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스님 혁신단원이 되다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3-13 10: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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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1928년 2월 28일 밤 10시, 서울 한용운의 집인 유심사에 통도사 오택언 스님을 비롯한 중앙학림학생 8명과 중앙학교 통도사 박민오 스님 등 9명이 모인다. 만해스님은 독립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서울 만세운동 이후 각 사찰에 가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은밀히 지시했다.

통도사 스님들 동부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을 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 학생과 시민 5천여 명이 모였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울 거리를 다녔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2일 개성, 3일 예산 등을 이어서 마침내 양산에까지 파급됐다.


3월 5일(수) 오택언은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물금을 거쳐 통도사로 돌아왔다. 오택언은 지방학림 학생과 강원 스님을 만났다. 서울에서 있었던 3.1만세운동의 목적과 경과 과정 등을 설명하고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만난 사람은 통도사 학생대표 김상문과 양대응, 김진오(옥), 신화수 스님과 면사무소 직원 박세민(문)이었다. 신화수는 통도사 말사인 고성 옥천사 소속의 스님으로 통도사 강원(?)에 머물고 있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비밀리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오택언은 전보 수배령이 내려져 있어 체포는 시간 문제였다. 서울에서 온 그의 정체는 곧 드러나 7일(금) 검거돼 서울로 압송됐다. 오택언의 검거에도 만세 거사는 준비됐다. 오택언이 보낸 독립선언서가 검거 2~3일 후 통도사의 신구담과 신화수에게 배달됐다. 학교는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 모든 것이 가능했고, 면서기의 도움으로 또한 어려움이 제거되었다.


장날 전날인 3월 13일(목) 신평 장터에 줄다리기 구경을 하러 사람들이 모였다. 통도사 소속 학생과 스님 50여 명이 신평 주민 200여 명과 합세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부 경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주재소는 통도사 경내에 있었고 전신이 없었던 시절이라 경찰 출동도 늦었다. 김진오 스님만 잡히고, 신화수는 서울로, 김상문은 상해로, 양대응은 모처로 도피를 한다. 서울에 올라간 신화수는 박민오 스님을 만난다. 이때부터 그들의 삶은 혁신단, 혁신공보, 의열단, 대동단 등의 이름으로 얽힌다.

 

▲ 통도사 신평 만세운동 도표

<혁신공보>, <자유신종보>를 발간한 박민오 스님

1919년 3월 초순 박민오는 <격문>을 발행하다가 4월에 동대문 교회 영국인 전도사 피어슨 여사 집에서 김상옥 주도로 만든 혁신단(革新團)에 가담한다. 조직원은 철물상인 김상옥, 중앙학교의 윤익중과 박노영(박민오), 불교졸업반 신화수, 보성중 정설교, 휘문중 이춘식, 중학교 서무직원 서대순, 경성우체국 집배원 전우진, 그리고 이혜수 등이었다. 이 중에서 현재까지 신화수와 박민오만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혁신단원들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했다. 국내외에서 취재되는 독립운동전선(獨立運動戰線)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 등을 게재하고 1회에 등사판 1천 부씩을 찍어냈다. 김상옥이 단원을 조직하고 선전과 배달을, 박민오는 편집.취재.논설을, 윤익중은 해외소식을, 신화수는 국내소식을, 서대순은 인쇄를 담당했다. 그러나 9월이 돼서는 재정이 여의치 못하고 인쇄를 책임 맡았던 서대순이 붙잡혀 인쇄시설 일체를 압수당하게 되자 더 이상의 신문 발행은 불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박민오는 <혁신공보>와 <자유신종보> 발행 등 계몽활동에 힘을 쓴다. 박민오는 통도사에서 인연을 맺은 백초월 스님이 서울에 와서 중앙학림에 ‘한국민단본부(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를 설치하고 상해임정 독립군 자금 모집과 <혁신공보>를 발행하자 같이 일한다. 당시 통도사 구하스님은 혁신공보 사장인 백초월에게 2천 원을 지원해준다. <혁신공보>는 백초월이 사장이었고, 중앙학교의 유기권.유연화.최석실이, 중앙학림은 김법린.김상헌.김상호가 참가했다.


1919년 6월초부터 10월 말까지 박민오는 “조선인은 조선독립운동에 찬동하고 상호협력하여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해야한다”는 취지의 <자유신종보(1호~16호?)>를 제작, 배포한다. 9월에는 중국 요리점 ‘대관원’에서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서승해, 임우식, 이춘학, 김도영과 결의했다. 하지만 <혁신공보>가 자금난에 봉착하고 일경의 감시와 추적, 경제적 곤란에 처하자 임봉순, 김봉신, 74세의 남작 김가진과 같이 상해로 밀항한다. 그 후 그는 의용승군 조직과 독립군자금 모집,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상해 망명 등을 추진하는 ‘철원애국단 사건’에 관련해 1920년 4월 신상완(용주사), 김상헌(범어사) 스님과 함께 검거된다. 백초월 등은 도피하고, 박민오는 상해에 있어서 검거되지 않는다.

 

▲ 김상옥 혁신단 결성

혁신단의 암살단원이 된 신화수 스님

혁신단은 <혁신공보>의 발행에 어려움을 겪자 1919년 12월 방향 전환을 모색해 ‘암살단’을 조직한다. 총독 및 일인 고관, 그리고 민족반역자 등을 숙청하는 혁명적 실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총책은 김상옥, 무기공급책은 김동순, 재정책은 윤익중, 비밀문서책은 서대순과 정설교, 집총대장은 신화수, 연락책은 전우진이 맡기로 했다. ‘암살취지서’, ‘일본고관 경고문’, ‘조선 관리 사퇴 권고문’ 등을 작성 인쇄하고 암살 명부도 만들었다. 폭탄 제조를 위해 화약과 약품을 사들이고, 김동순은 권총 세 자루와 총알 300발을 가져왔다.


1920년 9월에 ‘육혈포 암살단’ 사건이 발각된다.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하는 8월 24일을 기회 삼아 암살단과 만세단을 조직해 경성에서 대소동을 일으키려 했다. 암살단장은 한훈(한우석, 30세, 조선독립군 사령부 조직 운영)이었고, 사이토 마코토 일본총독과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는 저격수는 이운기와 서대순이었다. 시가전을 벌일 계획도 세웠다. 시민선동과 만세 부르기는 이근영, 윤기중, 김형규, 윤상보가 하기로 했다. 이때 신화수(24세)도 다른 동지들 13명과 함께 거사 전날 체포된다. 미체포자는 김상옥 등 아홉 명이었다. 김상옥의 도피를 도와준 이가 영화 <밀정>에 나오는 경기도 경찰 경부 황옥(1885~1950?)이었다. 김상옥은 은신해 있다가 10월 상해로 떠나 의혈단 김원봉과 합류한다.


‘육혈포 암살단 사건’으로 신화수는 1921년 6월에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돼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공문서 위조, 공갈취재 미수, 사기 등의 혐의를 받았다. 조선군정서에 가맹해 조선 내에서 조선독립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권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경성에 잠입, 암살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취의서와 경고문을 작성, 반포해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며 총독부 정무총감 암살을 계획하는 등 치안을 방해한 혐의였다. 1921년 11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에 포함하는 판결을 받고 복역한다.

 

▲ 김상옥 암살단 조직


박민오, 신화수 스님 ‘제2 독립운동’을 시도하다 

 

1921년 5월 진주에서 ‘제2차 독립운동 사건’이 적발된다. 3.1독립운동 이후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김두현 외 13명이 경상남도 경찰부와 진주경찰서의 합동수사대에게 체포된 것이다.
당시 신화수는 경성감옥에 복역 중이었다. 김두현은 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박치오(민오)는 대동단 중심으로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세 구역으로 나눠 제2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이 사건에는 양산 출신의 김봉길(25세, 자동차운전수), 김덕봉(24세, 잡화상), 서상건(23세, 포목상)이 연루된다. 당시 통도사 스님 박치오(朴致悟, 민오玟悟, 26세)는 소재불명으로 체포를 피한다. 당시 박민오는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고 있었다. 1921년 박민오는 잡지 <개벽> 등에 글을 실어 자신이 <혁신공보>를 발행한 박노영임을 밝히고 중국과 유럽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 정치학 박사가 돼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 사건에 연루된 신화수 스님

1923년 1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다. 의거의 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상옥이었다. 종로경찰서가 폭탄 사건을 수사하던 중 경찰에 김상옥이 지명되고 그는 경찰의 추격을 받는다. 22일 눈 내리는 새벽 은신처인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경에게 포위됐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에 항전한다. 세 시간 동안의 총격전 끝에 일본경찰 16명을 사상(死傷)시키고, 11발의 총알을 맞은 김상옥은 자결한다.


1923년 3월에 신화수는 감옥에서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상옥 사건으로 기소된다.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김상옥 사건 선고 공판에서 신화수는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예비,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문서, 자금영수증, 인장에 사용할 비용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1923년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신화수는 1923년 10월 경성복심법원 재판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폭탄 은닉을 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독립선전문 배포 등 치안을 방해하는 데 방조하였다’는 내용의 공소 기각을 받고 풀려난다.

 

▲ 김상옥 사건 연루자

개벽당원으로, 사회민주당원으로 활동한 신화수 스님

1926년 10월 8일 조선청명군대본영(朝鮮靑命軍大本營)에서 특파한 개벽당원으로 최강, 신화수, 이일화가 체포된다. 밀송했던 모젤식 권총 두 자루와 탄환 37발과 함께 검사국으로 압송된다. 총포 화약 취체령 위반 및 강도 혐의였다. 하지만 무죄로 판명돼 9일 석방됐다.


이후 1945년까지 신화수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 1946년 3월에 광복단의 중앙기구를 개편해 한성지부를 결성할 때 비서과장부에 신화수가 임명된다. 1946년 5월에 인민당에서 탈당한 여운홍 등 106명과 함께 사회민주당 결성 준비위원으로 활동한다. 사회민주당의 강령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 계획경제제도 확립과 전민족적 균등생활의 실현, 민족문화 앙양과 인류문화향상 공헌”이었다. 1946년 8월 3일 사회민주당 결당식을 종로 청년회관에서 거행했다. 그 후 신화수는 당무국장, 훈교국장을 맡는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 해방 후 만난 의열단원들. 첫 줄 오른쪽 첫 번째가 신화수


통도사 스님의 항일 배일 독립운동

사찰령에 의해 조선의 불교가 일본의 영향으로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통도사는 외적으로 친일적 경향이, 내적으로는 항일과 반일 독립운동의 기운이 강했다. 통도사 스님의 항일 독립운동은 김구하, 만해 한용운, 백초월이 만난 1912년 통도사 불교강원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오택언, 박민오, 신화수 3인방은 불교계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다. 오택언은 만해스님의 3.1만세운동에, 신화수는 김상옥의 혁신단과 암살단에, 박민오는 백초월 스님의 혁신공보와 독립군자금 모집에 관련하는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김상문은 상해임정 특파원을, 양대응은 불교 청년운동을 했다. 훗날 1941년 통도중학교 김말복, 조용구, 양대응 스님의 배일운동으로 이어졌고 학교가 폐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통도사 항일독립운동 스님들
 
이병길 보광중 교사, 시인, 울산민예총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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