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김루 시인 / 기사승인 : 2019-08-29 1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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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기적// 병실 창밖의 먼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네// 그 후로 노을이 몇 번 더 졌을 뿐인데 / 나는 그의 이른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것 같아도/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고/ 점자를 읽듯/ 아직 불빛을 만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한집으로 모여든다 –심재휘 시인(1997년 시, <작가세계> 등단. 2019년 제1회 김종철 문학상 수상)


시를 읽는 동안 카톡으로 사진이 전송돼 왔다. 노을이다. 오로라 같은 노을들이 내 품으로 날아든 저녁.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된 것에 감사한다. 살아오면서 ‘기적’의 요행을 바랐던 적이 나는 몇 번이나 있었을까?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스칠 일들뿐이다. 


단 한 번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었던 적이 있었다면 작년 이맘때다. 스물여섯, 꽃다운 청춘이 별이 되어가는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었다. 이건 꿈이었으면, 그냥 끔찍한 악몽이라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모두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허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이모라 불렀던 그 친구는 태어날 때부터 한 지붕 아래서 한 가족처럼 자란 친구다. 그런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구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게 이유였다. 칼을 휘두른 친구는 죽은 친구보다 성적도 우수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취업을 앞두고 예민해져 그런 것일까, 술자리를 끝낸 뒤 친구 집을 찾아가 그는 괴물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범행을 사전 검색까지 했다는 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우린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기적이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란 걸 우린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목이 메는 구절이다.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또 견디는 이 하루가 기적이다. 적어도 그 아이의 엄마에겐 그렇다. 재판을 지켜보면서 놀라웠던 사실은 그 아이의 부모였다. 죽임을 당한 아이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주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오로지 용서가 먼저였다. 끊임없이 그들은 용서만을 요구해 왔다. 가장 공정한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기도가 있다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니라 ‘우리 죄를 벌하시어’로 바꾸고 싶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 배려하는 일이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만큼 어려운 것인가. 노을을 품에 안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울적해진 저녁. 등이 구부정한 노모는 부추 전을 구워 막걸리 한 잔을 건넨다. 이 저녁 노모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막걸리가 기적이구나. 기적이 멀리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내팽개쳐 둔 기적을 꺼내 어머니께 술 한 잔을 올리며 나는 웃는다. 엄마 노을 사진 함 보실래요. 머리 맞대고 보는 노을이 아름답기만 하다.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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