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4-24 11: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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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하남성, 위나라의 수도 허창

‘조조’는 본래 환관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승은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 관직이라야 보잘것없었다. 분무장군이라는 직함이 있었으나 ‘원소’가 준 것이었고 그마저도 대리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조의 포부와 안목, 지략은 대단했다. 원소가 ‘하진’ 대장군을 부추겨 ‘동탁’을 낙양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보고 조조는 웃으면서 말했다. “환관이 문제가 된 건 그 책임이 군주에게 있고, 그들의 죄를 다스리려면 우두머리를 주살하면 된다. 그것은 옥리 한 명이 맡아도 되는 일인데 왜 굳이 바깥의 장수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는 일찌감치 원소의 실패를 예측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천하18로군’으로 알려진 반동탁 연합군인 ‘관동연합군’이 막 조직되었을 때 조조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출병을 촉구하다가 여의치 않자 자신이 직접 부대를 이끌고 동탁에 맞서 싸우다 하마터면 자신의 목숨마저 잃을 뻔하게 된다.


조조가 돌아온 뒤에도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있는 ‘관동연합군’에게 실망하게 된다. 십만 명에 이르던 반동탁 연합군은 결성된 후 어떻게 하면 동탁을 타도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뜻을 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그의 시 ‘호리행’에서 이렇게 비꼬았다.
“관동에 의로운 이들 있어 흉한 무리를 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맹진에서 만나 처음 기약할 때 마음은 모두 임금 계신 도성에 있었으나 힘을 모음에 가지런하지 못하고 혹은 앞서고 혹은 머뭇거렸다. 세력과 이익 사람을 다투게 하고 끝내는 서로 죽이려 돌아섰다.”
조조는 명문세가의 헛된 명성만 믿고 설쳐대는 자들과는 무너져 가는 ‘한실 부흥’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먼저 자신의 세력을 키워 다시 천하를 도모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조조는 우선 ‘동군’과 ‘연주’를 차지했다. 연주는 오늘날 하남성 동부와 산동성 서남부 지역이다. 하지만 연주 땅은 아직 황건적의 수중에 있었다. 조조는 투항한 황건적의 무리들을 정비해 새롭게 부대를 꾸리는데 이를 ‘청주병’이라 불렀다. 청주병은 훗날 조조군의 주축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근거지와 병력이 해결되자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로 군량과 군수품이었다. 조조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둔전제’를 도입한 것이다. 오랜 전란으로 주인 없는 땅이 되어버린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고 병사들에게 나눠 주어 이를 경작시킨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위급할 때는 병사로 동원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병·농일치사회’였고 항구적 ‘전시동원체제’였다. 배고프면 백성들에게서 빼앗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약탈경제시대’에 둔전제의 실시란 조조가 만든 최고의 치적, 뛰어난 경제정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조는 인재의 발굴과 등용에 누구보다 앞서 나갔다. ‘순욱’은 본래 원소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소는 큰일을 이룰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했기에 원소 곁을 떠나 아직 동군태수에 불과한 조조를 찾아왔다. ‘정욱’은 조조가 연주에 왔을 때 부름을 받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인재에 목말라 있던 조조가 ‘순유’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은 천하가 어지러워 지혜로운 선비가 마음을 써야 할 때입니다. 선생께서 세상을 수수방관하신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순유는 즉시 조조 곁으로 왔다. ‘곽가’도 원소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이처럼 인재를 아끼고 쓸 줄 아는 조조에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렇게 조조가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딜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동탁이 여포의 손에 죽고 난 후 ‘이각’과 ‘곽사’를 비롯한 동탁의 옛 부하들이 다시 장안(서안)을 점령한다. 여포는 장안을 빠져나와 ‘남양의 원술’에게 몸을 의탁했다. ‘호랑이 없는 골에 늑대가 왕노릇 한다’고 이각과 곽사 두 마리 늑대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느라 정황이 없는 틈을 이용해 후한의 헌제는 장안을 빠져나와 낙양에 도착한다.


패권을 다투는 관동의 제후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천자를 받들라”는 책사 ‘모개’의 건의를 받아들인 조조는 득달같이 낙양에 입성해 헌제를 알현한다. 헌제는 감읍하여 조조에게 행정과 군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근거지에서 권위 없는 황제에 의지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때 조조의 최대 협력자이자 책사인 ‘등소’가 “조조의 근거지인 허창(쉬창)으로 황제를 모셔가라”고 건의한다.


조조는 그 계책에 따라 황제를 허창으로 데려갔다. 천자는 조칙을 내려 조조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무평후에 봉했다. 위청과 왕망, 양기, 하진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장군은 한무제 이후 한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지위였다. 이로써 조조는 ‘천자를 받드는’ 정통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원소와는 북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다.


후한의 마지막 수도 ‘허도’(허창)를 찾아갔다. 소림사가 있는 덩펑에서 버스로 이동하는데 3시간이 걸렸다. 최근 허창시 인민정부는 후한의 마지막 수도였던 ‘허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허창시 중심가에 ‘조승상부’를 재현해 놓았다.


정문을 들어서자, 오른쪽 담벼락에 조조가 오환족을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 새겨진 동판이 나온다. 유명한 한시, ‘관창해’다.

觀滄海(관창해) /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東臨碣石(동림갈석) 동쪽의 갈석산에서
以觀滄海(이관창해) 창해를 바라보니
水何澹澹(수하담담) 바다는 언제나 힘차게 출렁이는가
山島竦峙(산도송치) 섬들엔 산들이 우뚝 솟아 있네
樹木叢生(수목총생) 수목은 빽빽히 자라고
百草豐茂(백초풍무) 풀들은 무성하다
秋風蕭瑟(추풍소슬) 가을바람 소슬한 가운데
洪波湧起(홍파용기) 거대한 물결이 용솟음친다
日月之行(일월지행) 해와 달이 마치
若出其中(약출기중) 저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성한찬란) 찬란한 은하수도
若出其裏(약출기리) 저 속에서 펼쳐져 나오는 듯
幸甚至哉(행심지재 지극히 기쁘구나
歌以詠志(가이영지) 내 뜻을 노래하리

 


조승상부는, 물론 역사적 고증이야 거쳤겠지만 최근에 재현해 놓은 짝퉁이라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삼국시대의 세력 판도와 각종 전투에서의 형세, 조조 휘하의 장수들과 책사들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영현당’, ‘구현령’을 지나 오른편에 ‘조조운병도’라고 쓰여진 지하통로가 나온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병사들의 이동을 노출 시키지 않기 위해 파놓은 지하통로인데 자그만치 7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700미터다. 모두 벽돌로 지하통로를 쌓았고, 적의 습격에 대비해 곳곳에 함정을 파 놓았으며, 병사들이 쉴 곳과 식량 창고 등 마치 땅 위의 병영 시설을 그대로 지하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조조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허창이 얼마나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천하를 주관하는 수도로서 위상과 기능을 갖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춘추루’는 조조가 관우에게 준 집이다. ‘서주 전투’'에서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그의 삼형제는 서로 생사도 모른 채 뿔뿔이 흩어진다. 장비는 망탕산에 들어가 산적이 되었고,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때 하비성을 홀로 지키느라 싸움에 참가하지 못했던 관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아니다, 유비의 두 부인(형수)을 극진히 예우해야 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알면 즉시 떠나겠다”는 조건으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관우를 극진히 아꼈던 조조는 집만 준 것이 아니라 각종 보물과 미녀, 직위를 내려 관우를 회유하지만 관우는 조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본래 춘추루는 원나라 때 처음 지어졌고 청나라 강희제가 다시 중축했다. 전문을 들어서자 왼쪽에 고루가 나오고 오른쪽에 종루가 서 있다. 대대로 중국의 건축양식은 대칭이다. ‘관택’이라 쓰인 본관 건물 앞에 작은 비석이 대칭으로 서 있는데, 왼편의 비석에 있는 그림이 당나라 때 유명한 화가가 그린 ‘관우상’이라는데 문화대혁명 때 파손됐는지 시멘트로 성의 없이 쓱쓱 발라 놓았다. 오른쪽 비석은 관우가 유비에게 보낸 대나무 편지 ‘사죽도’다. 편지의 내용은 마모되어 알아볼 길이 없다. 문 기둥에는 ‘심동일원의동천’과 ‘지재춘추공재한’이 양쪽으로 쓰여 있다. “마음은 해와 달과 같으며 의리는 하늘과 같다.” 관택 안에는 <춘추>를 읽고 있는 관우 동상이 있다.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틈나는 대로 춘추를 읽던 관우의 모습이 잘 형상화된 것 같다.

 


춘추루의 맨 뒤채 건물은 ‘관성전’이다. 신격화된 관우의 위상 때문인지 숨 막힐 정도로 건물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계단을 올라가면 전각이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관우가 쓰던 ‘청룡언월도’가 비치돼 있다. 무게가 25킬로그램이다. 관우가 쓰던 무게와 동일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말을 타고 쓰는 무기라고 해도 너무 크고 무겁다. 청룡언월도를 손에 쥐고 재어보니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크기다. 천하장사 강호동이나 최용만이 사용한다 해도 한 번 휘두르고 나면 자세가 흐트러지게 돼 있다. 실전에서 폼세를 잃으면 싸움은 끝이다.


관성전은 밖에서 볼 때는 3층 건물인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자 뻥 뚫린 단층 건물이다. 관우상은 구리로 만들었는데 자그마치 높이가 15미터이며 건물 전체를 꽉 채우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건물 안 층계를 이용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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