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이르는 두 개의 관문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8-02 11: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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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식민의 기억을 지우고, 혁명의 기억을 지우고. 텐진

 

텐진(천진)은 바닷길을 통해 베이징에 이르는 관문이다. 따라서 텐진의 흥망성쇠는 예나 지금이나 베이징의 운명과 직결돼 있다. 13세기 몽골이 침입해 베이징을 수도로 삼자 텐진은 곡물의 집결지로 떠올랐다. 남방에서 생산된 곡물은 장강 물길을 따라 선적된 후, 바다를 통해 텐진까지 운반되고 거기서 다시 육로로 베이징까지 운반됐다.


19세기 텐진은 서방 국가들에게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무역항이었다. 1858년 텐진조약(제2차 아편전쟁)으로 텐진이 개항되자, 영국과 프랑스인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했고 잇따라 일본,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심지어 벨기에인들이 들어왔다. 20세기로 전환될 무렵 텐진은 ‘북쪽의 상하이’로 불릴 만큼 마치 유럽의 도시를 중국에 옮겨놓은 듯한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조차지였던 ‘황가예원(명원)’의 거리는 주택, 학교, 병원 등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어 과거 식민지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프랑스식 연철 대문과 신고딕 양식의 건축물은 마치 열병식에 나온 병사들처럼 정연하고 빼어난 모습이다. 유럽의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모퉁이를 돌아서면 런던의 거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텐진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혼성의 도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숨겨진 것을 찾아낼 때 비로소 눈이 열리고 아름답다. 골동품 시장이 있는 ‘구완스창’은 상인들이 골목길을 따라 곳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 골동품을 팔고 있다. 전시돼있는 물건들은 문화대혁명기에 정부에서 압수해 보관해 오던 것을 다시 시장에 내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다. 고문화 거리인 ‘구원화제’는 고대 중국의 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전통 건물 옆길에는 진흙 인형, 종이 공예품, 서예와 그림 등 다양한 물건들을 들고나온 상인들로 북적댄다.

 


‘서개천주교당’은 텐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1917년 프랑스인들이 지었다. 성당은 쌍둥이 돔 지붕을 이고 있는데 ‘빈장다오’(병강도) 남쪽 끝에 있다. 다행히 내가 방문한 날이 일요일이라서 미사 시간에 맞춰 조용히 성당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해하동로와 사자림대가 사이에 있는 ‘망해루교당’은 프랑스 사람들이 세웠지만 1870년 중국인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그 와중에 10명의 수녀가 희생된 곳이다. 그 후 청 왕조가 재건했지만 1900년 의화단에 의해 다시 파손됐다 1904년 다시 재건됐다.


텐진은 베이징, 상하이, 충칭과 같은 중국의 4대 직할시 가운데 하나다. 인구는 텐진시와 교외 지역의 인구까지 합쳐 전체 1000만 명이다. 텐진은 컵라면 ‘캉스프’와 만두 ‘꺼우뿌리 빠오쯔’가 유명하다. 꺼우뿌리 빠오쯔는 고기만두인데 느끼하지 않고 만두피가 얇아 매우 쫄깃하다. 꺼우뿌리 빠오쯔 만두가게는 100년 이상 됐다고 하는데 주인의 성이 특이하게도 ‘개’씨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텐진 시내 곳곳에 체인점이 있어 굳이 본점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나는 텐진 기차역에서 맛볼 수 있었다.

 


‘해하공원’에 왔다. 중국어로 ‘하이허’(해하) 강둑을 거닐다 보니 군데군데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새장을 들고 다니는 노인, 공원에 모여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과 가극 연습을 하는 사람 등 여유로운 모습이 넘쳐난다. 하이허 강변 산책로는 프랑스가 다리와 난간 공사를 맡아왔기 때문인지 이채로운 풍광이다. 하이허 강에는 ‘탕구’를 오가는 관광 유람선이 떠다니는데 주말과 명절 기간에만 운영된다고 한다. 


‘탕구의 대고포대’는 1858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불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했던 곳이다. 탕구는 텐진에서 50km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다. ‘대고포대’는 명나라 말기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텐진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다.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철제 대포들을 진열해 놓은 작은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입구는 편도 8차선 순환도로가 지나가는데 황당하게도 신호등이 없었다.

 

 

도로 가운데는 2중으로 펜스가 설치돼 있는데 대형 화물차와 트레일러가 쉴 새 없이 지나다녔다. 무단으로 건너기에는 너무 아찔해서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목숨을 내놓고 뛰어서 건너야 했다.


1856년 10월, 태평천국의 난이 한창일 때 홍콩을 출발한 중국인 소유의 ‘에로호’가 영국 국기를 달고 주강 입구를 지나다가, 청나라 해군 순찰대에 의해 나포된다. 당시 국제법에 문외한인 청나라 해군은 중국인 소유의 선박에 외국 국기가 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분노해 영국 국기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선원들을 구금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은 15년 전에 있었던 아편전쟁의 성과를 한층 더 충족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아편 밀수선 수색을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이었기에 제2차 아편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857년 12월, 영불 연합군 5600명은 광주 공격을 개시해 29일에 광주를 함락시킨다. 1858년 4월, 영불 연합군은 1차 아편전쟁 당시의 작전을 재현했다. 이들은 텐진에서 50km 떨어진 백하구 하구에 있는 대고포대를 점령했는데, 미국과 러시아 함대도 참관인 자격으로 따라와 싸움 구경을 한다. 


마침내 대고포대를 점령한 영불 연합군은 5월 30일에 텐진에 도착한다. 청나라 조정은 부랴부랴 흠차대신을 임명해 6월 26일 해광사에서 ‘텐진조약’을 맺게 된다. 텐진조약의 내용은 각국 외교 사절의 북경 상주, 기독교의 승인, 장강 중류 지역 및 기타 성에 무역항 증설, 각국 상선의 청나라 내륙 하천에서의 자유 항해 인정, 수입 관세율 인하, 군비 600만 냥 배상 등이었다.


한편, 당시 청나라 황제 함풍제는 가혹한 조약 내용과, 특히 서양 오랑캐의 외교 사절을 자신이 머무는 베이징에 상주시킨다는 조항을 용납할 수 없어서 비밀리에 반격을 지시한다. 텐진조약 체결 1년 후인 1859년 6월 17일 다시 대고포대 앞에 나타난 영불 연합군은 최초로 청국군에 의해 격퇴된다. 


이에 다음 해인 1860년 7월 말에 영국 군함 73척에 병력 1만8000명, 프랑스 군함 33척에 병력 6300명이 쳐들어와 8월 1일에 상륙을 개시한다.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친 것은 9월 22일이었고,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것은 10월 13일이었다.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입성이 늦어진 이유는 원명원의 약탈에 정신을 빠뜨려 전쟁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때 맺어진 가혹한 조약이 ‘북경조약’이다. 내용은 텐진조약을 추인하는 것이었으나, 텐진의 개항과 홍콩의 대안에 있는 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한다는 조항, 이 조약을 주선한 러시아에게는 연해주 지방을 넘겨주는 내용이 추가됐다. 이로써 청 제국은 오랫동안 걸어 잠근 문을 활짝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팔다리를 모두 잘라 서구 세력에게 나누어 주었다.


텐진 서쪽 교외에 있는 고택 ‘석가대원’을 찾아갔다. 석가대원은 청나라 때 텐진 8대 부자로 손꼽히던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인데,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의 무대가 된 곳이다. 고택 탐방은 늘 가슴이 설렌다. 누군가의 삶을 엿본다는 것. 시간의 흔적만큼 쌓인 언어와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또 하나의 여행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원리에 따라 지어진 중국의 주택은 갑갑하게 느껴질 만큼 폐쇄적이다. 도시를 둘러싼 큰 성곽 안에 작은 성곽처럼 집이 서 있고, 집 안쪽으로 들어서면 다시 각 방 앞에 겹겹이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마치 성냥갑 구조처럼 느껴진다. 석가대원은 건평이 2000평이고, 방이 무려 278칸에 이른다고 한다. 


호화로운 저택을 둘러보다가 집안 한가운데 설치된 극장을 발견했다. 중앙 홀에는 네모난 탁자가 마련돼 있어서 차를 마시면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인생>에서는 이 극장이 차를 파는 도박장으로 나온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주인공 ‘푸꾸이’는 노름빚으로 자신의 저택을 찻집 주인에게 넘기고 그림자극 도구가 든 상자를 받는다. 


<인생>은 중국 현대사의 비극, 1950년대 후반 대약진운동과 1960년 후반기 문화대혁명 기간에 푸꾸이에게 불어닥친 고난과 시련을 보여준다. 푸꾸이는 차례로 아들과 딸을 잃게 되지만 시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 탓이오’로 돌린다. 자식들의 죽음을 자신의 실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고 후회하는 푸꾸이. 아마도 장이머우 감독은 푸꾸이의 모습을 통해 평범한 중국인들의 자화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000년 동안 봉건시대를 겪었고, 봉건시대가 끝난 뒤에 국민당 독재와 공산당 독재 시대를 인내하며 묵직히 견뎌온 사람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그냥 견딜 수밖에 없다’, ‘개똥밭을 구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승이 낫다’라는 평범한 중국인들의 인생관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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