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가 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5-08 10: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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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남송의 수도 항저우

여행 기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애초에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와 손권이 세운 동오의 수도 난징까지 다녀올 작정이었으나, 중국의 ‘춘절’(설)과 겹쳐 2월 15일까지 기차표뿐만 아니라 버스표도 모두 매진이었다. 중국에서는 춘절을 보통 15일씩 지낸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이번 여행은 항저우로만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숙소로 잡을 생각이었던 서호빈관도 현지에 와서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터무니없이 비싼 호텔에서 묵게 됐다.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것 외에 특별할 것도 없는 호텔에서 하룻밤 자는 데 거금을 소비했다.


그래도 항저우는 역시 축복받은 땅이다. 계절적으로 2월 초순이면 아직 맹렬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의 날씨와 다르게 이곳은 화창한 봄날이다. 낮 동안은 겨울 잠바는 물론 두터운 도꼬리를 벗고 다닐 만큼 덥게 느껴졌다.


당나라 때부터 중국인들은 강남을 가리켜 천당에 비유했다고 한다.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 북부를 합쳐서 장강의 남쪽을 강남이라 불렀는데 이곳은 비옥한 장강의 삼각주가 빚어낸 곡창지대이기도 했다. 또한 이 일대는 예부터 인재와 문물이 집결했던 곳으로 유명했다. 청나라 때만 하더라도 전국의 과거시험 합격자 중 60~70%가 강소성과 절강성 출신일 정도였다.

 

 


절강성 항저우는 비단과 차의 산지로 유명하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나무, 호수와 강이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항저우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했다. 18세기 중엽, 1765년 베이징을 다녀온 홍대용의 연행록인 <을병연행록>을 보면, 항저우 출신의 선비 ‘반생’이 “빼어난 백성이 많고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리나, 다만 사치를 숭상하고 순박한 풍속이 적다”라며 항저우의 풍속을 전하는 모습이 나온다. 또한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는 그의 저서 <유림외사>에서 강남 지역의 부유함에 대해 “성안의 수십 개 큰 거리와 수백 개 작은 골목에 상가들이 즐비하고, 큰 거리와 작은 골목을 모두 합치면 크고 작은 식당이 600~700개, 찻집이 1000개가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항저우는 중국인들이 가장 가 보고 싶은 곳으로 꼽는 도시이기도 하며 가까운 상하이 사람들은 돈 벌어서 항저우에 별장을 짓고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항저우는 절강성의 성도다. 북송이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 강남으로 내려와 남송 정권을 세운 뒤, 1132년 이곳 임안(항저우)에 임시 수도인 ‘임안부’를 설치하고 이를 ‘행제’로 삼았다. 행제란 황제의 임시 거처를 의미한다. 남송 사람들에게 마음속의 수도는 여전히 카이펑(개봉)이었고, 항저우는 임시 수도였을 뿐이었다.

 

 


남송 황실이 금나라에게 빼앗긴 실지 회복에 얼마만큼 집착했는지는 남송의 여섯 황제가 쓴 능묘만 봐도 여실히 드러난다. 남송 여섯 황제의 능묘는 모두 절강성 소흥에 있는데, 능묘의 방향이 남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원칙을 깨고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다. 임시 수도인 임안에서 언젠가는 북쪽 수도 카이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염원에서였다. 임시 능묘라는 뜻에서 남송의 능묘는 그 규모도 작았다.


북송 황실의 후예 가운데 유일하게 ‘정강의 변’ 당시 카이펑에 있지 않았고 난을 모면한 인물이 있었다.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강왕 조구’였는데, 그가 바로 남송의 첫 번째 황제가 되는 고종이다. 남송 이전에 항저우를 수도로 삼았던 나라는 5대10국 시기 남방의 10국 중 하나였던 오월(907~978)이었다.


남송 시대에는 국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생산력이 높아져 국가 재정은 총량에서 보면 오히려 북송대를 앞질렀다. 수도 임안(항저우)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 1275년 175만 명까지 늘어났다. 예로부터 중국의 인구밀도는 황허 유역이 조밀했고 장강 이남은 희박했다. 그러나 남송 시대에 이르면 장강 이남의 인구가 급증해 전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토지 겸병과 대토지 소유는 더욱 진행돼 관호, 형세호는 광대한 경작지를 장원으로 경작했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전호가 돼 장원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 남송 시대에는 장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돼 농업 생산이 크게 향상되고 운수교통이 발달했다. 농업 생산의 향상은 ‘수리전’의 조성에 힘입은 경지면적의 증가, 이를 경영하는 장원제의 보급, 벼의 품종개량, 벼와 밀의 이모작, 농기구의 개량과 보급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래 중국에서 벼의 재배는 주로 남방에서 이루어지고 밀 등의 잡곡은 주로 북방에서 경작했다. 하지만 남송 시대가 되자 화북인이 대거 강남으로 유입되면서 북방의 면류를 먹는 풍조는 강남에서도 일반화돼 밀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강남에서 맥작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맥작의 발달은 강남의 생산력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북송·남송 시대 과거시험의 합격자 수는 각 지방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남송 시대 과거시험 합격자 수는 줄곧 복건성 출신이 1위를 차지해 왔다. 인쇄·출판 산업의 경우에도 건녕(복건성)이 제일 많았다. 이는 복건성에서 활약한 주희의 영향도 있고, 이 지방에서는 활자를 새기기 쉬운 ‘용수’를 쉽게 구입할 수 있어 대량출판에 유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복건성은 남송 말기에 천하제일의 문화의 땅이었다.


북송 시대 왕안석의 ‘신법’은 생산력 증진과 재정난 타개를 도모하고, 부국강병을 성취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법, 구법 간의 당쟁은 북송의 국운에 큰 해악을 끼쳤다. 게다가 신법의 흐름에 편승한 ‘채경’의 악정은 새롭게 흥기한 금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송나라를 망국으로 이끈다. 부활한 남송의 정국을 장악한 것은 구법당 정치가들이었다.


남송 시대에 정치의 핵심은 금나라와의 관계였는데, 금나라와 화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를 둘러싼 의견대립이 정치의 주된 의제가 되었다. 한편, 금은 송나라의 수도 개봉부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점령 후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어떤 준비나 계획도 없었다. 건국된 지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은 금나라가 대국인 송나라를 이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군사력도 있었지만 시운도 많이 따랐다. 중국의 동북 산속 오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여진족이 문화 수준도 높고 게다가 인구도 많은 한족을 통치할 실력을 갖추고 있을 리 없었고, 그들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통치책이 괴뢰국가를 세워 송의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방책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카이펑 공격 때 인질이 되었던 ‘장방창’을 황제로 낙점한다. 1127년 3월 7일 장방창은 황제로 즉위했다. 나라 이름은 ‘대초’, 수도는 금릉(강서성 남경시), 영역은 황하 이남이었다. 그러나 장방창은 재위 32일 만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훗날 남송의 황제로 등극하는 고종을 찾아가 사죄를 하고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금은 새로 획득한 하북과 하동 땅의 영유를 확실히 굳히는 것이 시급했다. 1130년 9월 금은 제남(산동성) 땅의 ‘유예’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다시 한 번 괴뢰정부 ‘대제’를 세운다. 제가 금에게서 받은 영토는 산동과 하남, 강소와 안휘성 북부였다. 다음 해에는 금이 새롭게 확보한 섬서성과 감숙성 동부의 땅까지 받았다. 유예는 1132년 대제의 수도를 복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옮긴다.

 


장강의 지류인 ‘회수’는 금·제 연합군과 남송이 일진일퇴를 연출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1137년 ‘대제’는 금나라에 의해 폐지된다. 금이 종래의 하남에 대한 간접통치를 그만두고 직접통치로 방침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근 10년에 걸친 하남 지역의 통치 경험을 토대로 이제는 한인을 직접 통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한편 남송 정부는 금나라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화친과 항전으로 갈려 있었다. 그러던 중 1126년 금군이 카이펑을 공략했을 때 강경론을 펼쳐 금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진회’가 남송으로 귀환한다. 진회는 금에 억류돼 있으면서 생각이 바뀌어 화친론자로 변해 있었다. 고종은 금나라의 국정에 밝고 인맥도 있는 진회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그에게 강화교섭을 맡긴다. 결국 오랜 교섭을 통해 1142년 금과 남송 간의 2차 화의가 이뤄진다. 이렇게 힘겹게 얻은 금과 남송간의 화의로 이후 양국은 100여 년간 평화를 얻게 된다.


금나라의 멸망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1230년 칭기스칸이 사망하고 우구데인 칸이 군사를 이끌고 산서로 남하하고 별군은 섬서로 들어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을 공략했다. 몽골군의 포위 공격으로 양식이 바닥나자 금의 마지막 황제 애종은 채주(하남성 여남현)로 들어갔다.


이미 양식이 바닥나 있던 상태에서 금의 애종은 3개월 동안 말 안장과 신발, 찢어진 북의 가죽을 삶아 먹다가 끝내는 사람의 뼈와 가축의 뼈를 미나리 무침에 섞어 먹었고, 나중에는 노인과 패배한 장병을 죽여 그 고기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참상을 연출했다.
마침내 죽음이 눈앞에 이르러 애종은 “내가 죽으면 불을 지르라”는 명을 남기고 자살했고, 그의 대신과 장군, 군사 500명이 모두 그를 이어 자결했다. 이로써 금나라는 태조 아골타가 황제를 칭하고 나라를 세운 지 10대, 120년, 서기 1234년에 멸망한다.


몽골에서는 우구데이가 죽은 후 뭉케 칸이 즉위하기까지 칸의 교체를 둘러싸고 국내정세가 불안정해 송나라에 대한 공격도 중단됐다. 그러나 1251년 뭉케가 대칸에 오르면서 대송 공격이 재개됐다. 이때 쿠빌라이는 관중과 하남의 땅을 영유하게 돼 화북에 근거지를 마련했고 남방의 대리와 교지, 고려를 정복하고 남송을 에워싸는 포위망을 완성한다.


1264년 송의 도종이 제위에 오르고 원 세조 쿠빌라이는 대칸에 올라 대도(베이징)를 수도로 삼고 양양 공략을 추진한다. 1268년 원의 대군이 양양과 번성(무한)으로 쳐들어온다. 양양과 번성은 10년치 식량을 모아두고 농성전을 펼치며 성을 지켰지만, 화포를 동원한 원의 공략에 4년 만에 번성이 먼저 함락되고 6년 만에 양양이 함락된다.


남송은 도종이 사망하자 네 살 난 태자 공제 현이 즉위한다. 그러나 1276년 수도 임안(항저우)이 함락되고 남송은 멸망한다. 하지만 남송의 명맥은 이어져, 선대 도종 황제의 두 아들 ‘시’와 ‘병’을 중심으로 남송의 마지막 땅 복건성에서 항쟁을 이어간다. 하지만 복주까지 원군에게 넘어가자 단종, 시를 모시던 장세걸은 원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남베트남으로 망명정부를 옮기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동성에서 병사한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고작 11세였다.


단종이 사망하자 이번에는 육수부가 나서 “도종 황제의 아들 한 분이 아직 살아 계신다. 옛날 일군일성으로도 중흥한 예가 있다. 하늘이 송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나라를 부흥시키지 못할 것도 없다”는 말로 흩어지려는 병사들을 설득한다. 당시 8세인 위왕, 병을 황제로 삼고 광동성 신회의 담강과 바다의 물이 합류하는 애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애산은 섬이었다. 육수부는 산에 나무를 베어 행궁 30간, 군대 막사 3000간을 지었고 관민 20만 명은 대부분 배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278년 원군이 이곳까지 추격해 오자 이때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해전이 벌어진다. ‘애산해전’(1279)이다. 양측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병력 수만 20만 명이 넘었고, 동원된 전함만 1000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원군에게 패하자 육수부는 먼저 처자를 바다에 던져 죽였다. 그리고는 의관을 정제하고 “폐하, 죽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한다. 그때 황제의 나이 9세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후궁과 여러 신하가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으니 이때 물 위로 떠오른 사체만 10만 명에 이르렀다. 1279년, 송은 북송과 남송을 합쳐 18대 320년, 남송만을 놓고 보면 9대 152년을 끝으로 멸망했다.


남송이 멸망하자 몽골족은 전 중국을 점령하고 베이징을 황도로 삼게 된다. 항저우는 번창하는 상업도시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학살의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186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들 반란군은 항저우를 포위 점령하게 된다. 이때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고 질병과 굶주림, 전쟁으로 인해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던 적도 있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은 물론 심지어 자식을 바꿔서 잡아먹는 지옥 같은 세상이었다. 세상의 천당이라던 항저우가 불과 몇 달 사이에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최근 항저우시에서는 남송 시대의 유적, 종루를 중심으로 남송타운을 세워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남송타운에는 간혹 청나라 시기 세워진 고풍스러운 유적들도 볼 수 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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