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고금의 흥망성쇠를 돌아보게 해 주는 북망산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2-13 13: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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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성곽은 무너지고 궁실은 엎어졌으며 사관은 불에 타 잿더미로 되어 있고, 묘탑은 언덕 빈터가 되어 있었으며, 담장은 쑥대에 덮여 있었고, 골목에는 가시나무가 무성하였다. 게다가 들짐승은 황폐해진 섬돌에 굴을 파고 있었으며 산새는 정원의 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뛰노는 아이들이나 양치는 목동들은 구규에서 서성이고, 농부나 밭을 가는 늙은이는 궁궐문 양쪽 누대 위까지 땅을 일구어 기장 농사를 짓고 있었다. 비로소 맥수의 노래가 오직 은나라 빈터만을 슬퍼한 것이 아니며, 서리의 비통함은 주나라 옛터의 서러움이 그랬으리라 믿음이 간다.’ (낙양가람기. 동위, 양현지)

“낙양성 십 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에~훼라, 만수,” 아마도 ‘김세레나’가 불렀던 노래 같다. 여기서 낙양성이란 지명은 중국 하남성 낙양을 일컫는다. 낙양 한복판에는 뤄허창(낙하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북망산이 있다. 예전부터 북망산은 무덤이 있는 사자들의 땅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길하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곳인데, 게스트 하우스 사장을 달래고 사정사정해서 오후 늦게서야 오토바이를 타고 북망산에 올랐다.

 


동한을 세운 광무제, 북위의 효문제, 당나라 시인 두보의 묘(정저우시에 있다는 등 논란의 소지가 많음)와 진시황을 세운 여불위, 멸망한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뿔사, 이곳의 지형도 뒤바뀌어 있었다. 우선 광무제, 효문제의 능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아마도 ‘낙양고묘박물관’으로 이전해 있거나 없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옛 무덤은 사라지고 현대인들의 공동묘지로 탈바꿈해 있었다.


북위시대, 효문제가 이곳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황허 이북으로는 무덤조차 쓰지 못하게 했고 100만 명에 이르던 선비족의 무덤 터였던 땅.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북망산을 휘 한 바퀴 돌고 싶었다. 북망산은 그저 한적한 야산에 불과했다. 북망산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낙양 8경’에 속한다고 한다. 낙양은 분지라서 늘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다. 낙양의 풍광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 천지사방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북망산에 올라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둑해져서 내려 올 수 있었다.

후한의 시조 광무제

동한(후한으로 불리기도 한다)을 창시한 광무제는 호남성 장사 사람으로 정왕 유발의 후손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한 줄기의 볏잎에서 아홉 가닥의 이삭이 매달린 꿈을 꿔 그의 이름을 수로 지었다. 유수의 인상은 보통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유난히 높은 코에 이마 중앙의 뼈가 해 모양으로 불룩 튀어나와 관상가들이 귀인의 상으로 말하는 ‘융준일각’의 인상이었다. 25년 6월, 호남성 직례성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건무로 하니 그가 후한의 시조 광무제였다. 그는 훗날 수도를 낙양으로 정했다.


광무제는 전한 문제 때 실시했던 1/30세 제도를 부활시켜 세금을 가볍게 하고, 군사 제도는 소수 정예화의 원칙에 따라 장병들의 수를 대폭 감소해 생산 활동에 종사하도록 했으며, 행정구역을 통폐합해 관리들을 감축했다.


또한 고아, 노인, 빈곤자에 대해서는 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화폐 제도를 개혁했다. 개국 공신들을 회유해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대신 조정에 들어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학문을 숭상하여 당시의 수도 낙양의 태학에는 학생들만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곳 북망산에는 광무제의 묘가 어딘가에 묻혀 있다. 

 


효문제 원굉

북위시대 ‘효문제’ 원굉은 선비족 탁발 씨의 가장 찬란했던 한 시기를 열어갔던 황제였다. 그의 6대조 할아버지인 탁발규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마지막 왕조였던 북량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북위’ 왕조를 열었다. 중국역사 이래 가장 일찍 한화한 것은 흉노족이며 가장 깊이 한화하여 스스로의 민족을 바꾼 것은 바로 이들 선비족이다.


효문제가 즉위하면서 우선 황족 탁발 씨의 성을 원 씨로 바꾸고 다른 선비족 모두에게 한나라 식의 성씨로 역성하도록 했다. 나아가 선비족의 복장인 호복도 없애고 한족의 옷을 입도록 했으며 선비족과 한족의 결혼을 적극 장려했다. 또한 선비족의 언어를 버리고 한족의 언어를 배울 것을 법령을 제정해 공포했다.


무엇보다 효문제의 업적은 섬서성 평성에 있던 수도를 이곳 낙양으로 옮긴 것이다. 천도를 단행한 효문제는 선비족 100만 명을 이주시켰다. ‘낙양박물관’에 갔을 때, 효문제를 따라 남하하는 선비족들의 모습이 담긴 대형 그림이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효문제는 백성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의 장례식을 황하 이북에서는 치를 수 없도록 했고, 장지를 정하거나 옮길 수 없도록 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들이 이곳 북망산에 집중적으로 묻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민족 대융합의 선례가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이후에 수.당 통일국가를 다지는 기초가 되었다.

 


위대한 시인 두보

두보(712~770)는 33세가 되어 장안에 올라와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만다.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과거에 응시했으나 웬일인지 또 다시 낙방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당시 시험의 총 책임자인 당대의 실력자 이림보는 훌륭한 인재가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응시자 전원을 낙방시킨 것이다.


벼슬길이 막힌 두보의 장안 생활은 비참해졌다. 당시 생활을 읊은 그의 시에서 드러나듯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려 눈치를 살피고 저녁에는 권력자들이 탄 말의 뒤를 따라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이 먹다 남긴 술과 음식 찌꺼기를 받아먹는” 괴로운 생활이었다. 이러한 사이에 두보는 자식을 굶겨 죽이기까지 했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얼이 빠져 술과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두보는 다음과 같은 분노에 찬 시를 남겼다. “권세 있고 돈 있는 집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코를 찌르고 거리에는 백성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두보는 반란 평정을 위한 정부군에 입대한다. 얼마 못가 반란군에 체포된 두보는 장안에 유폐되었으나 탈출하여 당시 현종의 아들 숙종 황제를 만나 솔직한 충언을 한다. 그러나 두보의 입바른 소리가 황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장안에서 추방된다.


이후 두보는 가족과 함께 중국 각지를 떠돌며 방랑과 유랑 생활을 12년 동안 하게 된다. 방랑하며 전란과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었고, 두보 자신도 초근목피와 도토리로 허기를 달래며 먹고 살기 위해 땔감을 베어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두보는 사천성을 떠나 장강 중류 지역을 방랑하다가 마지막에는 호남성 악양 부근의 강에 떠있는 낡은 배 안에서 병사했다. 중국문학사를 넘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하나인 두보. 두보의 그때 나이는 59세였다. 

 


춘망(春望) / 두보(杜甫)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는 깨어져도 산하는 그대로”

안록산의 난이 끝난 것은 763년이었다. 755년부터 8년에 걸친 내전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도 호구조사를 실시했었다. 5400만을 헤아리던 당나라의 인구는 내전이 끝나가던 760년 실시한 호구조사에서 1800만 명으로 조사됐다. 참혹한 내전이었다. ‘국파’는 패전의 뜻이 아니다. 깨어져 너덜너덜해진 상태를 뜻한다. ‘산하재’ 산하는 의연하다. ‘재’는 ‘있다’의 의미가 아니라 ‘의연하고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뜻.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성에 봄 들어 초목 깊어라”

성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봄은 올해도 돌아왔다. 인간 세상은 질서를 잃었지만 자연은 질서를 잃지 않는다는 비유가 아닐까.

‘감시화천루(感時花濺淚)’ “시절에 느껴 꽃도 눈물을 쏟고”
‘한별조경심(恨別鳥驚心)’ “이별을 한하여 새도 놀란다”


‘시’란 현실의 상황. 꽃도 눈물을 쏟고, ‘한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린 우주에 새 우는 소리도 불안하다. 어쩌면 시절을 느껴 꽃을 보고도 눈물을 쏟고, 이별을 한탄하여 새 소리에도 놀라는 두보 자신의 마음에 대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봉화연삼월(烽火連三月)’ “봉화가 삼월에도 이어져”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 “집 편지는 만금값”


3개월 간 봉화가 이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삼월’은 음력 삼월. 평상시 같으면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두보는 그의 시 ‘여인행’에서 “날씨 화창한 삼월 삼짇날, 장안의 물가에는 미인도 많구나”라는 싯구를 남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아 곳곳에서 봉화불이 피어오른다. ‘가서저만금’ 가족으로부터 뚝 끊어진 소식. ‘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얻을 수 있다면, ‘저만금’ 만금 값에 해당한다.

‘백두소갱단(白頭搔更短)’ “흰머리는 긁는 대로 짧아져”
‘혼욕부승잠(渾欲不勝簪)’ “도무지 비녀를 못 이길 지경”


46세의 두보는 벌써 백발이었다. ‘혼’은 도무지라 할까, 절망이랄까. 가족에 대한 무한사랑과 나라에 대한 성실한 근심.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 두보의 인간적 면모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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