고 올리려다가 숙향이가 왠지 더 품위 있게 느껴져 숙향이라고 이름을 올렸단다.

 

그 후로 내 이름은 숙향이가 됐다. 같은 반 남자애들은 나를 보고 ‘수캥이’, ‘캥가리’라고 하면서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내 이름이 약간 화려하게 생각됐는지 내 이름을 보고 예전 기생이름 같다고 했다. 아무렴 어떠하리, 돌아가신 큰고모가 얼결에 바꾸어 놓은 ‘맑을 숙(淑)에 향기 향(香)자’ 내 이름, 많이 감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한때 맑고 향기롭게 살아갈 것을 꿈꾸기도 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이즈음 이름처럼 살아왔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조숙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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