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6.25…후방에서 겪은 전쟁의 상흔

이종호 기자 / 기사승인 : 2020-07-10 11: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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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70년

잘려나간 언양초 팽나무 네 그루

1941년 3월 말 언양초등학교 운동장 동쪽 담 곁에 남북으로 서 있던 팽나무 네 그루가 잘려나갔다. 밑뿌리통 직경이 2미터가 넘는 거목들이었다. 조선시대 언양현 동헌 객사를 지켜왔고, 1919년 4.2 언양장날 만세운동을 지켜본 이 나무들은 하루아침에 왜 베어졌을까? 


한 해 전 1940년 5월 24일 언양국민학교 운동장 서쪽에 언양공립청년훈련소가 문을 열었다. 조선 청년들을 일제 군대에 징용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그해 12월 26일 신사 대마봉재전까지 준공해 훈련소 청년들과 학생들을 참배토록 했다.

 

1941년 3월 24일 언양면청년대 발대식이 열리고 일주일도 안 돼 팽나무 네 그루가 밑둥만 남긴 채 베어졌다. 일제는 잘린 나무 몸통으로 훈련용 목총을 만들었다. 언양면청년대원들은 이 팽나무 목총으로 날마다 전투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일제는 물러났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언양초 잘린 팽나무들은 전쟁의 참화를 또 다시 지켜봐야 했다. 그해 7월 말 안강전투 전진부대로 한국군 제3사단 23연대와 제5연대가 언양초와 화장산 발치 옛 조선견직주식회사 터에 주둔했다. 9월 초에는 탱크부대가 진주했다. 학교를 군인들에게 빼앗긴 학생들은 남천교 왼쪽 둔치, 동부리 공민학교 교실, 작천정, 일본인 소학교 마당, 서부리 성부잣집 서당 등에서 돌아가며 야외수업을 했다.


이듬해 10월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서쪽 교실 마루 밑에서 실탄을 주워내 탄피치기를 하며 놀았다. 잘려나간 팽나무 밑둥 위에선 밀어내기 놀이를 했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팽나무 네 그루의 밑둥치는 1983년 9월 동쪽 운동장 정비공사를 하면서 트럭 36대분의 마사토에 묻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6.25 전쟁 시기 교외수업(언양초)

 

군부대와 군병원에 빼앗긴 교실


▲ 1950년대 울산여중·고 학교 정문

 

6.25 전쟁이 터지고 전선이 낙동강으로 밀려왔다. 전장의 후방인 울산에는 많은 군부대가 주둔했고 군수물자가 집결했다. 7호 국도는 군인과 군수물자의 이동 통로가 돼 군 차량의 통행이 그칠 줄 몰랐다. 항구로부터 물자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1951년 울산항부터 달리까지 8.9킬로미터 철도가 완공됐고, 이듬해 장생포에서 야음에 이르는 4.1킬로미터 철도가 놓여졌다. 울산의 학교들은 군부대가 진주하거나 군병원으로 징발됐다. 1950년 7월 15일 울산초 전체 교사가 수도육군병원에 징발됐고, 8월 1일 울산농업중학교 본관 교사를 미군이 징발해 사용했다. 8월 2일 병영초 전체 교사를 수도육군병원에 징발했고, 10월 1일 울산농업중학교 전체 교사가 23육군병원에 징발됐다. 울산중학교(현 학성여자중)에는 징병검사장이 마련돼 울산의 청년들을 검사하고 입대시켰다. 울산농업학교 5,6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군 현역이나 의용경찰로 입대했다. 이렇게 입대한 지역 청년 가운데 1633명이 목숨을 잃었다.


1953년 휴전 뒤 12월 25일 울산농업고등학교 기숙사 등 일부 건물이 군 징발에서 해제됐고, 1954년 5월 1일 병영초 전체 교사가 군 징발로부터 해제됐다. 울산농업고와 울산초 전체 교사가 군 징발에서 해제된 것은 1956년 12월이었다. 

 

▲ 1954년 제일중. 전후 복산동 가건물 전경


울산교육청이 발간한 <울산교육사>는 교실을 빼앗긴 당시 학생들의 모습을 이렇게 담았다. “졸지에 교실이 없어진 아이들은 교회, 동사무소, 창고, 사찰 등의 유휴건물을 빌어 가교실로 이용했지만 그것도 모자라 대부분 노천수업을 했다. 칠판을 메고 가까운 산이나 들로 나가서 나뭇가지에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했으니 온전한 학습은 이뤄질 수 없었다. 가교실은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을 대비하는 6학년에게 우선 주어졌고 전기가 부족했던 때라 촛불을 켜놓고 저녁 늦게까지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 당시 사용한 책이나 공책은 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위원단)나 유네스코의 지원에 의해 만들었는데 지질이 거칠고 색깔이 거무스름했으며 그 외 학생들이 사용하는 책받침과 필통은 통조림 깡통이나 함석으로 만들었고 지우개나 연필도 매우 조잡해 지질이 좋지 못한 공책에 쓰면 종이가 찢어지기 일쑤였다. 딱딱한 지우개를 석유에 담가뒀다가 말랑말랑해지면 사용하는 아이도 있었다.”
 

▲ 1950년대 교과서들

울산 보도연맹과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한 달도 되지 않아 각 읍·면 단위로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끌려온 사람들은 울산경찰서(중구 북정동 현 울산시립미술관 공사현장)로 이송돼 유치장에 갇혔다. 매일같이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끌려오면서 울산경찰서 유치장 여섯 개 방이 꽉 차게 되자 경찰서 뒤편 연무장을 임시수용소로 사용했고 그것도 모자라자 학성공원 앞 농협 창고에 구금했다.


처형 대상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1950년 8월 5일부터 26일까지 최소 열 차례에 걸쳐 밤마다 차례로 불려나간 뒤 트럭에 실려 사라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육군본부 정보국 제2과 직속부대였던 울산CIC(방첩부대)에 인계된 처형자 70명을 합쳐 처형된 보도연맹원은 모두 681명이었다. 하지만 실제 학살 민간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1960년 8월 21일 유해발굴이 이뤄졌을 때 학살지에서 발견된 두개골만 825개에 이르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학살피해자가 최소 870명 이상이라고 밝혔다. 학살된 곳은 청량면 반정고개, 온양읍 대운산 진개골, 동구 일산동 방어진 앞바다, 범서읍 서사리 서사마을, 북구 강동동, 남구 옥동 울산법원 뒷산, 북구 농소동 무룡산 등이었다.


1960년 8월 유족들은 중구 성안동 함월산 중턱 백양사 법당에 수습한 유골들을 안치했다. 24일 울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백양사 앞에 조성한 합동묘에 유골을 안장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비문은 연세대 교수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던 외솔 최현배가 지었다. 하지만 합동묘는 이듬해 5월 박정희 군사 쿠테타 정권에 의해 모조리 파헤쳐졌다. 쿠테타 세력은 합동묘에서 유골을 꺼내 트럭 수십 대에 실어 당시 달동 화장터(옛 신정주공아파트 부근)으로 보내 화장했다. 화장터의 굴뚝에서는 며칠 동안 검은 연기가 쉬지 않고 피어올랐다.


202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아 백양사에서 보도연맹원들의 넋을 위로하는 국태민안 수륙대재(천도재)가 봉행됐다. 울산시는 오는 10월 중구 약사동에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한다.
 

5만 명 넘는 북한 피난민 정착

전쟁을 피해 북한 피난민들이 대거 울산에 유입됐다. <1954 경남연감>에 따르면 1953년 울산 피난민은 1만5414명으로 부산과 거제를 빼고 마산과 함께 경남지역에서 피난민이 가장 많았다. 울산에 정착한 북한지역 피난민은 1970년 현재 울산 3만9270명, 울주 1만1400명으로 5만 명이 넘었다.


또 하나의 전쟁, 빨치산

1948년 2.7 구국투쟁을 계기로 남로당은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각 지역에 야산대가 생겨났다. 빨치산의 시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야산대는 무장유격대로 발전했다. 울산은 서부지구인 상북, 두서, 두동면과 남부지구 온양면, 동부지구 농소면과 강동면 등에서 빨치산이 활동했다.

 

울산 무장유격대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크고 활발한 부대는 남도부(본명 하준수) 부대였다. 동부지구 제4지구당으로 불렸던 남도부 부대는 신불산에 근거를 두고 많을 땐 240여 명의 병력이 활동했다. 제4지구당 3지대로 불린 대운산 김용구 부대와 두서면 전읍리 아미산에 거점을 둔 홍길동 부대를 합하면 울산의 무장유격대 수는 약 400명에 달했다.


한림대 아시아문제연구소가 1996년에 펴낸 <빨치산자료집>은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들에서 아미산 홍길동 부대의 출몰사례를 자세히 보여준다. 홍길동 부대는 1950년 12월 13일 울산군 태화리 도로에서 미군 수송차량 21대를 습격하고 사흘 뒤 토벌대와 교전을 벌인다. 1951년 3월엔 능동산과 감태봉에서 토벌대와 교전하고, 두서면 소호 뒷산에서 울산경찰서 토벌대를 습격한다. 5월 8일엔 울산-경주간 도로에서 미군 수송차량 5대를 습격하고, 5월 17일에도 울산-경주간 도로에 한 시간남짓 잠복해 지나가던 군용짚차 1대와 군용트럭 2대를 습격했다. 그해 5월에만 농소면 반용부락 뒷산, 이화리-약수간 도로, 울산읍 태화다리 부근 도로에서 토벌대와 미군 수송차량을 습격했다. 6월엔 강동면 신안리 도로에서 정자에서 오던 군 수송차량 2대를 습격했고, 신안부락에서 방위대를 공격했다. 7월 4일엔 운문고개에서 언양에서 오던 군 수송차량 2대를 습격하고, 7월 7일 정자 앞 도로에서 올산-포항간 정기버스를 세우고 선전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1월엔 울산-양산간 도로에서 군용트럭을 습격하고, 두서면 선필동에서 주둔 경찰을 습격했다.


군경은 1951년 12월 21일 신불산 작전을 시작으로 1952년 2월 대운산 작전, 6월 10일 아미산 작전 등 전면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김용구는 1952년 2월 2일 온양면 덕동에서 경찰 매복부대에 의해 사살됐다. 1953년 휴전협정 조인으로 한국전쟁은 종식됐지만 울산의 빨치산들은 그해 10월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홍길동이 월성군 내남면에서 사살된 뒤 빨치산 잔여세력은 울산지역에서 종적을 감췄다.

 

▲ 1954년 10월 16일 군법회의에서 남도부(하준수)에 대한 사형이 선고됐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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