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 기사승인 : 2020-07-02 11: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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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언젠가부터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유수의 문학상 수상자 명단에서 대거 볼 수 있게 됐다. 장르의 폭도 점점 넓어져 읽는 재미가 상당하기에 작품이 출간되면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구매해 읽는 편이다. 최근 좋아하는 작가의 따끈한 신작이 출간됐다. 그림으로 치면 ‘정세랑 풍’이라고나 할까, 정세랑 작가만의 뚜렷한 특징이 망라된 <시선으로부터,>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난감 칼을 든 퇴마사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5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피프티 피플>, 소설 속 죽음의 순간이 타투로 새겨지는 <덧니가 보고 싶어>, 외계인과의 사랑을 그린 <지구에서 한아뿐>,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대사 “옥상으로 따라와”와 결이 다른 옥상을 보여주는 <옥상에서 만나요>, 본격 SF 장르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께요>까지. 정세랑의 작품을 읽으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져 특정 집단에겐 전혀 갖고 있지 않던 인류애마저 생기려 한다. 


일전에 원로 문학 평론가가 최근 문학에는 이념과 같은 거대 서사가 빠져있다고 평한 기사를 보고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오독일지 모르겠으나, 최근 여성 작가들과 퀴어 장르 남성 작가들의 부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대하소설처럼 소설의 길이에 염두에 두고 한 얘기라면 <시선으로부터,>도 3대(代)에 걸쳐 있으며 질곡의 현대사가 담긴 이야기라고 작게 대거리하고 싶다. 물론 <토지>, <태백산맥>, <혼불>과 같은 대작이 탄생하지 않음에 따른 안타까움이야 십분 이해한다만, 이념(시대)의 소용돌이에 매몰되는 개인이 아닌 다양한 주체의 등장은 문학계의 진일보가 아닐까 싶다.


<시선으로부터,>는 시선의 자손들이 하와이에서 그녀의 10주기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다(해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세태를 개탄하거나 풍자하는 유교걸의 시선이 전혀 담겨있지 않음을 우선 알려둔다). 하와이를 여행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제사상을 차리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시선의 자손들은 각자 시선과의 에피소드를 회고하며, 이렇게나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모두 자신이 시선으로부터 단단히 이어져왔음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퍼즐 맞추듯 드러나는 시선의 일대기는 마냥 순탄치만은 않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지만, 만약 시선의 가족들이 한국전쟁 중 학살당하지 않았다면 시선은 하와이로 이주했을까? 만약 시선이 하와이에서 마티아스 마우어(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나쁜 놈)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선의 “기세 좋은 딸”들의 뿌리에는 이념 전쟁 중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에 대한 비극적인 폭력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제국주의의 지독한 편견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디지털 성범죄, 여성혐오 범죄, 가스라이팅 등 묵직한 주제들도 다루는데 작가의 말처럼 보물찾기하듯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시선이 유일한 아들 명준에게 어떤 남자가 돼야 하는지 덩치 큰 개에게 배우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 깊은데, 내게도 아들이 있다면 꼭 저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른 호흡으로 책장을 넘기다 마지막장을 덮으며 떠오른 느낌은 한마디로 “역시는 역시!” 


덧붙여 1997년 개봉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지 않았다면 꼭 함께 보기를 추천한다.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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