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대도벌사건의 주역 친일파 신상묵

이승재 (주)나무와 에너지 대표 / 기사승인 : 2019-08-01 11: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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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에너지 이야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숲은 황폐화됐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피해는 지속됐다. 전쟁 직후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이 급증했고 여기에 북한을 탈출한 실향민들이 대거 더해지면서 겨울엔 난방연료를 구하기 어려워 너도나도 산에서 나무를 잘라냈다. 분단 당시 남쪽에 남은 발전시설은 겨우 200MW 남짓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겨우 작은 화력발전소 1대 분량의 전기가 생산된 것이니 난방에 쓸 에너지가 있을 리 없었다. 정부는 미군 해군이 보유한 발전함을 통해 해상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야 했다. 에너지주권은 요원했고 자급자족은 먼 나라 일이었다. 그러니 땔감을 구하기 위해 숲에서 나무를 베는 행위를 정부가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단속의 손길이 산으로 미치기 어려워지자 도벌 규모는 더 커졌다. 1960년대에 적발된 도벌건수만 1만9000여 건이고 4만4500입방의 나무가 도벌 피해를 당했다.

 

▲ 도벌 후 쌓아놓은 나무/64년 12월 9일 경향신문

 

1963년 12월에 지리산에서 대규모 도벌을 하던 일당이 검거됐다. ‘지리산대도벌사건’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건이다. 지리산 산골은 깊은 산세 덕분에 한국전쟁을 거치고도 울창한 숲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지리산 상봉과 중봉에는 500여 헥타르에 걸쳐 전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목상들은 피해목과 고사목에 대한 벌채 허가를 받아놓고 실제로는 산에서 멀쩡하게 자란 아름드리 전나무와 소나무를 도벌했다. 도벌의 규모는 땔깜으로 팔기 위한 양을 넘어섰다. 지리산 해발 800m에 무허가 제재소를 세우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수력발전 허가까지 받을 정도였다. 


지리산 산속의 도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63년 6월 한 현역 공병대위가 청와대에 고발하면서다. 사태가 심각했지만 정부의 조치는 뒤늦었다. 9월에 박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지고서야 지리산을 담당하던 도경국장들이 호출돼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지리산을 포위하고 ‘인간송충이’ 검거에 나섰다. 적발된 도벌건수는 모두 294건이었고 300여 명이 검거됐다. 압수된 도벌원목만 트럭 150대 분이 나왔고 당시 돈으로 2억 원대의 원목이 도벌됐다고 경찰은 집계했다. 


수사과정에서 불법도벌을 비호했던 공무원들도 수사선상에 올랐다. 국유림에서 대규모 벌채허가가 났을 뿐 아니라 벌채에 사용하기 위해 함양군이 관광도로를 만든다며 지역주민들을 동원해 임도를 만든 정황도 파악됐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본래 지리산의 고사목을 벌채하기 위해 내준 벌채허가권이 몇 단계를 거쳐 서울에 소재한 남선목재로 넘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서남흥업 신상묵 회장이다. 지리산 깊은 계곡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군사정권의 시퍼런 통제 아래서 대규모 도벌이 가능하도록 정치권의 비호를 조성할 수 있는 사람, 신상묵의 등장으로 사건의 파장은 중앙정치권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신상묵은 누구길래 지리산의 나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걸까? 


1916년 전라북도 익산 출생인 신상묵은 1938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다닌 바로 그 학교다. 가까운 동기였던 둘은 이후 행보도 비슷했다. 신상묵은 1940년에 일본군에 지원했고 44년에는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중사급 지위에 오른다. 일본식 이름은 ‘시게미쓰 구니오’다. 신상묵의 친일행각은 단순히 일본군 입대에 머물지 않았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제의 전쟁에 참여하라고 적극적으로 추동했다. 1940년에는 잡지 <삼천리>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다. 


“물은 얕은 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이후 신상묵은 일본 헌병이 되었고 독립운동가를 수사하고 고문했다. 그러나 해방 후 반민특위가 무산되면서 신상묵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1946년 해방된 나라의 경찰이 된다. 진도경찰서장, 영일경찰서장, 경북도경 보안과장을 거치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에 임명된다. 이른바 빨치산 토벌대장이다. 59년에 신상묵은 퇴직했지만 그리고도 전라북도 산업국장을 지냈고 1년 남짓 고위직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주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에서 활약하던 사람들과 함께 서남흥업을 만들어 도벌에 뛰어든 것이다. 


지리산대도벌사건이 정치권의 비호가 없이는 불가능한 규모로 파악되자 64년 12월에 국회에 지리산도벌사건 진상조사위가 만들어졌다. 검경의 수사는 65년 1월 말이 돼서야 끝났고 모두 37명이 기소됐다. 1965년 법원은 38명의 피고인 중 10명에게 실형, 22명에게 집행유예, 1명에게 벌금형을 내렸다. 그런데 이 사건의 가장 핵심 역할을 한 신상묵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반민특위 때도 대도벌사건 때도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신상묵은 1984년 68세로 사망했다. 

 

▲ 신상묵 1916~1984


우리숲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수탈당했고 친일파에 의해 또 피해를 입었다. 최근 일본정부가 우리나라에 대해 경제 보복조치를 하고 있다. 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에 의한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은 참으로 뻔뻔하다. 


이승재 ㈜나무와에너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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