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3)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 / 기사승인 : 2020-01-09 10: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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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교육 독립운동

지난해 12월 12일 울산시교육청 외솔회의실에서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역사포럼이 열렸다. 울산시교육청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일제강점기 울산 교육현장에서 이뤄진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발굴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벌여왔다. 이를 위해 울산교육 독립운동연구회를 구성하고, 2월 27일 중구 병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울산교육청, 울산초등학교, 울산노동역사관, 보성학교 터, 언양초등학교에 울산교육 독립운동 모바일 페이지로 연결하는 QR코드 현판을 설치했다. 역사포럼은 1년 동안 진행해온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성과를 공유하고 과제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병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의 ‘언양 공립보통학교 출신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 이현호 우신고 교사의 ‘근대 울산지역 교육 상황 연구’,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의 ‘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 원영미 울산대학교 강사의 ‘1910년대 울산지역 학생의 인적 구성과 식민지 교육’, 김정숙 무룡고 교사의 ‘울산교육 독립운동사를 활용한 지역사 현장 체험학습 방안 모색’,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을 QR코드로 연결하다’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김용 울산현대고 역사교사의 ‘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을 지면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울산 사립교육의 자부심, 보성학교

조선시대 울산 동면은 울산도호부 관할 16면 중 하나지만, 종6품 감목관이 관할하던 목장이 설치됐던 곳이다. 1895년 울산목장이 폐지되면서 울산군에 귀속됐다. 감목관이 있던 곳에 1910년 이전 사립 개운학교가 설립됐고, 1920년 폐교된 후 같은 자리에 동면공립보통학교가 문을 열었다.


동면 끝에 있는 방어진은 조선시대 35호가 살던 한가한 어촌이었고, 동면 중 가장 어업이 발달한 곳인 일산진은 1909년 49호 중 41호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897년 오카야마 어민들 40여 명이 삼치어업을 위해 방어진에 출어한 이후, 1909년 오카야마와 카가와현 1800여 명, 4백수십 척이 출어하고 이주자도 늘어나면서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방어진은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업항구이자 일본인 주거지인 식민도시로 변했다.


일본인들의 어업 활동으로 울산 어민들의 어장이 침탈됐고, 조선인의 소규모 어업과 비교되는 트롤어선으로 인한 갈등이 증폭됐다. 방어진 옆에 위치한 일산진은 동면의 남목과 달리 일본인과 대립하면서 강한 민족의식이 형성된다.


사립 보성학교는 1909년 이전 동면 일산리에 세워졌지만, 1911년 사립학교 규칙으로 1912년 폐교됐다. 1920년 성세빈 주도 하에 교사 3명이 야학을 설치하고 무산아동 50명을 가르쳤다. 1922년 건물을 신축해 아동 100명을 가르치는 보성강습소를 개설하면서 이름을 보성학교로 정했다.


낮에는 보성학교, 밤에는 보성야학과 여자야학회가 수업했다. 교사들을 중심으로 동면(同勉)구락부, 학생들을 중심으로는 동면소년회가 활동했고, 1926년에는 동면구락부를 5월청년동맹, 동면소년회를 적호소년회로 개칭했다. 이곳에서 음악회, 축구회, 일요 강좌, 순회문고, 시민대운동회, 경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 1929년 3월 1일 사립 보성학교 학생들. 동그라미 안은 보성학교를 세운 성세빈

 

어풍대 물탕이라 불렀던 약수터이자 조그마한 폭포에 일본인들이 휴게소란 이름으로 2층 목조 건물을 지었는데, 언덕 위에서 바윗돌을 굴려 지붕을 뚫고 유리창을 깨뜨린 사건, 성세빈 교장이 어떤 행사에서 일본 경찰관의 “주의”라는 세 번의 경고도 무시하고 계속하다가 포승에 묶이던 광경, 교사 서진문이 교단에서 일본 경찰에 잡힌 사건, 신학년 교과서 <국어독본>에 ‘국(國)’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일(日)’자를 써넣는 것 등에서 당시 학교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 성세빈의 고종사촌인 서진문은 1928년 일본 히로히토 즉위식을 앞둔 예비검속에 김천해와 같이 체포된 후 항의 단식과 고문으로 석방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다른 곳에 비해 보성학교는 울산군청년연맹, 울산청년동맹, 신간회 울산지회 등 교사들의 주도적 활동이 돋보인다. 성세빈은 동아일보 동면분국장, 울산군청년연맹 집행위원, 신간회 울산지회 임시대회 대표위원 등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고, 고종사촌인 서진문은 1928년 일본 히로히토 즉위식을 앞둔 예비검속에 김천해와 같이 체포된 후 항의 단식과 고문으로 석방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이효정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동덕여고보 서울여학생만세운동과 백지동맹을 주도했고, 보성학교에 근무하면서 졸업생인 박두복과 혼인했다.

 

▲ 이효정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동덕여고보 서울여학생만세운동과 백지동맹을 주도했고, 보성학교에 근무하면서 졸업생인 박두복과 혼인했다.


1929년 2월 일본 경찰이 ‘제2의 모스크바’라 부르는 보성학교에 폐쇄 명령을 내리면서, 교장 이하 교원 전부를 교체하고 군에서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교원을 새로 세우면 인가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 때문에 성세빈과 교사들이 물러나고 이영춘으로 교체됐다. 1929년 신간회 울산지회는 지회 설립 1주년 기념사업으로 ’민간교육공로자 표창식‘을 거행하면서 울산면 성남동 안태로, 동면 일산리 성세빈, 상북면 등억리 김교홍을 선정했다.


보성학교의 운영진은 바뀌었지만, 울산청년동맹 동면지부와 울산소년동맹 동면지부의 활동은 계속됐다. 1931년 9월 9일 방어진 주재소에 “조선 독립 만세, 제국주의 타도”라고 적힌 편지가 배달된 사건이 일어났다. 1933년엔 경남적색교원노조사건 관련자들이 방어진을 통해 일본으로 탈주하려던 사건이 벌어졌다. 경남적색교원노조 23명 중 부산공보 훈도 김경출과 박두복이 보성학교 출신이었다. 1934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보성학교 교원인 장기준, 천순도는 학생들에게 “메이데이 노동자 무산자 단결”이라는 습자 연습을 시키고, “우리들 노동자 무산자는 항상 유산계급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으니 노동자 무산자는 힘을 합해야 한다”는 수업을 해 검거됐다. 1935년 5월 1일에도 방어진 시내 곳곳 전신주에 메이데이 표어를 쓴 전단을 부착해 일산지를 중심으로 한 청년 10인이 검거되고 최도준, 김두생, 정진도 등 3명이 구속됐다. 1935년 울산적색노조사건이 일어났다. 1934년 11월 방어진 해관힐(게통조림) 30여 명의 직공을 선동해 일으킨 동맹파업과 ‘메이데이’ 사건의 배후로 울산읍 김영호(사망), 박상선, 방어진 박학규, 언양 이동개, 서생면 이미동이 검거됐다.

울산 교육 독립운동의 기억과 계승

일제강점기 울산지역 독립운동은 울산에서 태어나 1915~1918년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한 박상진, 1919년 언양과 병영, 남창의 만세운동 등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졌지만, 1926년 순종이 승하한 후 슬픔을 표현하려 했을 때 학교 당국이 불허하자 동맹휴업으로 허락을 받은 6.10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격문, 1930년대 혁명적(적색) 조합 관련 사건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울산 안에서는 1920년대 전반의 청년운동이 서울청년회 계열 울산청년연맹과 화요파와 북풍회 계열의 병영·언양·동면 울산군청년연맹으로 대립하던 상황, 1927년 양 연맹 해체와 울산청년동맹 지부 결성과 관련한 강철, 조형진, 권우락의 구속, 1928년 신간회 울산지회 창립, 울산 밖으로는 1930년대 울산 출신의 이관술, 이순금의 경성콤그룹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등이 관심을 받는 정도였다.


청년회의 모태이자 연결되는 보통학교와 소년회, 청년회가 각 지역에서 대중들과 결합하고 노력한 야학활동 등은 기억이 단절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울한 시기에도 교육을 통해 미래를 꿈꾸고, 대다수 민중을 깨우치려는 활동가들의 노력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8일 ‘궁근노동야학(사설)’의 글은 당시 상황과 열정을 느끼게 한다.
 

▲ <동아일보> 1924년 2월 8일 사설 ‘궁근노동야학’

사람의 졸던 눈을 뜨게 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글’이다. 그들에게 글을 주라, 글을 주라! 글을 주지 아니하고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농부나 모든 노동자에게 ‘가갸거겨’를 주라! 그리하면 그 ‘가갸거겨’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오늘날의 학교와 신문잡지와 모든 서적은 거의 전부가 선민(選民)계급의 독점이오, 그것이 잇게 한 주인이 되는 농민이나 노동자에게는 아주 몰교섭이다. 그네의 땀으로 입고 먹는 선민들에게는 그 은인이오, 주인인 그네에게 적더라도 ‘가갸거겨’를 값을 의무가 있을 것이다.


‘빈부를 등별(等別)하야 전곡(錢穀)을 손출(損出)하야’ 유지비를 삼아 가면서 ‘조선어, 한문, 산술, 일어 등’을 배우려 하는 경남 울산의 궁근정에 사는 ‘빈궁(貧窮)’한 동포들을 생각하여 보라.


노동야학이 금일에 시작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금일에 더욱 긴요한 것은 사실이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나 그 무엇임을 물론이고, 진실로 조선인을 사랑하는 자일진대 빈궁한 동포들에게 ‘가갸거겨’를 주랴고 할 것이다. 그리하는 것이 그들의 사업의 기초인 까닭이다.

일제강점기 교육 독립운동은 울산만의 일이 아니고 오히려 전국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의 일환이지만, 지역의 교육 독립운동 관련 사실을 발굴하고 확산하며, 관련된 자료의 정리와 축적, 잘못된 행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지난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육 독립운동과 관련된 안태로, 김동하, 보성학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교육계에서 꾸준하면서도 가장 존경을 받은 인물인 안태로는 울산군 웅산면 출생으로 30세에 일평생을 빈곤아동교육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개인 재산으로 웅촌야학을 10년간 경영하다가, 울산읍으로 옮겨 20년 넘게 야학교, 부녀야학, 울산유치원 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수감생활을 한 경험도 없고, 직계 후손도 없어서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법인 교육공로자로 지역에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김동하는 언양공보 시절 격문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지만, 언양공보의 졸업생 명부에서 찾을 수는 없는데, 언양초등학교에서 이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해 학교의 학생독립운동 전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울산, 언양, 병영 등 다른 학교들은 이름을 바꾸거나 위치를 옮겨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울산의 대표적인 사립학교인 동구 보성학교는 1938년 성세빈 사망 후 송덕비만 있을 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보성야학과 보성학교의 노력으로 일산지역은 울산의 다른 곳보다 문맹률이 낮아 대개 조선어 독본 3, 4권은 독파한다는 지역교육의 산실이었다. 동구청에서 그 자리에 경로당, 공동식당, 보성학교 전시시설을 준비하고 있지만, 보성학교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기기는 아쉬움이 남는다. 보성학교는 일요 강좌, 경로회, 체육회, 음악회, 연극 공연, 강습회 등 조선인들의 활동이 집결되는 장소로,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 운영자가 바뀐 이후에도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독립투쟁을 한 자랑스러운 공간이었다.

 

교육독립운동만 아니라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일본에 협력했던 인물들의 공로와 허물에 대해서도 확인과 검증이 필요하다. 친일 문제는 처벌이 아니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꼭 기억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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