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 부자 못지않았던 언양 최 부자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기사승인 : 2020-07-02 11:20:50
  • -
  • +
  • 인쇄
지난날의 울산

먼저 이 글은 엄형섭 부산대 한문학과 강사가 <지역문화연구> 제7호(2019)에 번역해 발표한 ‘<학음산고(鶴陰散稿)> 속 울산 이야기’ 4편 중 1편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인용해 요약한 것이다. 이는 지난 4월, ‘함월산의 여우 사냥’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다.


참고로 <학음산고>는 울산도호부사를 지냈던 심원열(1792~1866)의 문집이다. 심원열은 언양의 최 부자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 씨는 일찍이 시내[천(川)]를 막아 문 앞의 논으로 물을 끌어들여 해마다 300석을 거뒀다. 당초에 큰 시내를 막을 때, 최 씨가 마을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해 술을 권하고 밥을 먹이고 나무를 해서 섶을 만들어 꽂고 흙을 쌓았는데, 이것이 제방이 됐다.


제방 막은 그 물을 논에 대어 해마다 가을이 되면 큰 풍년이 들었다. 그러면 그 많은 곡식을 수레에 가득 싣고 소달구지를 이용해 실어 왔다. 벼를 찧어 술을 빚고, 닭과 개를 찌고 삶고, 동산의 밤과 대추도 소반에 올려 안주로 삼아서 최 씨와 일꾼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열어 서로 봄부터 해온 일의 수고로움을 말했는데, 해마다 이와 같았다.


최 씨가 제방을 쌓는 데 부지런했기 때문에 논이 마침내 완전해졌고, 해마다 곡식을 많이 거둬 굶주리는 근심이 없어졌다. 늘그막의 큰 복은 세상에 다툴만한 자가 없었고, 백발이 성성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최 노인장’이라 불렀다. 어린 손자가 집에 가득해 절로 엿을 입에 물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즐거움이 있었고, 뜰에 흩어진 닭과 돼지는 모두 노인을 봉양하는 꺼리가 되었다. 뽕과 삼이 늘어선 울타리는 가지런하게 법도가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최 노인장의 집’이라 했다.


최 노인이 나이 70세를 넘긴 어느 날, 그의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답답한 기운이 있으니 나를 내가 사랑하는 제방 밑에 데려다 주구려.” 그의 아내가 그의 말대로 시냇가에 데려갔다. 그러자 최 노인이 옷을 모두 벗고 시내에 몸을 던졌는데, 잠시 사이에 큰 이무기로 변해 제방의 섶 속으로 들어가더니, 그 아내를 한 번 돌아보고 홀연히 사라졌다.


3년 뒤에 최 노인의 아내도 시냇가로 가서 옷을 벗고 역시 이무기가 돼 시냇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최 씨 부부가 변한 큰 이무기 한 쌍이 마침내 시냇물의 범람을 막아주는 신(神)이 됐다. 마을 사람들도 신령하게 여겨 제사 지내고 기도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비록 큰 비가 내리더라도 제방은 무너지지 않았고, 비록 시냇물을 막는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시냇물이 범람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시냇물을 막은 일은 하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제방 아래의 논은 더욱 완전해 지금까지도 칭찬이 자자하다.


최 노인의 자손이 면면히 이어져서 시냇가에 줄지어 살고 있다. 그런데 논의 절반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됐고, 절반은 최 노인 집안의 소유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대 부자들 중에 이른바 ‘경주 최 부자’가 유명하지만, ‘언양 최 부자’는 살아서 제방을 쌓아 큰 풍년이 들게 하고, 죽어서 주민들이 더 이상 제방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진정한 부자였다. 


이제 이 이야기 속의 최 노인장과 그 제방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언양은 지금의 언양읍만을 가리키지 않으므로 경주최씨의 세거지였던 삼남면 방기리 상방마을과 상북면 소호리 와리마을 등을 시작으로 현지조사를 진행하고, 문헌조사를 병행하면 의외로 쉽게 찾을 수도 있다. 반드시 그 제방을 찾아 ‘최〇〇보(洑)’라고 명명하고, 공덕비를 세워 그의 애민 정신을 기려야 할 것이다.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