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남부선의 시‧종착역, 부산진역

황주경 시인 / 기사승인 : 2019-05-08 11: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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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한 국가의 국력은 사람과 재화 수송률에 비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제국주의 시대는 철도의 길이가 곧 그 제국의 힘이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철도부터 부설한 이유다.


1928년 3월, 일제 작가 하세가와 가이타로는 조선반도를 통해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간 이야기를 유럽견문록 <춤추는 지평선>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관부연락선으로 부산항에 들어와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성을 지나 하얼빈까지 가서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갈아탔다. 한 페이지 정도 할애한 조선 여정에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기착역과 철도관사에 내걸린 일장기에 희열했다. 식민지 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는 그의 눈에 제국의 국력 그 자체로 비쳤을 것이다. [* 정해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철도와 제국주의 참고]


옛 부산진역은 동해남부선의 시‧종착역이었다. 1905년 12월 1일 영업을 시작했으며, 한때 통일호와 비둘기호의 출발지로도 유명했던 역으로 부산역에 버금갈 정도로 승객이 많을 때도 있었다. KTX 개통 이후 2005년 4월 1일에 여객 취급을 중단했다.


역사驛舍는 임진왜란 당시 첫 격전지였던 옛 부산진성이 자리한 중산 아래 중앙대로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1935년 12월에 경주까지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부산진역은 범일동에서 지금의 수정동으로 옮겨 오게 된다. 일제에 의한 동해남부선 일대의 농수산물, 광물 등의 물자 수탈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보물 391호) 부산충렬사 필사


주말 오후에 찾은 부산진역 앞은 폐역임에도 인산인해다. 한눈에 봐도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무질서해 보이지만 역사 왼쪽 모퉁이를 향해 나란히 줄 선 모양새다. 살펴보니 폐역사 끝에 무료급식소가 있었다. 현재 시각 오후 세시 반, 아직 배식시간이 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사람들은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린다.

 

▲ 부산지역 전경. 오후 3시경인데도 사람들이 무료급식소를 향해 줄 서 있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 풍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일푼인 사람들이 종일 빌딩 숲속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구석진 곳에서 궁상떠는 것보다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끼 때를 기다리는 게 훨씬 나으리라. 인생 뭐 별거 있나? 한평생 먹고 살기 위해 바동거리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것을.


부산진역 앞에는 ‘역전 지게꾼’의 모습을 담은 특이한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쌀가마니를 진 지게꾼과 리어카를 끄는 짐꾼의 형상이다. 과거 ‘화물의 메카’라 불린 부산진역 앞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기차에서 막 내린 사람들은 짐을 양손도 모자라 머리에 등에 이고 졌으리라. 지게꾼들은 이를 놓칠세라 잽싸게 짐을 채 지게에 얹고 길을 잡았을 것이다.

 

▲ 부산진역 앞 지게꾼 형상물. 급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지게꾼에 기대 오수를 즐기고 있다.


마침 필자가 카메라를 들고 역 앞에 섰을 때, 노숙자 한 분이 그러잖아도 힘들어 보이는 지게꾼에 기대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신록이 짙어지는 가로수가 여름보다 더 따갑게 내리쬐는 5월의 햇볕을 가려 주고 있었다.

매축지 마을

범일동 매축지 마을은 해방 전 부산항으로 드나들던 화물을 운반하던 우마의 마구간이 있던 곳이다. 일제에 있어 부산항은 대륙 진출의 관문이자 물산 수탈의 허브항이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물동량에 비해 넓은 배후지를 갖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1913년부터 부산항 일대의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우는 대규모 매립을 시작한다. 1917년 수정동, 초량동 등 부산진 제1차 매축을 완공하게 되고 1938년에 지금의 매축지가 완공된다.

 

▲ 매축지 마을의 양곡상회 간판. 태풍에 끄떡없을 것이다.

부산진역에서 철길 고가도로를 지나 15분 거리인 매축지 마을은 1950년대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멈춘 듯하다. 좁은 골목길, 오래된 간판, 연탄아궁이, 상추‧파가 자라는 화분 텃밭 등등. 시간적 배경을 뒤로 돌려야 했을 ‘친구’, ‘아저씨’ 등의 무수한 영화가 여기서 촬영되었다.

 

▲ 매축지 마을 골목.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좁은 길 사이로 빌딩 숲이 보인다.


마을 안쪽 공동 화장실이 있는 골목을 지나다가 평상에 앉은 박춘자(92세) 할머니를 만났다. 박 할머니는 아직 정정한 목소리로 “내 원래 이름은 아들 낳을끼라꼬 아버지가 박차식이라고 지었는데 호적상의 이름은 박춘자(92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곳 출신이라는 할머니는 1943년경 종군위안부 차출이 극성일 때 아버지의 기지로 중국 길림성 오상현에서 과자공장을 하던 형부네로 피신해서 다행히 화를 피했다. 그곳에서 조선 청년을 만나 시집을 가고 해방되던 해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 박춘자(92세) 할머니. 필자에게 매축지 마을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을은 6.25 피란민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주민 수가 급팽창했다. 피란민들은 뼈대만 있던 마구간을 벌집처럼 개조해 기거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소막사를 하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소막마을이라고 불렀다. 원주민들은 당시 난리를 피해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을 매정하게 내쫓지 않았다. 다만 부두의 일거리를 나눠야 하는 일이 걱정이었다. 해방 이후 이 마을 사람들은 주로 석탄 등의 화물부두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기던 신발공장, 사출공장 등에 취직해 생계를 꾸렸다.

 

▲ 장부리(92세) 할머니. 골목에 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매축지에서는 세 번의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낳은 것은 1954년 대화재였다. 미군에 공급하던 송유관에 구멍이 나면서 기름이 쏟아졌다. 기름이 주변 개천으로 흘러들었고, 이를 확인한답시고 누군가가 성냥불을 그은 게 화근이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불은 몇 날 며칠을 탔고, 미군 헬기가 날아와 소화약재를 뿌리고서야 완전히 꺼졌다고 한다. 이 화재로 37명이 불에 타 숨지고, 가옥 650여 채가 전소됐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화재 사이렌을 대신해 동네 전봇대에 종을 매달아 위급상황에 대비했다.

 

▲ 마을 박물관에 전시 중인 마을 주민의 참전용사 증서


매축지 마을 동편은 지금 막 재개발 공사에 들어갔다. 박씨 할머니께 “재개발되면 보상금도 받고 형편이 좀 나아지는 거 아니냐?”고 하자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집들은 주로 5평 내외인데 그 평수로는 보상받아야 갈 데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동편의 철거 지역민들이 어디로도 못가고 이곳의 빈방을 찾아오는 형편이라고 했다. 박씨 할머니는 “재개발을 원치 않으니, 여기서 이렇게 편안하게 살다 가고 싶다”는 말을 필자에게 전했다.

 

▲ 매축지 골목, 골목 끝에 보이는 빌딩 숲과 대조된다.


정공단鄭公壇

정공단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鄭撥)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석단이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부산 동구 좌천동에 소재하며 옛 부산진성 남문 자리에 있다.

 

▲ 정공단 전경


부산진역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정공단에 올라서면 먼저 충장공 정발 전망비忠壯公鄭撥戰亡碑 비각이 찾는 이를 맞는다. 1761년 경상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정발(1553∼1592)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영가대(永嘉臺)에 세운 것인데, 일제강점기 전차선로 개설에 따라 영가대가 헐리면서 현재의 정공단으로 이전해 온 것이다.

 

▲ 정공단 안 충장공 정발 전망비 忠壯公鄭撥戰亡碑 비각


비문해설서를 보면 참혹했던 그날의 전투 상황이 절절하다. 그중에서도 필자의 마음을 흔드는 내용은 ‘공이, 나는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또다시 성을 포기하자고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 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흐느끼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후 전투 막바지 공이 탄환에 맞아 순국하자 공의 막료인 부사맹, 이정헌 공도 곁을 떠나지 않고서 죽었고, 공의 애첩인 애향도 공의 죽음을 듣고 달려와 곡하고 시신 곁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공의 노복인 용월도 또한 적에게 달려들다 죽었다.’라고 쓰여 있다.

 

▲ 매축지 마을 박물관. 오래된 가전제품, 유공자증서, 전역패 등 마을 사람들의 역사가 오롯이 전시되어있다.


일제 때 정공단은 왜경의 심한 탄압으로 인해 1942년 제단이 폐쇄되고 유물과 비품을 몰수당했다. 해방 후 정공단을 모시던 향사계가 재조직되었고,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사를 거행하고 있다. 한편, 정발 장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으며, 시신을 찾지 못해 장군의 말이 물고 온 투구와 갑옷으로 장사를 지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을 맞아 격전을 벌이는 부산진성의 전투도인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보물 391호)를 보면 매축지 이전의 부산포를 그려 볼 수 있다. 왜군이 상륙 중인 해안은 부산진성과 매우 가깝게 묘사돼있으며, 700여 척의 배가 정박한 부산 앞바다는 왜선으로 빈틈이 없다.

 

▲ 고가도로에서 본 부산진역 구내. 여러 부두로 분기된 선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역사는 반복되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임진왜란 발발 300여 년 후, 이곳 부산진성 일대 부산항은 또다시 일본제국에 짓밟히며 대륙진출의 발판이 된다.


황주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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