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문예부흥의 은인 못다 한 귀향(1)

이기우 사단법인 해돋이관광협의회 이사장 / 기사승인 : 2020-07-10 11: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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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K寶庫 큐레이팅하다

방어나루 풍운아 천재동

 

울산과 관련이 있는 근대인물로는 독립운동가 박상진과 서진문, 한글학자 최현배, 국립민속박물관 설립에 기여한 송석하, 아동문학가 서덕출, 소설가 오영수, 가수 고복수, 근현대 창의예술교육가 천재동, 현대창업가 정주영 등을 들 수 있다. 


증곡(曾谷) 천재동 선생은 희곡가, 항일예술가, 연극인, 화가, 공예가, 계몽교육가, 민속예술가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가면제작부문 인간문화재다. 그는 교육‧문화‧예술에 있어 걸출한 인물이며, 조명 받아야 할 가치가 뛰어난 융합콘텐츠적인 역량을 지녔다. 


천재동 콘텐츠는 체험형 확장성이 있다. 인간적이고 인문학적인 천재동 콘텐츠는 치유와 여유를 갖게 해주고 울산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드높여준다. 울산 예술문화계의 은인인 천재동이 평생을 천착해 남겨놓은 유무형 유산에 대해 후학으로서 우리가 화답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 세대를 위한 소통이며 우리의 사명이다. 천재동을 고양하는 기념사업으로 발전되고 지역사회의 인문학적인 성장과 성숙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 <게 노래> 천재동 작(동요민속화집 발췌)


천재동 화백이 연 미술세계와 울산 화단의 동향

인체소묘를 전공한 천재동은 유화기법의 풍경화에 비해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근대시절의 미풍 생활상을 담은 스토리 인물화다. 광복을 기념해 1945년 10월부터 1953년까지 8회에 걸친 <양조복‧천재동‧최용규 3인전>은 울산최초의 미술전시회였다. 이념의 갈등으로 험악했던 사회상과 전쟁의 어수선한 시기였음에도 미술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열었다. 광복전후 시대부터 울산의 척박했던 예술문화교육환경에서 토양을 가꿨다. 


울산화단의 동향을 보면, 제1회 백양시화전(1955)이 내고향다방(옥교동 조양백화점 안)에서 열렸다. 향토시집 <용금>(1955 창간)에 작품을 발표했던 김태근, 박상지, 이상숙, 박태을, 박숙경, 박태윤, 정해상, 이용우 등 울산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시를 쓰고, 천재동, 이수원, 오영재, 김인수가 이들 시에 삽화를 그렸다. 서양화가 최희 제1회 개인전(1960, 옥교동 회상다방)을 필두로, 심수구 개인전(1966, 옥교동 신도다방, 수채화, 유화, 구성, 시화), 김홍명 개인전(1968, 옥교동 유미다방), 이수원 개인전(1969, 청다방)이 각각 열렸다. 


천재동의 전출 이후 방어진에 남아 있던 양조복, 최용규의 전시는 지속되지 않았다. 울산광역시 승격 기념 울산사람전(1997)에는 송석하, 최현배의 유작과 더불어 천재동(82세)도 울산광역시로부터 추천받아 출품했다. 울산처용탈연구소(처용탈 제작가 김현우) 주관으로 열린 문화가면합동전에 참여했다. 동구문화원 주최 한마음회관 초대전(2003), 현대예술관 기획 천재동 탄생100주년 기념전(2015), 리갤러리 초대 101주년 회고전, 이탈리아 피아캐슬전(2016)이 열렸다.
 

▲ <나물노래> 천재동 작, 1995년(동요민속화집 발췌)


아동의 관점에서 창안된 천재동식 교육의 확산

천재동은 격동기의 아동들을 계몽하는 방법으로 아동들의 참여를 이끄는 극화 수업과 더불어 유희 요소의 교육방법을 연구해냈다. 강점기에 불렸던 노래들은 인성교육 차원에서 아동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인사’라는 예절을 다룬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인사하는 동작을 유희로 표현하니 아동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반응이 좋아 국내외 장학사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학습이해를 돕는 교육 방법의 연구로는 산술공부를 위한 교구재로 차트와 그래프, 그림을 담아내는 입체 괘도를 창안해 보급시키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장학사들이 참관한 시범공개수업에서는 극화 수업, 꼭두각시 춤, 산술괘도 등의 새로운 문예교육 방식을 선보여 호평 받았다. 이러한 천재동식 교육방법은 획기적이고 참신한 창의 교육 시스템으로 각인돼 전국 확산의 계기가 됐다.


그는 계몽 활동 수단으로 페스탈로치 유화, 한국 위인 초상화 등으로 면학적인 미술활동을 전개했다. 교내에 시각화한 환경미화로 인체소묘와 무대미술의 역량을 발휘해 교육환경을 개선했다. 이 때문에 천재동은 교육 역량이 큰 다른 학교로 이적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부산시교육위원회에서는 외국교육사절 교육시찰단을 맞이하기 위해 천재동에게 연구수업을 지명하기도 했다.

서덕출의 창작동요와 천재동의 전래동요

동요는 전승동요, 구전동요, 창작동요가 있다. 가장 오래된 전승동요로는 신라향가인 서동요가 있다. 민요 속에 동요가 자리했다. 아동문학가 서덕출은 예술성이 있는 <봄 편지>처럼 아동의 노래나 시 작품을 썼다. 서덕출동요제는 창작동요 성격으로 열리고 있다. 동요는 대다수 동시를 노래로 옮긴 만큼 노랫말 속에 담긴 시심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천재동은 우리의 고향의식이자 원초적 인간심서의 각박한 삶보다는 순수했던 시절의 고향사람을 소재로 했다. 그는 전국의 동요 400수를 수집해 그림으로 남겼다. 사라져가는 창가풍의 구전동요가 집대성됐다.
전래동요가 끊어지리라 예견한 천재동은 우리들 가슴속에 그리움으로만 남는 전래동요가 아니라 무궁토록 불리기를 소원했다. 동요민속화는 집대성한 동요와 독특한 장르의 융합적 결과물로 그 자체만으로도 진가가 있다. 이는 겨레의 숨결을 찾아 한국인의 심성을 잘 드러낸 것으로 시대상을 가늠케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미풍양속이 담겨진 타임캡슐 같은 동요민속화

천재동이 즐겨 그린 민속화는 인체소묘를 배운 것이 발휘된 것으로 우리네 삶의 모습을 담아냈다. 전국의 전래동요를 망라한 400수의 동요들을 채록해 아름다운 우리 전래동요가 사라지기 전에 이를 집대성했다. 그는 일상 속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정답게 불렀던 동요가 주는 노랫말에 그림을 접목해 동요민속화를 창안했다. 노래와 심미안으로 그린 풍속화에 동시의 음률을 접목한 나물노래처럼 동요민속화라는 융합적인 새로운 장르다. 


84세에 발간된 전래동요민속화집 <달노래·별노래·새노래>에는 155수를 수록했다. 천체 기상, 사랑, 유희, 놀려주기, 산과 나무, 동물의 노래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배꼽을 드러낸 남자아이들, 엉겁결에 흘러내린 바지를 잡고 있는 아이, 나비를 쫓는 선머슴애 같은 여자애들, 치렁치렁한 댕기머리의 남자아이, 연지분통을 한 여인네가 나온다. 그 모습들이 익살스럽고 정겹기만 하다. 


천재동의 동요민속화는 매우 독특한 기법과 필선의 회화로 재표출한 자신의 독창적인 양식이담겨 있다. 애환과 숨결이 담긴 얼과 혼을 담아 옛 정서를 재창출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미풍양속이 담겨진 타임캡슐과 같은 소중한 서화집이다. 동요민속화집 2호 발간이 필요한 이유다.

서진문 <모>사건과 이색 결혼, 그리고 항일극의 태동

1943년 11월 귀국한 천재동은 독립운동가 서진문 의사의 외동딸 서정자와 결혼하게 된다. 서진문 의사는 동경대지진 때 일제의 만행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여성야학 지도와 보성학교 교사로서 민족계몽을 이끌었다. 여섯 차례에 걸쳐 밀항해 재일동포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제에 저항했다. 서진문 의사는 1928년 10월 25일 어대전(즉위식) 축제에 일본왕 히로히토가 요코하마에 온다는 정보를 접한다. 히로히토는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최고전범이다. 서진문은 권총을 가슴에 품고 꽃전차에 뛰어 올랐는데 위장술로 꽃전차가 3대였다. 현장에서 체포돼 고도부키(횡빈) 감옥소에 갇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1월 16일 풀려나지만, 17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꽃다운 28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천재동의 결혼은 녹록치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신식 결혼은 일본 신사(방어진천년송)에서 해야만 했다. 장인은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재판도 없이 고문사한 서진문이었으니, 신사에서의 결혼은 무리였다. 일장기를 게양하여 예를 올린 후 예배하라는 것에 응하지 않았다하여 폐문된 예배당(현 방어진제일교회)을 빌렸다. 일본인들은 정세가 불안한 시국에 안일하게 신사에서 결혼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신사가 아닌 결혼식에 신변의 위협을 염려해서 주례를 기피했다. 천재동과 결혼덕담을 나누던 야구코치 ‘오라 고야산’이 주례를 서주겠다고 했는데, 그는 일본의 명사(名士)이자 승려였다. 이렇게 결혼식이 마쳤지만 예배당에서 승려가 주례를 한 소동으로 이들 부부는 피신해야만 했다. 천재동은 장모 윤상필로부터 서진문이 일왕 암살을 도모했음을 한평생 듣고 새겼다.
 

▲ 신혼시절 꽃집 앞에서. 왼쪽이 서정자 여사, 오른쪽이 천재동(회고록 발췌)


천황 모독 사건 연루, 위기에 빠지다

1944년 어느 날 새벽, 천재동은 구치소로 연행돼 고문을 받았다. 전날 술자리에서 화장지 대신에 신문지상에 보도된 일왕사진으로 뒤를 닦았다는 ‘천황모독죄’ 사건 때문이었다. 뒤늦게 실토한 황병곤(전 일본 연식정구대회 우승)은 주모자로 수감되고 천재동과 김영식은 이틀 뒤에 풀려났다. 


신혼시절의 천재동은 ‘연령징용’ 대상자로 통지를 받았다. 1915년생이면 모든 신체 이상 조건과 관계없이 징용에 응해야 했는데 군민들은 이 연령징용이 살인징용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방어진신사(방어진천년송)에서 예비소집이 있었다. 천재동은 인위적인 배탈로 소집을 피해보려고 백방 노력했으나 건장한 청년이라 허사였다. 출정식 대장으로 선발되면 갱도에 들어가지 않고 지상에 근무하게 돼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피징용자들은 다투어 대장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천재동이 대장으로 선발됐다. 징집일 새벽 대절한 자동차를 이용해 병영으로 피신했다. 이때 30대 연령징용에 끌려간 사람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재동과 천황모독죄로 감옥 생활을 한 덕분에 살아남은 황병곤 뿐이었다.
 

▲ 서정자 여사(서진문 의사 무남독녀, 천재동 부인)


▲ 방어진천년송(김경상 작가 촬영)


일제의 잔학성, 탈극 <박제인간>

광복직후 일본문화 잔재의 청산, 왜색문화의 청산이 화두가 됐다. 천재동은 민족의 정체성과 일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그가 체득한 전문 연극 요소를 민족계몽의 수단으로 확고히 한다.


아동극단과 청년극단을 창단해 소극장 운동을 펼쳤다. 일제의 잔학성을 알리며, 극화수업을 통해 아동들의 올곧은 의식함양을 도모했다. 천재동은 아동 연극반을 조직했다. 첫 작품의 연제는 희곡 <박제인간>이었다. 박제되고 억압당한 조선이 광복이 되자 본래대로 회복돼 새 삶을 사는 내용이다. 항일물 <박제인간>은 방어진초등학교 신선삼 학생이 주인공이었다. 그는 훗날 연예인 쓰리보이로 유명해졌고, 한국연예인협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천재동은 청년극단을 조직해 부락 순회공연을 벌였다. 

 

▲ 융합창작극 <두 마리의 당나귀> 국무총리상 수상(회고록 발췌)


<박제인간>이 왜색척결의지를 콘셉트로 하다 보니 극 중에 흉악한 일인들이 등장하게 됐다. 공연이 끝난 후 악역배우들이 성난 관객들로부터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고민한 천재동은 봉변을 막기 위해 종이를 채색한 탈을 착안했다. 천재동이 처음으로 만들어 본 창작 탈이며 연극에 처음 도입된 것이었다. 천재동은 희곡, 무대미술, 장치 및 소품, 연출에 역량을 발휘했다. 풍물가무극 <두 마리의 당나귀>는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기우 사단법인 해돋이관광협의회 이사장, 문화예술관광진흥연구소 대표, 천재동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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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단법인 해돋이관광협의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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