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핀 연꽃섬 - 통영 연화도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 기사승인 : 2021-04-05 0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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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훌훌 훨훨’

이른 꽃이 피는 춘삼월의 봄이다. 내 마음속의 봄은 언제나 바다를 건너온다. 물빛이 옥빛으로 바뀌고 바람이 순해질 때 봄 마중을 가야 한다면 섬이 제격이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봄이 아니던가. 가까운 통영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섬 중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연화도를 골랐다. 온전히 봄꽃 같은 이름 때문에 마음을 홀려서. 연꽃이 떠내려가 섬이 되었다고도 하는 연화도에는 무슨 꽃이 피었을까. 

 

▲ 연화도에는 동백꽃이 한창 피어 있다.

약속한 이도 없고 짜인 스케줄도 없는 한가로운 여정에 급할 것이 없어 하루 느지막이 출발했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아쉬운 낮 길이, 해거름이 다가온다. 지나가는 길에 모르는 어촌 마을에 잠시 들렀다. 낯선 곳을 다닐 때 끌리는 마을을 자주 들르는데 청포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참 아련한 이름을 가졌구나‘하고 샛길로 빠졌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다니는 여정에는 이렇게 마음을 당기는 것이 있다. 언젠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간에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신비로운 생각에 사로 잡힌다. ‘이곳은 정주 항구인 청포항입니다’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정주 항구라니 머무르는 항구라는 뜻일까. 

 

▲ 나른한 봄빛 아래 한가로이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

지나가는 슬픔, 지나가는 골목, 지나가는 당신, 지나가는 환희, 지나가는 사랑, 지나가는 감기. 지나가는 주소, 지나가는 나무, 지나가는 비, ‘지나가는’이란 말은 너무 서늘하잖아. 세상 모두는 진정 다 지나가고야 마는 것인가. 닻을 내려 마음 묶은 정주 항구 청포항에 지나가는 노을이 앉았다. 지나가는 나도 앉았다. 지나가는 것들끼리 한참을 다정하고서 다시 길을 나선다. 언제 다시 이 마을을 기억해 나는 오게 될까. 


통영의 오일장이다. 2, 7일이 장날인데 마침 날짜가 맞았다. 내가 사는 고장도 바다라 해산물이 싸고 싱싱하지만 이렇게 수산장이 크게 열리지는 않는다. 왠지 비릿하고 격렬하고 거칠게만 느껴지는 통영의 시장에는 늦은 저녁도 해결하고 향이 좋은 멍게 몇 마리 사볼까 해서 들렸다. 생각 같아서는 다찌집에 들러 밤을 새우고 싶지만 혼자이니.

 

▲ 통영 중앙시장의 오일장은 2, 7일이며, 각종 수산물과 나물 등 풍성하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할머니 여행 가고 싶으세요? 장사하시느라 많이 못 다니셨죠?”


“가고 싶지, 딸이 있으면 갈 텐데 혼자는 이제 못 가. 아이고 혼자 다니는 거야? 무섭지 않나.”


“안 무서워요, 할머니. 요새는 혼자 다니는 여자들이 더 많아요. 하하.”


“그렇지, 부지런히 다녀 얼마나 좋아.”


두세 평 정도 되는 식당 안에는 손님은 없고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집중해서 보고 계신다. 세계 각국을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엄마도 빼놓지 않고 보는 걸어서 세계 이곳저곳 둘러보는 이야기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먼 나라 풍경을 눈을 떼지 못하고 보는 모습을 보면 하고 싶은 것 제대로 하지 못한 부모님 세대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할머니 김밥 일 인분만 주세요. 통영 서호시장 앞쪽으로 층무김밥 집이 줄지어 있다. 어느 집을 갈까 안을 들여다보다 나이 많이 드신 할머니 집으로 들어온 건 잘한 일이다. 관광지 음식점이 다 그렇듯 생색만 낸 음식들이 많아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양도 듬뿍 맛도 좋다. 내일 섬으로 들어갈 배를 타러 오면서 김밥을 사러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내가 어디에서 유숙을 하는지 아무도 몰라서 누구도 기다리지 않은 밤을 보냈다. 덜 닫힌 창틈으로 밤새 꽃향기가 불어와 배를 타고 더 먼 섬으로 가는 아침이 설렘이다. 하루 만에 다시 나와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서 섬에 드는 배편을 살 때 풍랑 때문에 오늘 못 나올 수도 있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못 들은 척 미소를 슬쩍 감추고. 바람과 파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섬에 갇혀 삼일 낮 사일 밤 내내 꽃밭을 가꾸어야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은 오고 더는 가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은 가고야 마는 우리 사는 뭍에서 피지 않던 꽃 한 송이 손에 쥐고서.


11시에 출발하는 배 시간에 맞춰 어제 다시 들르겠다는 할머니 김밥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나와 있었고 배고프지 않게 양을 듬뿍 주신다. “할머니 오늘 장사하지 마시고 저랑 섬에 가실래요?” “아고, 그카면 되나. 나는 장사하고 있을 테니 다녀와 어이, 조심하고.” 배가 갈매기를 데리고 섬으로 향한다. 


통영시의 43개 유인도 중 제일 먼저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연화도는 이름 그대로 바다에 핀 연꽃이란 뜻인데, 실제로 북쪽 바다에서 바라보는 섬의 모습은 꽃잎이 하나하나 겹겹이 봉오리 진 연꽃을 떠올리게 한다. 섬의 관문인 북쪽 포구에는 연화마을, 동쪽 포구에는 동머리(동두)마을이 이어져 있어 섬 전체를 둘러보자면 세 시간가량이 걸린다. 

 

▲ 통영 8경의 하나인 용머리 해안

연화도는 불교 성지 순례지로서 명성을 높인 데 일조하는 사찰이 두 군데 있다. 바로 연화사와 보덕암이다. 연화사의 역사는 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연산군의 억불정책으로 한양에서 이 섬으로 피신해온 승려가 불상 대신 둥근 전래석을 토굴에 모시고 예불을 올리며 수행하다가 깨우침을 얻어 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인은 입적하면서 ‘바다에 수장시켜 달라’는 말을 남겼는데 유언대로 제자들과 주민들이 수장했더니 도인의 몸이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 승화했다고 한다. 입적한 승려는 ‘연화(연꽃)도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화사에는 사명대사의 수도터인 토굴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보덕암은 바다를 굽어보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자태가 웅장하기 그지없이 서 있는데 3년간의 불사 끝에 문을 연 5층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연화봉 꼭대기에 자리한 해수관음상까지 불교의 성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연화도는 실제로도 명당의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장님의 딸이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동네 사람의 귀띔으로 살짝 들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기도처가 필요하다면 연화도는 아주 제격이 아닌가.

 

▲ 기암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보덕암은 5층 건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땅을 사들이고 지은 불심 가득한 사찰이다.

사람들로 한창 북적인 섬은 아주 한적하다.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끊어져 그렇다고들 하신다. 마을 구경을 하며 걷다 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났다. 따로 표지판이 없었지만 조그만 섬에서 길을 잃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들면 봉우리가 가깝게 보이고 사방이 탁 트여 바다 위에 앉은 섬들은 그대로 지표가 된다. 오르다 푸릇한 머위나물도 만나고 두릅나무도 만났다. 자루를 들고 다니며 두릅을 채취하는 아저씨께 나물 주인이 있냐고 묻자 없으니 먹을 만큼 뜯어도 된다고 하신다. 아저씨와 나는 가시 달린 드릅나무를 붙들어 주고 따고 둘이서 한 조가 돼 한참을 섬을 돌았다. 아저씨는 민박집을 하는데 집에 모친이 홀로 계시니 오늘 자고 가라고 하신다. 오늘은 안 되지만 다음에 자러 오겠다는 내 말에 아저씨가 “그런 기약은 없는 거지, 다음에 언제 또 오겠어.” 하신다. 섬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나 뭍에서 섬을 그리워하는 일이나 무용하기가 그지없는 일이라 왠지 봄날의 적막함이 느껴진다. 맑은 날씨 탓에 먼 섬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섬을 타고 너머에서 봄이 밀려온다. 섬 전체에 수국이 피면 참 멋지다는 아저씨가 꽃이 피면 오라고 하신다.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돌아서니 나를 데려가려는 배가 들어오고 있다. 

 

▲ 연화도와 반하도 우도를 연결하는 출렁다리는 사람들만 오갈 수 있는 보도교로 국내 최장길이를 자랑한다.

돌아와 머위 잎을 데쳐 젓갈에 쌈을 싸서 입안으로 한가득 넣어본다. 동백꽃 향기가 나는 것도 같고, 짭조름한 바다 소금 맛도 나는 듯하고. 쓰디쓴 나물 맛에 섬에 가득했던 봄빛의 달큰함까지 느껴진다. 다녀와 기억을 복기하며 여행 글을 쓰는 내내 가득 찬 둥근 보름달이 베란다 창밖에서 내게 눈길을 준다. 검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달에 그리움이 인다. 바다에 꽃으로 핀 연화도도 저렇게 둥둥 떠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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