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단강 육화탑과 운림선사 영은사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5-31 10: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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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다락에서 창해의 날을 보거늘(루관창해일)
문에서 절강 조수를 대하였도다(문대절강조)”
-당나라 때 손지문이 전당강 영은사에서 제영한 글


서호의 남쪽 월륜산에 있는 ‘육화탑’이 세워진 것은 5대10국 중 하나인 ‘오월’의 마지막 왕 전홍숙 때다. ‘전단강’의 거센 조류를 진압하고자 970년에 육화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육화탑이 세워지자 전단강의 거센 조류는 많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육화탑은 60m 높이의 8각 탑이다. 밖에서 보면 13층이지만 내부는 7층으로 되어있다. 입구에서 입장료 30위엔을 내면 육화탑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층별로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쓴 편액이 걸려 있다고 들었는데, 박물관에 옮겨 놓았는지 찾을 수 없었다.

 

▲ 5대10국 시대, 항저우를 수도로 삼은 오월의 마지막 왕 전황숙의 동상. 육화탑 뒤편에


육화탑 꼭대기 층에 올라 발아래로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지류, 전단강을 바라보았다. 전단강은 이곳 절강성에서 가장 큰 강이라고 한다. 평온한 한국의 강과 다르게 강물의 흐름이 구불구불하고 거세게 굽이쳐 흘러 이 지방의 성 이름도 절강성이 되었다고 한다. 명나라 시절에는 바닷물이 밀물일 때 이곳에 올라 역류하는 물길을 구경하기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강의 물길이 바뀌었고, 역류하는 물길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명소는 다른 곳에 생겨났다고 한다.


전단강의 조수가 유명해진 이유는 전단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바닷물이 역류하기 시작해커다란 해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은 수심이 10m에 달하고 강폭이 100km인데, 강의 상류는 수심 2m에 강폭이 2km에 불과하다. 이러니 역류하는 바닷물의 유속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남송의 고종은 전단강의 해일 소리를 듣고 금나라 병사가 쳐들어온 줄 알고 혼비백산했다고 전해진다.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전쟁터의 북소리 같이 울리기도 한다.

 

 


육화탑 꼭대기 층에서는 ‘전단강 대교’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전단강 대교는 1937년 중국인에 의해 처음 개통되었는데, 그해에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 다리는 폭파될 운명에 처했다. 결국 상하이가 함락되자 항저우까지 일본군이 밀려들게 되었다.


1937년 12월 23일, 이 다리는 파괴된다. 지금 있는 전단강 대교는 중일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길이는 무려 1450m에 달한다. 전단강 바닥에는 진흙층이 40m나 깊게 깔려있는데 이 진흙층을 뚫고 암반에 말뚝을 1400개나 박았다고 한다.

 


육화탑에 얽힌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을 들으려면 육화탑 뒤에 있는 종, 탑, 조각, 비석 등이 산재해 있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대표적인 조각상이 오른손에 커다란 돌덩이를 쥐고 있는 육화라는 이름의 동자상이다. 육화의 아버지는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전단강에 빠져 죽었고, 어머니는 해일에 휩쓸려 죽게 되었다. 그 후 육화는 전당강을 메워 버리겠다며 매일 같이 강에 돌을 던졌는데 이에 감복한 용왕이 육화의 어머니를 돌려보내 주었을 뿐 아니라 전단강의 해일도 잠잠해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육화탑이 세워졌다는 이야기다.


서호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무림산 산속에 절이 있다. 영은사는 동진 시대인 326년에 창건된 고찰인데, 중국 선종 10대 사찰 중 하나다. 산세가 워낙 뛰어나 ‘신선의 영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 ‘영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은사는 지금까지 무려 16차례나 파괴와 복구가 반복되었다. 불교가 융성했던 5대10국 시절과 송나라 때까지 3000여 명의 승려가 이곳에 거주했다. 현재의 사찰 건물은 청나라 때 복원한 것이다.

 


영은사 가는 길, 사원 앞의 비래봉 암벽에는 마애불상이 388체나 조각돼 있다. 절 앞 사천왕상을 모신 불당에 있는 ‘운림선사’ 편액은 이곳을 찾은 청나라 강희제가 안개와 숲에 둘러싸인 절의 모습에 감명받아 친필로 쓴 것이다. 이 불당 뒤로 돌아 30분쯤 산길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20m 높이의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원래는 당나라 때 있었던 불상을 복원하기 위해 1950년대 24개의 녹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상 뒤편에는 동자가 구도행각을 하면서 53명의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나타내는 150개의 인물상들이 그려져 있다. 고기를 먹는 승려로 유명한 ‘광승’의 모습도 보인다.

 

 


불교는 후한 때 중국에 들어온 이후, 당나라 무종과 5대10국 시절 후주의 세종대에 이르러 잠시 배척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지만, 다시 송나라 때 황실의 보호를 받아 융성기를 맞는다. 5대10국과 북송을 거치면서 선종이 점차 융성하더니 남송 때는 불교 종파의 대종을 이루게 된다. 당시 사인층에서는 선이 행해지면서 수련을 중시하는 풍조가 형성됐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정토종이 보급되면서 현세에 서방정토 세상을 꿈꾸는 미륵 신앙이 급속히 퍼져나간다. 원나라 말기 반란의 도화선이 된 것은 미륵의 도래를 믿는 백련교였다. 백련교는 동진시대 승려 혜원이 창시한 종파였고, 그 후 마니교의 영향을 받아 미륵을 믿고 천태의 교의를 받들어 염불 참회와 금욕주의를 내세웠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도 젊었을 때는 백련교 신자였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영혼은 만물을 통제하는 신통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 왔다. 따라서 신통력을 부리는 귀신과 요괴의 존재를 인정했고,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점술과 풍수, 팔자와 참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해서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며, 숭배를 한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종교적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실주의적인 중국 민족은 단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만 따질 뿐이었다.


불교의 세계관은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에 가깝다. 부처는 단지 ‘깨달은 자’라는 호칭에 불과하다. 불교가 최초로 중국에 전래되고 나서 실용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중국 민족들에게 잘 먹혀들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일부 사인층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에는 통용되지 않다가 ‘중국화된 불교’ 이른바 ‘정토종’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일반 민중의 삶은 거듭된 자연재해와 외침, 반복해 일어나는 농민 반란과 국가의 수탈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고,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었으며, 영혼을 위로받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역사를 통해 종교란, 칼 맑스가 주장한 대로 “대중이 반란을 일으킬 힘을 마비시키고 마약에 의한 환각 상태에서처럼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도록 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는 중국의 전통 종교인 도교와 결합돼 정치적 도피처로서 기능했다기보다 난세에는 저항의 근원지로서 역할이 더욱 컸다. 따라서 맑스가 종교를 바라본 다른 한 측면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였고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 되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이 피우는 향은 우리나라와 달리 크기가 장작만 하다. 이곳 영은사에도 수 많은 방문객들이 장작을 태우며 꿇어 엎드려 절을 한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그저 나와 내 새끼 건강과 복을 빌며 내려가는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망해조사 / 유기경(송나라 때의 시인)

동남의 형승이요 삼오의 도회라.
전당이 예로부터 번화하도다.
내 버들과 그림 그린 다리와 바람의 발과 푸른 막이라.
참치(길거나 들쭉날쭉하여 같지 않음)한 십만 인가로다.
구름 나무 언덕에 모래를 둘렀도다.
성낸 물결이 상설을 걷는 듯하니
천참(천연의 요충지)이 가히 없도다.
저자에 구슬을 버리고 집에 비단을 매었으니
호사를 다투는도다.
겹겹한 호수와 첩첩한 뫼 맑고 아름다우니
삼추의 계수열매와 십 리의 연꽃이 있도다.
저 소리는 갠 빛을 희롱하고, 연 캐는 노래는 밤 물결에 떴으니
기뻐 즐기는 이는 고기 낚는 늙은이와 연 캐는 계집이로다.
일천 말 탄 군사는 높은 기를 꼈도다.
때를 타 풍류를 들으며
산수의 경치를 읊어 구경하는도다.
다른 날의 좋은 경을 그려 가져
봉지에 돌아가 자랑하리로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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