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의 마지막 수도 안양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2-27 11: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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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문자의 시작, 은허 갑골문

 

 

1920~30년대 중국 학계를 풍미했던 ‘고사변파’는 3황5제와 ‘하나라’(BC 2100~BC 1600)는 말할 것도 없고 ‘상나라’(BC 1600~BC 1046)와 ‘주나라’(BC 1027~BC 256) 초기까지의 역사는 믿을 바가 못 된다고 단정했다. 당시 ‘고사변파’의 이와 같은 견해를 이끌었던 주인공은 1917년 27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북경대 교수로 취임한 ‘호적’이었다.


당초 사마천은 그가 저술한 <사기>에서 ‘12제후연표’를 통해 주나라의 주여왕이 백성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쫓겨나면서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등장했던 ‘공위시대’를 ‘공화시대’로 규정했고, 공화시대가 개막하는 공화 원년(BC 841년)부터 연대를 기입하기 시작했었다. 호적은 <사기>의 ‘12제후연표’를 근거로 즉위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주여왕의 아들 주선왕이 즉위한, BC 828년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주왕조는 주평왕대에 이르러 견웅의 침입에 의해 도성인 호경이 함락되고 불타게 되자 기원전 770년에 동쪽의 낙읍(낙양)으로 도성을 옮겼는데 동천 이전의 주왕조를 ‘서주’, 그 이후를 ‘동주’로 나누어 부른다. 급기야 ‘고사변파’는 “중국에서 동주 이전에는 역사가 없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 ‘고사변파’의 이 같은 주장에 결정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해 차분히 자료를 수집하며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던 한 인물이 있었다. ‘왕국유’라는 사람인데, 그는 “고대사에 관한 사서의 기록을 무조건 신화 및 전설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입증하면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결국 1950년대 이후 중국정부의 강력한 지원 하에 대규모 조사단이 구성되고 본격적인 발굴 조사 작업이 진행된다. 


왕국유와 그를 추종하는 일군의 학자들의 수십 년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하나라는 왕조국가의 통치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부족이 연합한 ‘추방사회’였고, 중국 최초의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던 왕조였음이 밝혀졌다. 더불어서 상나라는 BC 1600년부터 BC 1046년까지 존재했으며 주나라도 현존했던 왕조였음이 밝혀졌다. 상나라는 여러 차례에 걸친 천도 끝에 지금의 하남성 안양 일대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가 오랜 중국에는 고도가 많다. 왕조의 수도로서 존속 기간을 기준으로 보면 시안이 이중 가장 오래된 도시이고, 이어서 빼이징, 낙양, 남경 순이다. 이들 도시를 가리켜 ‘4대 고도’라 한다. 여기에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개봉)을 추가하면 ‘5대 고도’가 되고,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까지 포함하면 ‘6대 고도’가 된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8대 고도’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경우 상나라의 도읍지였던 은허가 있는 안양과 한때 주나라의 수도였던 정저우를 넣는다. 8대 고도 중 낙양, 안양, 정저우, 카이펑 등 4개 도시는 중국의 중원인 하남성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하남성의 성도는 고대 도시 정저우다. 


베이징에서 안양까지는 여섯 시간 거리다. 거리는 대략 500km 떨어져 있다. 4인1실 침대칸을 얻어 이층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중국의 기차편은 3등급으로 분류하는데, 고속, 중간, 일반 열차다. 내가 탄 기차는 중간급이었다. 안양에 도착할 시간이 되자 안내원이 와서 깨워 주었다.


새벽 4시 5분에 안양역에 내렸다.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안양역 주변을 배회하다가 접근한 택시 기사와 흥정을 시작했다. 중국인들과의 협상은 항상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안을 한다.


택시 기사는 내 수첩에 ‘항금영웅악비’를 그럴듯하게 썼다. 내가 “악비묘는 항저우에 있다”고 하자 이곳, 안양이 악비의 고향이라고 한다. 핸드폰에서 ‘악비장군 생가’를 찾아내 보여준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조조능’을 보여준다. 어차피 이른 새벽에 갈 곳이 없었다. 추가 요금을 지불키로 하고 따라 나섰다.


먼동이 트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30분쯤 산길을 헤집고 올라가자 공사장이 나타난다. 굳게 철문이 닫혀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청화대학 연구팀에서 발굴 중이고 게다가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땅이 파헤쳐져 있고 이제 발굴 초기 단계였다. 속았다.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 화장실에 들러 간단히 세수만 했다. 몸에서 쉰내가 난다.

 


안양은 황허 북쪽 허베이성(하북성)과 경계에 있다. 상나라는 탕왕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모두 여덟 차례나 도성을 옮겼고, 하왕조를 멸망시킨 후에도 다섯 차례 천도했다. 이후 하남성 안양으로 천도한 뒤에야 비로소 도성을 옮기는 일이 사라졌다. 이때부터 상나라는 후세인들에 의해 은나라 혹은 은상으로 불리게 된다.


1920년대 상나라의 도성이었던 안양에 대한 발굴 조사로 상왕조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상왕조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혀준 것은 19세기 말 하남성 안양현 서북쪽의 소둔촌에서 처음 발견된 갑골이었다. 농부들에 의해 거북이 뼈에 새겨진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 문자와 청동 제품들이 발굴되었다. 갑골에 새겨진 글귀들은 점을 칠 때 귀신과 선조들에게 질문한 것으로 밝혀졌다.


갑골문은 최초의 문자 기록이다. 거북의 등껍질을 불에 태워 신의 뜻을 물은 뒤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이로써 역사시대로 들어선 상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신탁을 통해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상나라의 역대 왕들은 일종의 무당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갑골은 그 수가 무려 10만 개에 이르고 갑골문은 모두 35만 자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3분의 2가 완전히 해독되었다고 한다. 해독된 갑골문의 내용을 보면 조상에 대한 제사가 제일 많고 제사의 일자, 제물의 종류와 수, 바람과 천둥과 관련된 기후, 전쟁, 수렵에 관한 내용이 많다고 한다.

 


당시 상왕실의 제사는 국가대사였다. 고대국가에서 약소 부족의 정치적 복속은 지배부족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뜻했다. 갑골문에 의하면 상나라는 5000~1만 명이 참가했던 대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다. 보통 전쟁 시 출병하는 병사의 수는 3000~5000명 정도가 보통이지만 많을 때에는 3만 명 정도에 달했다. 전쟁의 원인은 주로 부속 부족의 배반, 적대관계에 있던 방국과의 충돌, 제사용 포로의 획득이 목적이었다.


3000여 명의 포로를 일시에 포획하고 300여 명의 전쟁 포로를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50년대 안양에서 발굴된 대형묘에서는 순장된 유골이 300여 구가 발굴되었고, 상 왕릉에서는 2000여 구의 순장된 유골이 나왔다. 이들 유골은 산 채로 순장된 것을 포함해 죽임을 당한 후 순장된 것 등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제사에는 노비가 소나 양 등의 동물과 함께 제물로 희생되었는데 갑골문에는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의식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양 은허유적지에서는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을 묻는 구덩이가 발굴 되었는데, 무려 1500 개나 되었다. 한 구덩이에 목이 잘린 시신이 10구씩 묻혀 있었다.


갑골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상나라 때 이미 음력과 양력을 결합한 역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상나라를 세운 상족은 종족적으로 몽골인 계통에 속했다. 상나라 때 만들어진 각종 생산도구와 생활용품, 반지하의 움집, 농경 방식 등은 하남성에서 출토된 신석기 용산문화의 전통과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갑골문과 순장 풍습, 병거의 사용 등은 분명 용산문화와 괴리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상족은 동쪽에서 온 정복자 부족, 동이족계의 일족 중 한 갈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게다가 상나라가 도성을 자주 옮겨 다닌 것도 유목민의 습성으로 보는 견해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아직까지는 규명되지 않은 주장이다.


상왕조 때의 왕위 계승은 주나라 때와는 달리 형제상속이었다. 상나라의 영토는 대략 하나라가 통치하던 지역과 유사했다.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유역이었다.


안양 ‘은허박물관’은 발굴 현장 유적지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일반인에게 공개한 곳이다. 은허의 유적은 후기 석기시대에서 청동기로 전환되던 시기의 문명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은 부족연맹 체제를 탈피하여 ‘군장사회’로 통칭되는 왕권을 확립하였고 국가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왕과 귀족들은 지상 위에 집을 짓고 살았고 평민들은 땅을 파서 반지하 형태의 집에서 거주했다.


20세기 후반에 상왕조의 궁궐터인 이곳이 발굴됨으로써 우리는 30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상나라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청동기 유물과 갑골 복사가 발굴되었다.

 


갑골문은 현대 한자어의 원형에 해당한다. 갑골문은 이미 상형과 지사, 회의, 형성 등 한자어를 형성하는 네 가지 형식을 모두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뜻이 비슷하거나 음이 비슷한 글자로 다른 뜻을 표시하는 가차의 방법도 사용하고 있었다. 갑골문은 길흉을 점친 기록이기는 하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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