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부부 이효정·박두복 이야기(9)

울산저널 / 기사승인 : 2019-03-13 10: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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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박두복이 이런 혼란 상황에서 무엇을 했는지 확인할 자료는 매우 적다. 이효정은 박두복이 해방 이후에도 수시로 경찰에 붙잡혀 갔다고 증언한다. 그해 11월 조선공산당이 북과 남으로 나뉘면서 만들어진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에 참여하고, 1948년 8월 조선로동당(朝鮮勞動黨) 결성 시기 8월 28일 해주에서 열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다. 남로당은 당시 지하로 들어간 상황에서 비밀(지하)선거로 진행됐는데 울산 대표로 고원우와 함께 참석했다는 신문 기사가 있다.

 

▲ 경남의 지역인민위원회 대표와 주요인물


그리고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1일 서울시경에서 남로당서울시당 재건조직 체포사건을 발표할 때 ‘지도(오르그)’란 직책으로 검거자 명단에 들어 있다. 보도에 따르면 3월 말에 검거된 것으로 보이며 김삼룡과 이주하(李舟河)가 3월 27일 특경대에 체포되기 직전으로 짐작된다.


이효정은 박두복이 떠난 1946년 말 태화국민학교 선생님을 그만두었다. 남편 박두복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시로 찾아오는 경찰 때문에 더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더불어 울산의 분위기는 미군정을 규탄하고 우익들의 득세를 막기 위한 민중봉기가 잇달아 일어나는 형국이었다. 그 시작점은 이효정과 관련이 깊은 이관술 등이 소위 ‘정판사 위폐사건’(精版社僞幣事件)으로 구속되면서부터였다.


정판사는 근택(近澤)빌딩(서울 소공동)에 있던 인쇄소로 조선공산당 당사의 1층에 있었다. 조공은 일제시대 지폐를 찍었던 고노자와인쇄소(近澤印刷所)를 적산으로 불하받아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간했다. 공산당 사무실은 1946년 1월부터 같은 건물에 입주했다.

 
문제는 일제 때부터 인쇄소에서 지폐를 인쇄했던 직원 김창선이 1945년 9월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할 때 백원권 인쇄판 2개 조를 빼돌리며 시작됐다. 김창선은 빼돌린 징크판의 일부를 10월 중순 양승구라는 우익 계열 인물에게 팔아넘겼다. 양승구는 여러 대의 소형 인쇄기를 구입해 자신의 독촉사무실에서 지폐 위조를 시도했으나 장비와 기술이 부족해 거듭 실패해버렸다. 이에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보려고 상대를 물색하다 중부경찰서에 적발된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미군정은 김창선이 정판사의 기술과장이란 점을 들어 조선공산당이 위폐를 찍어냈다는 쪽으로 사건의 진상을 왜곡해 몰아갔다. 백원권 원판으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최종 1200만 을 위조해 이관술에게 제공했고 이를 공산당의 활동비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4~5일 사이에 양승구, 이원재 등 일당 7명을 체포했고 5월 7일엔 정판사 직원 14명을 체포했다. 이날 이관술은 공산당 재정부장으로 경찰의 체포에 항의하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면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리고 5월 14일 장택상이 직접 나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산당이 대량 위조지폐를 찍어 냈다고 발표한 것이다. 5월 16일 이관술과 권오직(權五稷)은 성명을 내고 “위조지폐 사건은 우익 반동파의 한 개의 추악한 범죄일 뿐”이며 조선공산당을 “허구의 범죄 속에 몰아넣으려는 음모”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위조지폐 사건이란 그림을 이미 짜놓은 상태에서 미군정은 수백 명의 미군 장교와 헌병을 대동해 <해방일보>를 압수수색하고 정간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이관술은 7월 6일에 체포된다.


이효정은 정판사 사건의 소식을 계속 들었을 것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계속 키웠고, 우익 계열은 신탁통치 찬반 혼란 이후 공산당을 공격할 최대의 호재로 삼았다. 사건 시작부터 체포 소식 그리고 이관술을 구명하기 위해 이 사건이 억울한 음모임을 밝히는 신문 기고가 줄을 이었다. 이효정의 친구이자 이관술의 동생인 이순금도 7월 15일 <현대일보>에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글을 적었고 9월 18일 <독립신문>에 다시 기고한다.


이효정은 누구보다 이관술의 결백을 믿었다. 하지만 울산읍내의 우익들은 달랐을 것이다. 정판사 사건과 울산 출신의 조선공산당 지도자 이관술의 구속과 재판은 우익의 입지를 충분히 늘려줄 기회였다.


9월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의 파업이 시작됐다. 해방 후 최대의 노동조합이었던 전평은 서울과 부산의 철도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총파업을 진행했다. 조선공산당도 정판사 사건 이전까지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제 ‘신전술(新戰術)’을 발표하며 방향을 전환했다.

 

▲ 정판사 위폐사건에 대한 조선공산당 성명


9월 30일 경찰이 부산과 경성의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10월 1일 대구부터 민중항쟁이 벌어졌다. 심각한 식량난에도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했고,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해 불만이 컸던 상황이었다.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시작된 봉기는 무려 3개월 동안 전국에서 계속됐다. 울산에서 벌어진 대표적 사건만 꼽자면 10월 11일 범서면, 14일 서생면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나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청과 경찰이 대규모 검거에 나서면서 울산도 곳곳에 피바람이 불었다.

더 이상 못 만날 이별의 시간

이효정은 울산을 떠나기로 완전히 맘을 먹었다. 태화초등학교 교사를 사직하고 이듬해 1947년 봄, 먼저 아들 둘만 대구로 보냈고 그 뒤에 딸과 친정어머니와 함께 대구로 갔다. 거기에 당숙 이병기 가족과 작은할아버지 이동하가 있었다.


이효정은 <대구신문>의 교열기자로 일했는데 좌익인사 검거로 실적을 올리던 경찰에 신분이 들통나 끌려간 일도 벌어진다.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이 강제로 연행할 때 어린 딸이 울면서 붙잡자 경찰에게 뺨을 맞고 발로 차여 다치는 일도 있었다. 취조 중에 팔이 부러지는 고문을 당했고, 두 달 정도 아픈 팔로 유치장에 갇혀 지냈다. 이효정은 그때 당한 고문이 일본 경찰에게 당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1950년 4월 초, 남편 박두복의 검거 소식을 듣게 된 곳도 대구였다. 남로당을 재건하다 붙잡힌 박두복은 ‘지도 (오르그)’란 직책으로 명단에 올라있었다. 검거는 3월에 됐는데 김삼룡과 이주하(李舟河)가 3월 27일 특경대에 체포된 후에 보도한 것이다. 그 뒤 이효정에게 박두복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는 연락이 왔다. 면회는 한 차례 했다고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한 순간 남편 박두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됐다. 38선을 넘어 빠르게 서울로 밀고 오는 북한군의 위세에 혼란에 빠진 국군 사령부와 정부는 서대문형무소에 수형된 좌익들을 사살했다. 먼저 인민군의 서울 입성과 국군의 한강 이남 후퇴 직전 김삼룡과 이주하 등 핵심 인물들만 골라 6월 28일에 총살했다. 박두복은 그날 오후 서대문형무소를 접수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됐다. 예상보다 빨리 인민군이 도착한 터라 대규모 총살을 피한 것이다. 실제 국군은 인천과 대전형무소 등 각 지역 형무소의 좌익사범과 보도연맹(保導聯盟)원을 전쟁 초기에 집단 학살했다. 특히 이관술을 비롯해 2000여 명이 끌려 나와 사살당한 대전형무소의 경우 국방부가 1967년에 발간한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에서는 중요한 수훈으로 자찬했다.

    
박두복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뒤 월북한 것으로 짐작된다. 인민군에 참전했다거나 북에 가서 어떤 직책을 맡았다는 기록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이효정, 박두복 집안은 모두 한국전쟁 기간에 쑥대밭이 된다. 이효정의 작은아버지 이병기는 한국전쟁 말미에 보도연맹 또는 별도의 조직사건으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박두복의 숙부 박학규를 비롯해 친동생 둘과 사촌이 울산경찰서에 구금됐다가 8월, 웅촌과 청량의 산자락에서 총살당했다. 울산 동면의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 중에는 이효정이 보성학교에서 일할 때 교장인 윤덕조를 비롯해 교사와 학생 출신들이 많았다. 이효정 다음으로 교사를 맡았던 장기준은 학교 설립에 동참했던 장병준을 비롯해 집안 식구 10명과 함께 희생됐다.

      

▲ 울산 보도연맹원과 민간인 학살지 표지판, 웅촌면 대복리 오복재


이효정과 자녀들은 무사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고 기뻐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울산사람만 정부에서 설치한 과거사위원회의 추정치가 최소 870명이다.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난 뒤 꾸려진 유족회가 한 달 동안 총살 장소를 눈물로 헤집고 찾아낸 두개골만 825개였다.


이효정은 연맹원을 모집하고 정부가 할당한 인원이 부족할 때 강제로 채워 넣던 1949년 울산에 없었던 덕분에 화를 피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뒤 잠시 포항을 거쳐 경주로 이사 갔을 때부터 월북한 남편 문제로 사찰 명단에 올라 경찰에 불려다녔다. 아들 박진수가 성장하면서 물려받은 연좌제는 1990년대 후반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증언한다.


특히 1967년 박두복이 간첩으로 울산 동구에 왔다 검거를 피해 돌아간 소위 ‘오좌불간첩단’ 사건 때 큰 봉변을 당했다. 당시 서른 살이 된 아들이 서울에서 직장을 얻자 이효정 가족은 다 함께 이사를 갔다. 하지만 간첩 사건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효정뿐 아니라 아들 진수도 보안사에 끌려가 취조당했다고 증언한다. 그때 상황을 2009년 3월 1일 EBS에서 방송된 이효정의 인터뷰로도 들을 수 있다.


가족들은 박두복이 간첩으로 왔었다는 사실을 지금도 반신반의한다. 박두복이 울산에 온 것을 한 명의 목격자 진술만 가지고 발표했다고 말한다. 사건을 더 확인할 자료는 전혀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울산과 인근에 수시로 비슷한 형태의 간첩이 등장했던 기록은 많이 있다. 결국 울산 동구의 박두복 집안은 보도연맹 희생자에 이어 간첩 사건까지 겹치면서 대부분 고향을 등졌다. 아들 박진수도 2006년 어머니가 국가유공자가 되기 전까지 집안의 조사(弔事)가 있을 때나 내려올 만큼 고향 동구는 멀어진 땅이었다. 그렇다면 남쪽에 남아 고초를 겪은 이효정은 북으로 간 박두복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참 어질고 착한 사람이었지요. 집 식구가 굶을망정 이웃이 굶으면 못 참을 만큼 의협심이 깊고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2남 1녀를 낳고 기른 7년간. 나에겐 짧지만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가고 난 이후에 내가 한 번 면회 가고 뭐 갈 새도 없어요. 섭섭하지 왜 섭섭 안 해? (원망도 많이 하셨겠어요?) 원망 안 해요. 뭐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 EBS 3.1절 특집-독립운동가 이효정의 나의 이야기, 나레이션과 인터뷰


이효정은 자신이 기억하는 박두복에 대한 원망이 크지 않다. 남편과 자신이 겪은 일들을 ‘뭐 그만한 사정’이란 말로 녹여낸다. 어쩌면 일제강점기와 해방된 조국에서 비슷하거나 더 심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년의 이효정 여사

     

울산 광복절 기념식에서 첫 호명

2018년 8월 15일, 광복 73주년 울산기념식이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렸다. 6.13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이 취임한 후 열린 첫 국경일 행사였다. 이날 송철호 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울산시민들에게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를 호명했다. 박상진과 최현배 그리고 3.1 만세운동 때 언양, 병영, 남창에서 희생됐던 분들이 주로 언급됐던 기존 광복절과 다른 모습이었다.


보성학교 설립자 성세빈,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함께하다 고문사한 서진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이름이 연이어 나왔다.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의 이름도 함께 호명됐다. 일제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고 항일교육자란 설명과 함께 같은 집안의 친척이 항일 시인 이육사라는 보충 설명까지 더했다.


이날 큰아들 박진수가 특별히 초대됐다. 그가 고향에서 참가한 첫 광복절 행사였다. 태어난 곳이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지만 울산은 애증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어도 이념의 갈등 탓에 가족들은 모진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뒤늦게 어머니가 받은 작은 훈장이 그나마 국민으로 인정해 준 면죄부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 남은 숙제가 많다. 후손뿐 아니라 국민들이 겪은 사회적 트라우마는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 과정에 수많은 이들이 이주해왔고 세월도 많이 흘러 울산의 과거를 기억하는 원주민의 수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이곳에 발 딛고 살아갈 이들은 이주민과 원주민의 구분 없이 트라우마로 남은 사회의 아픔을 치유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의 구성원이 미래를 향해 제대로 나설 수 있기 위한 숙제일 것이다.


이효정과 박두복 두 사람은 결코 영웅이 아니다. 흠도 있고 실수도 있는 보통의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선택했고, 식민의 땅에서 만난 사회주의는 너무 옳게 다가왔다. 하지만 분단 이후 대한민국에 남은 이효정과 그 후손들의 고통은 바로 얼마 전까지 현재진행형이었다. 이효정이 국가유공자가 된 지금도 마음 깊은 곳까지 치유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시류에 쓸려 안동에서 만주로 그리고 경성과 울산을 오갔고 대구, 포항, 경주 그리고 마산에서 부천으로 떠다닌 100년의 시간을 말로 다 풀어낼 수도 없다.

 
이효정과 박두복의 아들 박진수는 울산 광복절 행사에 오면서 어머니의 시집을 가슴에 품고 왔다. 1989년과 1995년에 냈던 두 권을 2005년에 <일흔에서 여든을 살면서>로 묶어낸 합본 시집이다. 그 속에 담긴 짧은 시 한 편으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약속//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 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배문석 시민기자,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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