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 기사승인 : 2019-02-27 1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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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

▲ 임진왜란 때 대부분 허물어지고 성벽 일부만 남아있는 서생포만호진성 ⓒ문화재청

 

진성(鎭城)은 국경 및 해안지대 등 국방상 중요한 곳에 있었던 군인들의 주둔지로 지금의 대대급에 해당하는 군부대다. 조선 전기까지 울산에는 염포, 서생포, 개운포 세 곳에 진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생포만호진성은 지금의 서생, 온산, 온양 바닷가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곳 지휘자인 만호(萬戶)는 3품으로 병선 20척, 군졸 767명을 지휘하였다.


서생포만호진성은 회야강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상륙한 적에게 성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다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면서 동시에 내륙과 연락이 편리한 곳에 자리 잡았다. 성은 산에서 뻗어내려 온 구릉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고, 구릉의 경사면과 평지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包谷式)이며, 성벽은 수직으로 견고하게 쌓은 석축성(石築城)이다.


성벽의 석축은 장대석(長大石)을 가로눕혀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대형의 석재로 기단석을 쌓았는데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았다. 내부는 소형의 할석(割石)으로 뒷채움하여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 바깥으로는 해자도 있었다. 이곳 해자는 적의 침입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겠지만 동시에 산비탈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돌리는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생포만호진성은 진하해수욕장 입구인 서생면 화정리 구진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웃구진마을 주위 약 7590㎡(2300평)의 면적에 자리 잡고 있다. 서생교 서쪽 끝부분과 마주 보고 있는 산 구릉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사각형 성이다. 현재 성터 흔적은 1/4정도 남아있으며, 성곽 동쪽 부분은 도로에 편입되는 바람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원래 모습은 바로 강가까지 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파도를 피하면서 배를 정박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바다로부터 노출되지도 않는 곳이다.


서생포만호진성은 웃구진 마을에 있다. 이 마을 바로 옆으로 구진마을, 진하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 이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진鎭’이라는 지명은 모두 서생포진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구진(舊鎭)은 옛 서생포진성 있었던 곳, 진하(鎭下)는 서생포진성 아랫마을이라는 뜻이다.


서생포만호진성의 축조 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측하고 있다. 이 성과 같은 성격의 염포성을 성종 21년(1490) 5월에 쌓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함락되면서 성벽의 벽돌은 바로 이웃한 서생포 왜성을 새로 쌓는 데 이용되었다. 이렇게 이곳의 성돌을 헐어가는 바람에 지금 서생포만호진성의 성벽은 대부분 없어지고 기단석 일부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성벽 길이는 440m, 너비는 4m 정도이고, 성 서쪽 출입문 시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주 출입문은 회야강과 바다 쪽으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북동쪽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서생포만호진은 전쟁 중 일본군이 새로 쌓은 서생포왜성에 자리 잡아 1895년까지 주둔하였다. 전쟁 중 일본군이 쌓은 성에 우리나라 군대가 주둔한 것이다. 헐리고 난 서생포진성은 이후 복원되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반면 서생포왜성은 전쟁 후 서생포만호진 부대가 19세기 말까지 주둔하는 바람에 잘 보존될 수 있었고,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당국의 보호 아래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게 되었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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