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를 튼튼하게 하고 가지를 쇠약하게 만든다(강건약지)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3-20 11: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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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에 비견되는 송나라

 

고대 중국인들은 역사를 매우 중요시했다. 중국에서는 훌륭한 역사 학자가 많이 배출됐지만 그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것은 한나라 때의 '사마천'과 복송의 '사마광'이라 할 수 있다. 사마광은 옛 역사책에서 국가의 흥망과 백성들의 화복에 영향을 끼친 사건을 발췌해 이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통사를 편찬한다.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고 정사를 보살필 때 귀감이 될 만한 역사에서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이 통사의 책명은 <자치통감>이다. 사마광이 이 책을 저술하는 데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송나라 때 와서 한·당 이래 유학 경전의 해석만을 일삼던 훈고학에서 벗어나 보다 깊은 철학적 고찰을 통해 우주와 인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 일어난다. 북송의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의 뒤를 이어 남송 시대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이를 성리학이라고 한다. 주희는 생전에 지배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가 죽은 후에 새로운 평가를 받았다. 주희의 위패는 공자묘에 모셔졌고, 주희가 주석을 달은 사서는 과거시험의 표준으로 삼는 교과서가 되었다.


소식(호 동파)은 21세 때, 차석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소식의 과거 급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과거의 주임 시험관은 당대의 대문호 구양수였다. 소식의 답안지는 호방하고 소탈해 구양수를 매료시켰다. 하지만 구양수는 이 답안지가 자신의 수제자인 ‘증공’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차마 자기 제자를 장원으로 뽑을 수 없는지라 차석으로 밀어 내렸다. 당시의 과거시험 답안지는 수험자의 성명이 밀봉돼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후 소식의 생애는 관직으로서는 불우했으나 문인으로서는 대성했다. 소식은 산문과 시에서 많은 걸작을 남겼지만 그의 진가는 ‘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적벽회고’와 ‘전적벽부’, ‘후적벽부’등은 지금까지도 문사들에게 암송되는 명문이다.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식, 소철, 소순, 증공, 왕안석은 ‘당송팔대가’로 찬연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당나라(618~907)가 멸망한 후 송나라(960~1127)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중원 지역은 분열과 혼란의 시기였다. 북중국 중원에서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5왕조가 교체되면서 이어졌고 이와 때를 같이 해 중국의 남부와 산서 일대에서는 주로 당나라 말기의 절도사들이 세운 10왕조가 존속하는데 역사상 이를 ‘5대10국’이라 불렀다. 중원의 후주는 세종을 거쳐 3대 공제 때인 960년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에게 멸망함으로써 5대10국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일본의 사학자 나이토는 1950년 출간된 그의 저서 <동양의 근세>에서 당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중세사회가 송나라 때 이르러 근대로 전환됐으며 송나라 시기를 유럽사의 르네상스기에 비유했다. 이러한 시대구분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더라도 중국사에서 당나라 말기와 5대10국 의 분열과 혼란기를 수습하며 다시 한번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 시기가 현저한 변혁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장 큰 변화는 균전제의 붕괴와 함께 지주전호제 사회로 이행하면서 강력한 황제 권력에 의한 관료정치 체제가 확립된 것이었다. 귀족계급은 몰락해 힘을 잃었고, 신흥 지주층인 형세호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관료로 대거 등장하게 된다. 이들 형세호는 면역의 특권을 이용해 토지 소유를 확대했고 이들 토지는 대규모 장원을 형성하며 경영된다. 벌써 북송 초기부터 ‘천하의 경작지 절반을 형세호가 차지하고 있다’고 할 만큼 형세호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관료체제를 뒷받침한 것은 과거시험이었고, 과거시험의 주요 응시자는 형세호, 즉 지주계급의 자제들이었다. 이들 ‘사인층’이야말로 송나라 황제 권력의 핵심 기반이었다.


송나라 초기에 과거시험은 진사과와 제과가 있었다. 우선 각 지방별로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중앙의 예부로 보낸다. ‘예부 공원’에서는 이들 공거인(합격자)을 대상으로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해 2차 합격자 명단을 성적순으로 게시했다. 이것을 ‘방을 내건다’고 하는데 예부 공원에서 치르는 2차 시험을 ‘성시’라 했다.

 


이렇게 성시를 통과한 합격자 10명과 낙제자 16명을 선발해 황제가 친히 시험을 보는 것을 ‘어시’ 또는 ‘전시’라고 했다. 북송 시기 태조와 태종 때 처음 시행된 이와 같은 과거제는 남송 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과거는 보통 3년에 1회씩 치렀다. 그런데 시부에 능한 자는 강남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강남 출신자가 진사에 많이 합격했다.


송나라는 시종일관 무신을 철저히 통제하고 문신을 등용했다. 송 태조 조광윤은 병권, 민정권, 재정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각주에 파견된 절도사를 경계했는데 이러한 ‘절도사 체제의 해체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수립’은 송나라가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핵심 기제였다. 송 태조는 가장 먼저 절도사들에게 부여된 병권과 민정권, 재정권을 박탈해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는 작업부터 하나씩 진행한다. 절도사의 권한은 작게 나뉘어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문신으로 대체됐다. 심지어 진종 이후부터는 군령을 관장하는 추밀사까지 문신으로 충임했고 무신들의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하지만 황족들의 무신 가문과의 통혼을 적극 권장했고, 외척에게는 무관직을 내려 무신들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황제들은 무신 관료의 임용과 승진을 직접 관장해 무신들을 포용했다.


그리하여 인종대에 이르러 송나라는 큰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42년에 이르는 인종의 치세 기간 긴 평화가 찾아왔으며, 위로는 어진 임금이 있고 명신으로 한기, 범중엄, 부필, 구양수, 사마광 등 이름난 선비에 호원, 손복, 석개, 주돈이, 소옹, 장재 같은 문호에다가 구양수, 증공, 소순, 매요신 등의 인재가 배출돼 북송의 전성기라 불리는 ‘경력의 치’를 구가할 수 있었다.


불교는 선종이 크게 융성했고 도교도 성행했으며 특히 유교는 주자학이 생겨나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사상계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밖에 과학기술 영역에서는 활자인쇄 등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침반을 이용해 항해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화약제조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쟁에도 활용됐다. 송나라 때에는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중국 회화사에서 송대의 회화는 역대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송나라는 초기부터 화원을 설치하고 관직을 둬 화가를 양성했다. 또한 역대 송의 황제들은 예술 애호가들이 많았는데 휘종 때 극에 달해 화원이 성황을 이루었다.


송대는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도 중국의 최고봉이었다. 이중 ‘정요’와 ‘여요’가 유명한데 정요 자기는 정주에서 구운 것으로 백자가 주를 이루었고 여요는 하남성 여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담청색이었다.


그러나 인종의 치세 중반기부터 세출 증가율이 세입 증가율을 웃돌기 시작하자 곧바로 국가의 재정 적자가 쌓여가기 시작했고 위기가 닥쳐왔다. 북송 중기에 서하와 전쟁을 벌이면서 병사의 수가 급증해 50만 명을 넘게 됐고 이 방대한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비는 재정을 심하게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1045년 대서하 전쟁에 투입된 송나라 병사의 숫자만 일시에 40만 명이 늘어났고, 여기에 세비는 2천만 민이 늘었다.


또 하나 송나라 재정지출을 팽창시킨 원인은 과도한 관리의 증원과 용관 때문이었다. 송나라는 관리의 급여가 다른 왕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던 데다가 관리의 수가 많았다. 관직에서 은퇴한 관리들에게는 봉급의 반액을 주던 관례를 깨고 전액을 지불했다. 이 외에 요와 서하에게 보내는 세폐가 있었지만 그 액수는 북송의 재정 규모에서 보면 그다지 큰 액수는 아니었다.


북송의 제6대 황제 신종은 국가재정 위기를 해소하고, 관호, 형세호의 수탈을 억눌러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선대 황제 인종 때의 명신 왕안석을 등용해 ‘신법’을 시행한다. 1069년 왕안석이 입안해 시행된 ‘청묘법’, ‘면역법’, ‘방전균세법’은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농전수리법’과 ‘어전법’은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균수법’과 ‘시역법’은 대상인을 억누르고 그들이 취한 이익을 정부로 흡수하고자 한 것이다.


신법은 모두 당대의 관호와 형세호의 이익과 반대되는 정책이었다. 왕안석이 신법의 발의자라면 구법을 대표하는 정치가는 사마광이었다. 그 외에도 신법을 반대한 인물로는 소동파와 구양수 등이 있었고, 신법을 반대하는 주축 세력은 고급 관료와 외척, 주로 황제의 측근들이었다.

 


신종이 죽자 북송의 정치지형은 신법당과 기성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법당으로 나뉘어 다섯 차례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게 되면서 정치는 다시 문란해진다. 1102년 휘종은 신법당의 채경을 재상으로 등용했고 채경은 다시 신법을 실시한다. 채경은 비록 신법당 출신이었으나 풍류남아였던 휘종의 비위만 맞출 뿐 환관과 결탁해 가혹한 정치를 펼쳤다. 그는 구법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다. 채경과 환관들의 발호와 전횡에 따라 북송은 금나라가 침입하기 전에 이미 수습 불가능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휘종은 정치는 채경에게 맡겨둔 채 자신은 도교를 받들고 예술을 숭상했으며, 오로지 화단 가꾸는 일에만 몰두한 풍류남아였다. 강남의 진귀한 꽃과 돌을 수도로 옮기는 일에 강남의 백성들을 대거 동원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본래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해 대외적으로는 북방의 요와 서하에게 압박을 받았고 세력을 크게 떨치지 못했다. 이 무렵 중국 동북변에서는 여진 완안 부족이 흥기해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북송 말에는 화북의 ‘송강의 난’과 강남의 ‘방랍의 난’이 일어난다. 중국에서는 이들 반란을 ‘기의’라고 한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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