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족의 불요불굴과 자강불식의 정신, 개봉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4-17 10: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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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황하의 물길이 바뀌거나, 끊임없이 침식.침몰되고 또 끊이없이 재건.보수된 문명이 황하 하류 문명의 숙명이다.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이 과정 속에 역사의 굳건함과 끈질김이 감춰져 있다.”(리카이위안, <진붕> 중)


“카이펑성은 성 위에 성이 있고, 반가호 아래에는 궁전이 여러개 있다”라고 대대로 전해져 온 말이 사실로 드러났다. 1981년 반가호 준설 작업 중에 호수 바닥을 파자 뜻밖에도 명나라 주왕부 유적지를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어진 발굴 과정에서는 역대 도시가 차곡차곡 쌓여 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카이펑 지하에 보존돼 있는 과거 모습을 아직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이펑 지상에는 현재의 도시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량문 북쪽, ‘고마도박물관’을 찾아가면 일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번탑’, ‘철탑’, ‘금명지’, ‘주교’, ‘양원’, ‘변하’, ‘변하의 제방’, ‘상국사의 종’ 등 ‘변경 8경’이라 불린 것들 가운데 현재 옛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번탑과 철탑뿐이다. 모두 지하 10미터 아래 수천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위나라(12~14m), 당나라(10~12 m), 북송(6~8m), 금나라(6m), 명나라(5~6m), 청나라 (3m). 이렇게 도시 위에 도시가 포개진 상황은 바로 황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하는 3년에 두 번 제방이 터지고 100년마다 물길을 바꾼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범람이 잦았고 물길이 여러 번 바뀌었다. 기록에 따르면 1194년부터 1938년 사이에 카이펑은 368번이나 홍수에 잠겼다. 황하가 흘러 내려오면서 운반된 토사가 쌓이게 되면, 강바닥 높이가 올라가다가 결국 제방이 터지게 되고 물길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전란에 따른 인재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춘추전국시대였던 기원전 225년, 진나라는 당시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성(카이펑) 주변에 제방을 쌓았다가 한꺼번에 터트림으로써 수몰시켰다. 1642년 이자성은 제방을 높이 쌓아 여름철 장맛비를 가둬 놓았다가 단번에 제방을 무너뜨려 성 전체를 물에 잠기게 만든다. 가깝게는 1938년 장제스가 일본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카이펑 서쪽 장저우에 있는 제방을 터뜨려 순식간에 100만 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빚고 만다.


중국인은 카이펑의 겹겹이 포개진 도시가 중화민족의 ‘불요불굴과 자강불식’의 정신을 구현한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북송의 번영과 카이펑의 부유함, 화려함의 이면에는 중국인들의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는 굳건함과 끈질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상국상종과 천수천안관음보살상

상국사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북송 시절, 상국사에는 한 달에 다섯 번씩 장이 섰다고 한다. 상국사는 <수호전>에 나오는 파괴승 ‘노지심’과 관련이 있다. 사람을 죽이고 오대산으로 숨어들어 스님이 된 노지심은 계율을 어기고 자주 소란을 일으킨다. 주지스님은 그를 카이펑에 있는 상국사로 보냈는데, 절에 속한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어느 날 밭을 지키다가 동네 불량배들을 혼내주게 된다. 그때 버드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울자 그는 맨손으로 버드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며 괴력을 과시했다. 상국사 산문을 들어서자 고루 앞쪽으로 버드나무를 뽑아내고 있는 노지심의 동상이 나왔다. 표정은 험악했고 또 한편 엄숙해 보인다.


이어서 두 건물이 나오는데 종루와 고루다. 종루에 있는 ‘상국상종’은 변경 8경의 하나다. 당나라 때 주조된 상국사의 종과 관련해 전설이 있다. 종을 만들기 위해 모금을 했는데, 어떤 과부와 노인이 각각 구리 비녀와 동전 한 닢씩 바쳤다. 이를 하찮게 여겨 그 비녀와 동전은 안중에 두지 않았는데, 종이 완성되고 나서 살펴보니 작은 두 개의 구멍이 발견된다. 그제야 크게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다시 비녀와 동전을 녹여 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한전은 팔각형의 독특한 구조인데, 청나라 건륭제 때 어떤 장인이 은행나무 하나를 가지고 장장 50년에 걸쳐 씨름한 결과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1000개의 눈으로 중생을 바라보고, 1000개의 손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형태다.


북송 이후 상국사는 여러 차례 파괴되고 중건됐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도 있었고, 무엇보다 황하의 범람에 따른 피해가 가장 컸다. 명나라 말기 이자성이 수공작전을 펼쳤을 때 카이펑은 성 전체가 진흙 속에 묻혔고 37만 명의 인구 중 34만 명이 사망했다. 1920년대 국공내전 시기에는 상국사가 시장으로 바뀌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킨다. 그 당시 상국사의 규모는 현재보다 스무 배가 더 컸다. 상국사가 불교 사찰로 다시 세상에 문을 열게 된 것은 1992년이다. 상국사는 덩펑의 소림사, 뤄양의 백마사, 난양의 수렴사와 더불어 ‘중원 4대 명사’로 꼽힌다. 상국사의 황금기였던 북송 시기 건축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찬란한 기억만큼은 남아 있다.

 

 


개봉부 계석명과 세 개의 청동 작두

‘개봉부’는 ‘판관 포청천’이라는 중국 드라마를 통해 잘 알려진 ‘포증’이 카이펑의 최고 행정 책임자인 부윤으로 기거했고, 카이펑의 행정과 사법을 책임졌던 관청이다. 송나라는 동경 개봉부, 서경 하남부, 남경 응천부, 북경 대명부와 같은 4경을 두었는데 개봉부는 성벽을 삼중으로 둘렀다.  


내부의 성은 황성, 중간 성벽은 내성, 외부의 성은 신성이라고 불렸다. 본래 오대 말엽 후주의 세종이 축조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공생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돌이 보인다. “공평함은 명철함을 낳고, 치우침은 우매함을 낳는다”는 <순자>에 나온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돌 뒷면에는 “너의 봉록은 백성들의 살과 기름이다. 아래 백성을 학대하긴 쉬워도 위의 하늘을 속이긴 어렵다”는 글귀도 보인다. 송나라는 이 계석명을 전국 관아에 세우도록 했다고 한다.

 

 


계석명을 지나면 정청이 나온다. ‘정대광명’이라고 적힌 편액 아래 병풍에는 솟구치는 파도와 밝은 해가 그려져 있다.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청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 개의 청동 작두다. 죄를 지은 자를 참수할 때 황제의 친인척은 용머리 작두를, 관리는 호랑이 머리 작두를, 일반 백성들은 개 머리 작두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카이펑부 제명기비’에는 카이펑에서 부윤을 지낸 18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구양수, 사마광, 소식 등 모두 쟁쟁한 이름들이다. 그중 유독 깊이 파인 부분이 있는데, 포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파인 것이다.

 


유리 벽돌 철탑과 허리 잘린 번탑

낙양의 시화가 모란이라면 카이펑의 시화는 국화다. 낙양에서는 4월에 모란 축제가 열리고 카이펑에서는 가을이 깊어갈 무렵 국화의 향연이 펼쳐진다. 국화는 ‘오상고절’이라고 표현한다. 차가운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를 표현한 말이다. 송나라 시기부터 국화 재배가 성행했다. 송나라 사대부는 이러한 국가의 보은에 절개로 화답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했던 제국, 송나라가 당시 인류역사상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몽골족의 침략에 맞서 장장 44년 동안 항전했던 동력도 바로 ‘오상고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물론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카이펑에는 지상 위에 남아 있는 송나라 유적은 ‘번탑’과 ‘철탑’ 두 개뿐이다. 번탑은 본래 80m가 넘는 6각9층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32m만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펑의 ‘왕기’를 두려워한 명나라 주원장이 번탑의 허리를 잘라냈다고 한다. “철탑이 높다 한들 번탑의 허리밖에 되지 않네”라는 말이 있다. 철탑의 높이는 55m다. 철탑 전체가 갈색 유리 벽돌로 덮여 있어서 마치 철로 주조한 듯이 보여 철탑이라고 불리게 됐다. 철탑은 국화 축제의 거점인 ‘용정공원’ 옆에 있다. 청나라 강희제는 용정공원에 ‘만수정’을 지었고 황제 탄신일이나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면 이곳에서 멀리 베이징을 향해 황제에게 하례를 올리도록 했다.

 


혼군과 간신, 북송의 멸망

어느 제국이나 망할 때가 되면 ‘혼군’이 나타나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다. 북송 때도 휘종 황제가 그런 부류의 인물이었다. 휘종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정치가 어울리는 ‘정치적 인간’도 못 됐다. 오직 예술에만 탐닉했다. 휘종은 그 자신이 천재적 화가였고 중국의 역대 제왕 가운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화관들을 우대했을 뿐 아니라 화관의 승진도 시험을 치게 했는데 천자가 직접 출제하고 선발하는 열성을 보였다.


휘종은 예술품을 모으고 기암괴석과 기화요초를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혼군에 맞는 간신이 짝을 맞춰야 한다. 나중에 재상까지 오르게 된 ‘채경’이 휘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고혈을 짜내던 백성들이 곳곳에서 ‘기의’했고, 마침내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한다. 휘종과 그의 아들 흠종, 황족과 신하, 궁녀들까지 포로로 잡혀간다. 이때가 1127년이다.

 


송나라는 긍극적으로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사대부가 존재할 때 송나라는 건강했다. 황제와 신하 모두 썩거나 부패의 늪에 빠져들었을 때 송나라는 스스로 자살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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