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야산대 아니면 보도연맹원으로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3-20 11: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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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올해는 10년 단위로 끊어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억해왔던 주요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기,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70년. 그 중 한국전쟁은 그 뒤에 벌어진 수 많은 사건들과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 해방을 맞이한 1945년부터 만 5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초기 왜 수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다가올 미래를 포함해 시간적 위치를 찍는 좌표가 찍혀 있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 새롭게 출발하려면 직시해야 할 순간이다.

더구나 울산은 한국전쟁 발발 뒤 3개월 안에 최소 87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는 국가기구에서 공식 조사해 발표한 결과지만 ‘언제, 왜, 어떻게’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게다가 학살이 빚어낸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시민사회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1945년 해방 후 울산부터 1950년 한국전쟁 기간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의 해법을 찾아가고자 한다.<편집자 주>

 


미군정은 친일경력을 지닌 행정 관료와 경찰을 축출하지 않고 자리를 유지시키면서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지역에 대해 압박을 시작했다. 경제정책에서도 농민위원회, 농민동맹 등을 거쳐 1945년 12월 8일 결성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요구와 전혀 다르게 진행했다. 농민들의 요구는 “친일파 토지 몰수, 적산 국유화, 토지 무상분배”였지만 미군정의 정책은 결국 친일파 대지주의 기득권을 그대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은 ‘신조선회사’를 설립해 일제강점기 동양척식회사를 승계하도록 했다. 이 회사는 미군정 산하 공기업으로 1946년 2월 ‘신한공사(新韓公社)’로 이름을 바꿨다. 1945년 12월 6일 미군정이 제정한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따라 38도선 남쪽의 일본인 재산, 즉 적산(敵産)이 미군정청 소유로 바뀌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신한공사가 관리한 토지는 남한 내 전체 경지면적의 13.4%에 달했고, 쌀 생산량도 전체 생산량의 25%에 이르렀다. 중앙 5부와 6개 지점 그리고 도마다 25~30개 현지사무소가 운영됐고, 전체 직원이 6000여 명을 넘었다. 하지만 생산량의 3분의 1을 소작료로 높게 매겨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더구나 계약기간을 1년으로 하고 성적이 불량하면 소작권을 취소하는 조치를 취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소작료를 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개혁은 계속 지연됐다. 참고로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나온 ‘유상매수, 무상분배’조차도 통과되지 못한 채 흘러가다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위한 1948년 5.10 총선을 한 달 앞둔 4월 8일부터 토지 매매에 나서게 됐다. 이는 농민들이 총선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단독 총선 이후에는 유상매수, 유상분배로 귀결됐다.


토지문제만큼 심각했던 것은 미군정이 펼친 식량정책이었다. 기본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미군정은 자유매매·자유곡가제를 실시하면서 식량에 대한 합리적인 통제가 아니라 매우 즉흥적인 방임 정책을 펼쳤다. 경제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때에 식량 통제에서 손을 떼버리자 일시에 혼란으로 치닫게 된다. 무엇보다 쌀에 대한 매점매석이 벌어지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아예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제대로 된 식량 배분은커녕 최소한의 배분도 없어진 쌀 부족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 미군정은 1946년 2월 ‘미곡수집령’을 꺼내들어 강제수집에 나섰는데 시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식량 공출처럼 강제 할당된 수집이 이뤄졌다. 이런 상황은 일제강점기를 연상시켰고 해방정국에서 농민들의 분노가 커지는 계기가 됐다. 도시주민들 역시 부족한 식량배급 정책으로 불만이 커졌다. 식량배급 정책에 대한 불만은 1946년에 발생했던 9월 총파업과 대구에서 벌어진 10월 항쟁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정치에서도 미군정은 1946년과 1947년 2년 동안 우익세력을 지원했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계열에 노골적인 탄압을 가했다. 조선공산당은 미군정 초기는 협조노선을 펼치며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으나, ‘정판사위폐사건’ 이후 미군정에 대해 자위와 방어를 위한 물리력 사용을 포함하는 ‘신전술’로 전환했다.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이 합당한 남로당은 초대 당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합법대중정당으로 출발했지만, 1947년 5월 여운형이 탈당한 후 2대 당수가 허헌으로 바뀌자 바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1947년 8월과 9월에 걸쳐 중앙과 지방행정기관 등에서 ‘남로당 세포사건’, ‘적화사건’ 등 검거선풍으로 670여 명이 체포됐다. 삼당합당으로 결성한 남조선로동당은 1947년 8월 미군정의 대규모 검거작전에 맞서며 합법적 대중투쟁전술을 완전히 버리고 반합법, 비합법 투쟁전술로 전환한다. 


미군정의 남로당 공격은 1947년 11월 5일 군정청이 발표한 ‘시국대책요강(時局對策要綱)’을 보면 어떻게 짜였는지 알 수 있다. 군정청은 요강에서 남한의 정치사회가 ‘군정에 협력하는 애국적·친미적·건설적 진영 대 반민족적·반군정적·반미적·파괴적 진영’으로 양분돼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정치적 숙청을 통해 후자를 배제하고 난 뒤 좌우중간의 노선이 정당하게 구획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제 남쪽 사회주의 세력은 몇 가지로 줄어든 선택지에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그것은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과 1949년에 이르면 세 가지 상황으로 크게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월북과 야산대 아니면 보도연맹 가입이다. 울산 역시 이런 상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 미군정청 식량 포스터. 국사편찬위원회


월북

조선공산당 당대표였던 박헌영이 다섯 번째로 월북해 평양에 도착한 날은 1946년 10월 6일이다.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1946년 9월 26일 서울에서 출발한 뒤 10일 만에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관술의 여동생 이순금(1912~?)도 월북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헌영은 개성에 가서 일주일 머물다 다시 평양으로 올라왔는데 11월 5일에는 서울에 남아있던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들을 이북으로 불러들여 남북 지도자들의 합동연석회의를 열었다. 이때 이승엽, 허성택 등을 포함한 남한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 함께 월북했다.


이순금은 울산 언양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동덕여고보 재학 중 1929년 학생독립운동을 시작으로 ‘반제동맹’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콤그룹’에 참가했던 걸출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부녀총동맹’과 남조선로동당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다. 동지이자 혈육인 이관술이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체포된 상황에서 구명활동을 펼쳤지만 여의치 않았던 것도 월북의 주된 이유였다. 


이순금 뿐 아니라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중 해방 후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이들이 여럿 있다. 먼저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 활동을 이끌었던 고원우가 있다. 고원우가 월북을 결심한 것은 미군정의 탄압이 컸기 때문이다. 농민운동을 벌이는 동안 그는 여러 번 미군정청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전향 압박도 계속됐다. 결국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1948년 가족과 재산을 모두 남겨둔 채 월북했다.


일제강점기 신간회울산지회와 울산청년동맹을 주도했던 강철(1899~?)은 보다 앞서 월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철과 함께 해방 울산에서 건준과 인민위원회에서 활약했던 박두복의 아들 박진수의 증언이 있다. 박진수는 1946년 지금의 양사초등학교 건너 편 적산건물에 함께 살았는데 어른들이 강철의 아들(강내연)을 먼저 북으로 보내자고 상의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그 뒤 강철의 행적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그 시기 월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언양 출신 문학인이자 극작가인 신고송(1907~?)은 1946년 봄 북조선문학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할 때 박세영, 송영, 이동규 등과 월북해 내려오지 않고 북에 남았다. ‘금광왕’으로 불리며 울산의 대표적인 부자이자 사업가로 꼽혔던 이종만(1885~1977)은 북으로 올라가 고위직까지 오른 경우다. 1949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 김일성이 ‘애국기업가’로 치하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북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는데 특히 이종만은 북한 열사릉에 안장될 만큼 존중받았다.


방어진 출신 김천해(1898~?)는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을 이끌며 장기간 옥고를 겪고 해방 후에 석방된 뒤 일본에서 북으로 곧장 월북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이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김천해다. 일본 공안당국 자료에 따르면 그는 한국전쟁 발발 5일 전 원산으로 향하는 밀항선을 탔다고 한다. 박두복은 남로당 오르그(조직) 책임자로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석방된 뒤 월북했다. 


해방 공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월북한 이도 있다. 배기철(1913~?)은 천석꾼 부호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해방 후 조봉암, 강정택(1907~?) 등과 함께 농지개혁을 이끌었다. 1948년 9월 7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에서 분배과장이라는 실무를 책임졌다. 고향선배 강정택이 농림부차관인 것도 인연이 됐다. 강정택은 농업정책연구 최고권위자였으며 사회주의계열이 주도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농업문제연구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농림부장관 조봉암은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기 전 1949년 2월 22일에 해임됐고, 차관 강정택도 같은 날 사표를 제출했다. 


강정택은 한국전쟁 기간 납북됐다고 전해지나 그의 이력 때문에 월북이란 입장도 나온다. 배기철은 이런 과정에 영향을 받아 1950년 4월경 가족을 남기고 자진 월북했는데 농업실무를 맡았던 과장 윤택중, 안창수 등도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 울산 출신 월북 인사. 왼쪽부터 이순금, 김천해, 신고송, 이종만


일제강점기 신간회, 청년운동, 교육운동에 앞장섰던 조형진은 해방 후 부산에서 부서장까지 지냈다. 그는 일제강점기 북풍회를 이끌었고 해방 후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약수와 오랜 인연이 있어 정치 행보를 함께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수감됐던 김약수가 한국전쟁 중 월북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밖에 1949년 울산보도연맹위원장을 맡았던 김상헌(1893~1950)은 <울산광역시사>에서 월북자로 적고 있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울산지역 민간인학살을 조사하면서 김상헌이 1950년 8월 울산보도연맹 학살 때 사살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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