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과 후계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 기사승인 : 2019-06-27 11: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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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산촌 통신

후계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쓴다면 후계자라는 용어고, 대체로 어떤 사람의 뒤를 잇는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에 쓰인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어떤 귀농자가 마을주민 아무개 씨의 논밭을 이어 농사를 짓는 경우 말이다. 농지를 이어가는 것이지 아무개 씨의 뒤를 잇는 후계는 아니다. 


귀농자들의 흔한 고민이 있다.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서 농사를 늘리고 기계를 사고 품을 산다. 도대체 내가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어쩌다 이렇게 쫓기며 사는 것인지, 어쩌다 단순소박한 삶을 벗어나 치닫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다. 몇 년 뒤에 만나면 대부분 농사가 줄어 있다. 늘려도 별 수 없었다면서 말이다. 어떤 선택이든 응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귀농은 후계다. 앞선 농(農)의 뒤를 잘 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앞의 일이 정상적이지 않다면 그것을 잇는 일도 비정상이 된다. 간단히 말해 앞의 일이 이어갈 만한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없는 오래된 농업경제구조는 비정상이다. 이걸 이어본 들 답이 없다. 비슷한 경우로, 귀농은 규모화·기계화라는 일반적인 패턴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가? 그 패턴은 지속가능한가? 귀농자가 뒤를 이을만한 훌륭한 패턴인가? 삶에 정답은 없지만, 시대는 의심해보아야 한다.


귀농은 정상과 비정상을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다. 내가 남은 생을 살고 뼈를 묻을 이 마을은 온갖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이어갈 만한 가치 있는 것들도 있고 전혀 아닌 것들도 있다. 이어가기는커녕 반드시 개혁해야 할 것들도 있다. 제초제 뿌리는 관행은 이어갈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마을의 질서라는 이름의 숨 막히는 관행은 어떨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귀농은 무엇의 후계인가? 모름지기 후계라면, 진선미(眞善美)라는 감각에 근거한 가치 충만한 것들의 후계여야 한다. 이어받을 만한 앞의 것은 미래다운 미래로 이어질 만한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귀농은 기존의 질서와 충돌할 수 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라는 반응은 어떤가? 도시적 무지에서 나올 수도 있다. 반면에 농촌에 만연한 무감각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어떤 것도 명쾌하지는 않다. 그렇게 밀고 당기면서, 깎고 깎이면서, 온전한 마을살이로 나아갈 뿐이다. 


귀농자는 아무개 씨의 후계자일 수 없고, ○○마을 전체의 후계자여야 옳다. 하지만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귀농자는 거의 없다. 심지어 마을 이장을 했더라도 그렇다. 마을이 그를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을이 부실해서도 아니다. 귀농은 대체로 개인의 문제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한 아이는 마을 전체가 키운다’는 말에는 동의하면서, ‘한 귀농자는 마을 전체의 후계자다’라는 말에 아직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러나 귀농과 마을이 서로를 축복하는 미래는 오고 있다고 믿는다. 


귀농은 마을을 향한 지 오래다. 수많은 착한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좋은 후계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하며 충실히 잇는 사람이다. 그 온고(溫故)의 과정에서 귀농자들은 오늘도 자신에게 물으면서 마을에게 물으면서, 7월의 풀을 뽑고 있다. 귀농은 무엇을 후계할 것인가?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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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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