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과 경남도연맹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3-06 10: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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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올해는 10년 단위로 끊어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억해왔던 주요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기,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70년. 그 중 한국전쟁은 그 뒤에 벌어진 수 많은 사건들과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 해방을 맞이한 1945년부터 만 5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초기 왜 수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다가올 미래를 포함해 시간적 위치를 찍는 좌표가 찍혀 있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 새롭게 출발하려면 직시해야 할 순간이다.
더구나 울산은 한국전쟁 발발 뒤 3개월 안에 최소 87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는 국가기구에서 공식 조사해 발표한 결과지만 ‘언제, 왜, 어떻게’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게다가 학살이 빚어낸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시민사회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1945년 해방 후 울산부터 1950년 한국전쟁 기간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의 해법을 찾아가고자 한다.<편집자 주>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습격 사건

보도연맹 결성이 공표된 시기엔 이승만 정부가 권력을 위협하는 정치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두드러진 정치적 상황도 한몫했다. 먼저 1949년 5월과 6월 두 차례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해 소장파 국회의원 13명을 국가보안법으로 검거한 사건이 벌어진다. 


기소 내용은 해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한국에 내방해 있던 유엔한국위원회에 외군 철수를 건의하고 이들이 내건 미소군의 완전철수와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 ‘평화통일방안 7원칙’ 주장 등이 남로당 지시였다는 것이었다. 국회에서는 5월 23일 임시국회를 열고 구속된 의원들의 석방 결의안을 놓고 이틀간 격론을 벌였지만 끝내 88 대 95로 부결되기도 했다. 7월엔 구속된 국회의원 변호인들마저 법조인 프락치 사건을 만들어 체포한다. 이때 조평재, 백성황 등 변호사들이 구속됐다. 

 

▲ 국회 프락치 사건 공판 진행 기사(왼쪽). <경향신문> 1949년 11월 18일


당시는 이승만 정부가 국회에서 의결한 ‘지방자치법’안과 ‘농지개혁법’안 모두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반송한 때였다. 이승만 정부는 개혁적인 입법을 막고 정권을 비판하는 국회의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모두 옭아맸다. 아이러니한 것은 해당 국회의원 대부분이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거나 비판했던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 사건은 6월 6일에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적극적인 친일경력으로 악명을 떨친 고위급 경찰간부 노덕술, 유철, 최연 등에 대한 체포와 수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경찰이 동원됐다.
발단은 경찰이 벌인 습격사건 이틀 전 6월 4일, 친일경력을 가진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과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까지 체포되면서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위축돼 있던 일제 경찰 출신 간부들은 반민특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왔고 국회 프락치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 맞춰 병력을 투입했다. 실제로 서울 관내 경찰들을 차출한 6일 상황에 앞서 6월 3일 군중 300여 명을 동원해 사무실 습격을 한차례 진행한 바 있다. 


이렇게 경찰이 앞장선 것은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한 후 취급건수 총 688건 중 친일경찰 관련 건이 37%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습격 사건이 벌어진 뒤 6월 9일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지시했다고 밝혀 더 큰 파장을 낳았다.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이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한 80여 명의 경찰을 앞세워 6일 오전에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이들은 특위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친일파 관련 조사서류와 집기들을 강탈했다. 같은 날 오후 서울시경찰국 사찰과 소속 경찰 440명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 특별경찰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해 단체행동에 나섰다. 

 

▲ 반민특위 특별경찰대에 체포된 친일파들. 위 사진 맨 앞 노덕술 <주간서울> 1949년 4월 4일


국회는 6월 9일 책임자 처벌과 반민특위 원상 복귀를 정부에 요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요구를 거절하고 6월 11일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된다며 특별경찰대를 해산해버렸다. 결국 7월 6일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 반민특위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이에 반대하는 김상덕 위원장 등 특별조사위원 전원이 사퇴했다. 1949년 8월 22일 반민특위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 시기에 국가보안법을 설계했던 사상검사들은 서울 시내 관제 데모를 진두지휘했다. 6월 중순 서울 도심에서 열린 첫 반공시위부터다. 오제도는 1970년대 회고록에서 본인이 그 시위를 계획하고 가장행렬까지 진두지휘했다고 밝혔다. 


“서울 중심가에서 반공시위를 단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인 반공을 위한 假裝行列(가장행렬)을 하기로 했다. 49년 6월 중순 어느날 오전 10시 서소문 근처에서 출발해서 반공시위 행렬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사열대를 지나 종로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게 계획이 됐다...신문지 문짝 새끼줄 허리띠 옷가지 등을 찢어 血書(혈서) 등을 준비했다. 이리하여 ‘金日成 打倒(김일성 타도)’ ‘대한민국 절대지지’ 등의 플래카아드와 오랏줄에 묶인 金日成(김일성)의 허수아비를 앞세운 최초의 이색적인 반공시위 행렬 속에...”-吳制道(오제도) (8) 最初(최초)의 反共示威(반공시위) 1976년 6월 21일 <동아일보>
 

보도연맹 가입대상

보도연맹 결성 당시 가입대상은 원칙적으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사람들 전부다. 법을 위반해 기소된 뒤 처벌이 확정된 경우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검찰에서 기소가 유예된 이뿐 아니라 수사단계에서 석방된 이도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국가보안법이 범죄행위 결과에 대한 처벌뿐 아니라 관련 목적인 ‘결사나 집단 구성원’까지 처벌하는 법이기 때문에 해당자는 최소 100만 명까지 늘어난다. 따라서 남로당을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 정당과 단체(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조선교육자동맹, 조선민주학생연맹, 전국농민연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조선협동조합중앙연맹, 반일운동자구원회)에 가입했다면 모두 해당한다. 


게다가 친이승만 정부가 아니면 전부 반국가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좌익전향자단체’ 뿐 아니라 중도 민족주의 세력인 한독당, 민주국민당, 김구 계열까지 보도연맹 조직원 참가 대상은 늘어난다.
자발적으로 가입할 경우에는 반드시 좌익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재한 ‘양심서(良心書)’를 제출해야 했다. 만약 허위 또는 기만의 진술이 있다면 가장 자수자로 인정해 다시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도록 돼 있었다. 그렇게 가입 후 일 년 동안 자백한 내용을 꾸준히 검열받았다. 

 

▲ ‘양심서’. 출처=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가입 후에는 조직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세 가지 등급으로 분류했다. 먼저, 강령을 지지하고 자발적으로 가입한 경우 ‘평회원’ 자격이 주어졌다. 그다음 3명 이상을 포섭해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는 등 충성을 행동으로 입증하면 ‘정회원’으로 승급됐다. 마지막으로 정회원이 된 뒤 반공활동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되면 ‘특별회원’이 될 수 있었다.


특별회원은 보도연맹 임원이 될 자격을 갖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전향자는 간사장과 명예간사장 등 임원 중 일부만 될 수 있었다. 중앙본부부터 지방조직까지 고위 임원과 실질적인 운영은 검찰과 경찰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결국 전향자들을 보도연맹 틀 안에 묶어둔 뒤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에만 충실했을 뿐 특별한 대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탄압과 전향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중앙본부를 구성한 후 중앙과 지방기관 그리고 대한청년단 조직의 압박을 받았다. 대한청년단은 여순 10.19사건 이후 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가운데 남한 내 확실한 반공세력인 청년단체들을 통합한 것으로 군경 보조 역할을 했던 준군사단체다. 동시에 1949년 10월부터 5주 동안 ‘남로당원 자수주간’을 설정해 ‘참회’할 기회를 주겠다고 설득했다. 이 시기 언론은 ‘전향자 대담’ 같은 보도연맹 관련 기획기사를 쏟아냈고 이름 있는 전향자들에 대해 특별히 다뤘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정지용이다. 정지용은 당시 월북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경찰의 권유를 받아 가입했다고 신문 인터뷰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보도연맹은 문학인 중 자발적인 최초 가입자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 후 양주동, 백철, 황순원, 이태준, 김기림 등이 사상전향자 대열에 합류했다. 자발적이라는 것을 앞세웠지만 실상은 회유를 넘어 겪게 될 불이익 등 협박이 더해진 결과다. 

 

▲ <동아일보> ‘남로당원 자수주간 설정 특별담화’ 1949년 10월 25일


본부 차원에서 예술인들에 공을 들일 때 일반인들 역시 남로당과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몸을 사렸다. 신문에 매일 실리는 탈당과 전향서 명단에 본인의 이름을 올리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정부가 자수 형식을 권했기 때문이지만 기간을 놓치면 체포, 구속 등 법적 조치가 따른다는 통보도 있었다. 결국 5주에 못 미치는 자수주간 동안 전향한 숫자가 정부통계로 3만9986명에 달했고 서울은 1만2196명이었다.


이와 동시에 전국 도, 시, 군, 읍, 면 단위별로 보도연맹 지부가 속속 결성됐다. 서울시연맹은 1949년 9월까지 구별로 지부가 들어섰고, 지방 지부는 10월 말부터 시작해 11월에는 매일 한 개 이상 결성됐다. 


울산이 포함된 경상남도는 11월 13일, 부산 검찰청 회의실에서 도연맹 발기대회를 열었다. 경남도지사대리(내무국장)와 검사장, 경찰국장, 법원장 등을 비롯해 100여 명이 모여 선포대회 준비위원을 선정했다. 15일 준비위원회 회의를 거쳐 11월 20일 부산 중구 남일국민학교(현 광일초등학교)에 천여 명이 모여 경남도연맹 선포대회를 열었다. 

 

▲ <자유민보> ‘천여 명 전향자 참가 본도 보련결성식 대성황’ 1949년 11월 22일

그 뒤 마산에서 12월 2일 결성준비위원회를 거쳐 7일 선포대회를 열었고, 12월 8일 통영과 진주 선포대회, 9일 울산과 남해, 11일 사천과 김해, 12일 동래, 24일 남부산과 북부산 그리고 영도, 1950년 1월 6일 거제, 11일 구포, 18일 부산서면, 21일 방어진읍지부가 차례로 결성됐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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