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산하를 돌려다오’, 우국충의지사 악왕묘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5-24 12: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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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도시를 가다

“해와 달이 함께 우겸의 무덤 위에 걸렸고
절반의 산하가 악비의 사당 앞에 있네”
갑신년 팔월에 고향과 이별하며, 장창수


 


서호의 서남쪽에 남송의 우국충의지사 악비 장군의 사당이 있다. 악비는 지금도 중화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에 악비를 죽인 남송의 재상 진회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이 찍혀 있고,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악비묘 앞의 서호에서는 매일 저녁 세계 최대 규모의 수상 공연 ‘인상서호’가 상연된다. 이름깨나 있는 중국의 각 도시에서는 저녁이면 이와 같은 대규모 공연이 꼭 있는데 대부분 연출자가 장이머우 감독이다. “맑은 날의 서호는 비 내리는 서호보다 못하고, 비 내리는 서호는 밤의 서호보다 못하고, 밤의 서호는 인상 서호보다 못하다”라는 홍보 문구가 붙어있다. 지난해 항저우에 왔을 때 우연히 비가 내렸고, 그날 밤 부슬비를 맞으며 거닐었던 서호의 밤 풍경은 잊을 수 없다.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악왕묘에 들어서자 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안에는 4.5m 높이의 악비 동상이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마치 광화문 앞에 서 있는 ‘구리 이순신’을 보는 것처럼 친숙하고 늠름했다. 하지만 신화가 된 악비는 역사 속에 박제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악비(1103~1142)는 하남성 탕음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중국 북방을 차지한 여진족 금나라와의 항쟁에서 그는 교묘한 전술과 용기로 전공을 세워 30대 젊은 나이에 남송의 유력한 장군이 된다. “태산을 움직이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사를 움직이기는 어렵다”는 말이 금나라 병사들의 입에서 떠돌 정도로 악비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악비는 500 기병만으로 금나라 10만 주력 부대를 격파한 적도 있었고, 남송의 부대를 이끌고 중원을 탈환한 뒤 카이펑에서 불과 20km 떨어진 거리까지 진격해 금나라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금군의 총사령관 올출은 카이펑에서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파의 우두머리 진회는 하루에 12번에 걸쳐 금패(조정의 긴급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에게 내리는 특별 통과증. 이 통과증을 소지한 사자는 하루에 500리를 달리는 준마를 타고 명령을 하달한다.)를 내리고 철군을 명령한다. 악비는 자기 민족에 대한 충섬심도 강했지만 남송 황제에 대해서도 충성을 바쳤다. 금나라와의 강화를 위해 철수하라는 명령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악비의 비극이 있었다.

 


고종의 소환 명령에 따라 악비의 군대가 철수하자 화북은 다시 금나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전선에서 돌아온 악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옥이었다. 악비에게 모반죄가 씌워졌고,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자백을 강요당했다. 악비는 고문을 견디며 그의 웃옷을 벗어 등을 보였다. ‘정충보국’, ‘정성과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한다’는 네 글자가 살 속 깊이 새겨 있었다. 그러나 악비는 비밀리에 옥중에서 처형된다. 그때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악비가 죽은 다음 해인, 1142년 마침내 남송과 금나라 간의 강화가 성립됐다. 강화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회수 중류를 경계로 삼는다.
2. 송은 금나라에게 대대로 신하로서 절조를 지킨다.
3. 금 황제의 탄생일과 설날에 축하사절을 보낸다.
4.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매년 봄에 세공으로 보낸다.

이렇게 해서 1125년 금나라와 송나라 간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정강의 변’을 거치며 북송이 멸망했고, 18년에 걸친 전쟁이 종결됐다. 양국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해 금나라에 잡혀갔던 북송 황제 휘종의 유해와 남송 황제 고종의 생모 위씨는 살아서 돌아온다. 휘종의 아들 흠종은 끝내 송환되지 못했고, 북녘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편 악비의 억울한 죽음은 그가 죽은 지 22년이 지나 진상이 밝혀졌고 누명은 벗겨졌다. 한 옥리가 몰래 악비의 유해를 운반해 교외의 채소밭에 묻어준 것이 밝혀져 악비의 유골은 이곳 서호 강변에 안장됐다. 훗날 악비의 사당도 세워진다.


현재 악비는 중화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후세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고, 금나라와 강화를 성립시킨 ‘진회’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소리를 들으며 죽일 놈이 되어있다. 역사가 그렇게 선과 악으로 구분할 만큼 단순한 것일까? 진회를 위한 변명을 들어보자.

 


진회는 1126년 금군이 카이펑을 공략했을 때 “무릎 꿇고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서서 싸우다 죽자”라는 투쟁노선을 견지한 주전파였다. 카이펑이 함락되자 그는 금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남송으로 귀환한 인물이다. 그는 금나라에 억류돼 있으면서 생각이 바뀌어 화친파로 변해 있었다. 남송의 고종 황제는 국제 정세에 밝고 금나라의 관료들과 인맥을 쌓아 온 진회를 등용해 그에게 강화교섭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


악비, 한세충, 장준 등은 북송이 멸망할 때 각지에서 일어난 근왕 의용군 출신이었다. 그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송에 와서 관직을 수여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들은 금나라를 토멸해 송나라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국치를 씻어내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여기고 있었다. 진회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금나라와의 강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진회는 이들을 항저우로 불러들여 그들이 거느린 군대를 중앙정부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하여 남송 초기 무관들의 힘은 약화되고 문관들에 의한 중앙집권정치가 복원된다. 이 과정에서 대금 정책에서 가장 강경파였고 부하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던 악비를 모반을 구실로 옥에 가두고 제거한다.


한편 금나라 측에서도 강화를 바랄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사정이 발생한다. 당시 금의 희종도 중앙집권을 추진하고 군주권의 확립이 절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흥안령 서쪽에서는 몽골의 침입이 잦아졌고 국경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오늘날 미국처럼 아무리 초강대국이라 할지라도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또 하나, 금나라는 화북지역을 통치하는 데 본질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한지 통치가 ‘연운 16주’에 머물렀고 본거지는 장성 이북에 있었다. 그러나 금이 지배하게 된 한지는 그보다 훨씬 광대해 회수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당시 금나라는 고려, 서하, 송나라까지 군신 관계를 맺으며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금나라가 이 넓은 화북의 땅을 통치하려면 독자적인 방법이 필요했고, 그래서 금나라가 선택한 방법은 만주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한지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중원으로 이주한 여진족은 모두 100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목민족의 고질적 숙명, ‘중국문명에 동화된다’라는 병폐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회는 1155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년 동안 재상의 자리를 지켰다. 게다가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재상이 아니라 그의 재임 기간에 정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진회가 주장한 화평은 송이 가진 국력의 한계를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고 금나라의 내정을 제대로 살펴 양국의 역학관계를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고 그의 신념이었다.

 


대웅전을 빠져나와 왼쪽 담장으로 난 작은 쪽문으로 들어가서 다시 왼쪽 길로 들어서자 바로 악비묘가 나온다. 무덤은 두 개가 겹쳐져 있다. 왼쪽 큰 무덤은 악비묘, 오른쪽 무덤은 그의 아들 묘이다. 흥미로운 것은 악비 묘역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철상으로 만든 진회와 그의 부인 왕씨의 동상이었다.


‘문명유람 청물토액’, “문명인은 동상에게 침을 뱉지 마시오.” 악비를 죽음으로까지 내몬 진회와 그의 부인 왕씨까지 얼마나 미웠으면 마치 악비에게 용서를 구하는 듯 철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려 놓았을까.


악비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패방 양옆에 후려 쓴 행서체로 적힌 글귀, ‘산과 강을 우리에게 돌려달라’는 문귀가 유난히 가슴에 와 박힌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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