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는 시간

김루 시인 / 기사승인 : 2019-10-10 11: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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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모처럼 산을 오른다. 단풍 든 것처럼 사람들이 알록달록이다. 한꺼번에 몰려오는 낯선 물결에 현기증이 인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니 에메랄드빛이다. 눈부시다. 왜 사람들이 이토록 산을 찾아 오르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빨리 걸어야 할 이유도 없는 나는 보폭을 내 호흡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쑥부쟁이며 구절초. 산부추의 행렬은 인간에게 건네는 자연의 선물이다. 가벼워진다 걸음이. 한 계단 한 계단 사람들을 보내고 사람들을 비켜 오르는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제법 올라 온 것도 같은데 여전히 계단 위에 서 있다. 계단을 오르며 나는 오래 전에 올랐던 이 길을 더듬더듬 기억해 본다. 


서울에서 정신없이 살다 내려온 아이를 데리고 자랑스럽게 이 길을 나는 소개했다. 가파르지도 않고 아늑한 산길이 너무 예뻐 아이도 나도 감탄했던 길. 그 길이 어떡하다 이런 계단 천국이 되어버렸는지, 걸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산이 지닌 가장 매력적인 것들을 죄다 뺏긴 기분이다. 비가 온 뒤라 계단은 미끄럽고 위험하다. 썩어 움푹 파이기도 했지만 제자리를 벗어나 균형을 잃은 계단은 더 위험하다. 무슨 마음으로 그 아름다운 길을 이렇게 망가뜨려놓았을까. 계단을 벗어나니 바로 산 능선이다. 여기까지 오르는 시간은 좀 빨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산행의 묘미는 사라졌다. 아름다운 내 추억 하나를 뺏긴 기분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의 낯빛은 그래도 밝다. 가슴으로 스며드는 산바람에 걸으면서 흥분했던 마음도 달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두셋만 모이면 조국 얘기다. 조국이 있으니 조국 얘기도 할 수 있지. 우스갯소리로 농을 치는 사람도 있지만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촛불집회 이야기며 개혁 이야기로 앉은 자리는 뜨겁다. 모두 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촛불시위에 누가 더 많이 참여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분열되었는지,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지, 이런 논쟁으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다만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의 주권을 표현하는 것은 존중하자. 바쁜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촛불시위장에 나가는 그들은 자발적이다. 자발적이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아름다운 성장통이라 말해두자. 썩은 것은 오래 두면 위험하다. 계단도 마찬가지다. 쓸데없이 오르고자 하는 욕망의 계단은 필요하지 않다. 조금 느리고 천천히 가더라도 주위 풍경에 무릎 꿇는 시간도 필요하다. 언제 자발적으로 우리가 누구 앞에 무릎 꿇어 본 적 있는가. 자주색 얼굴을 하고 웃는 산부추 앞에 나는 오늘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다. 꿇을 수 있는 그때가 진정 아름답지 않은가.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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