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에 틀림없이 춘설이 온다

노진경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교육팀장 시민기자 / 기사승인 : 2020-03-05 10: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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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산행

올해도 어김없이 때가 왔다

보통 겨울 동안 추위 덕에 에너지가 똘똘 뭉쳐진 듯 단단했다면,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봄은 풀어져 나른하고 몸이 삐걱거리기 마련이었다. 좋은 날씨를 핑계로 늘어진 몸을 이끌고 나서면 환하게 핀 꽃과 신록의 싱그러움 덕에 다시 생기를 찾곤 했다. 그 기분 좋은 나른함이 봄을 좋아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 철쭉나무에서 겨우내 준비한 봄이 움트는 중


어김없이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이 왔다. 허나 올해 봄을 맞이하는 기분은 여간 밍밍했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이러스 확산으로 일상이 마비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가 뉴스에 그치지 않고 일상의 경험으로 자리 잡았으며, 바이러스 때문에 처음 경험하는 이 사태가 당혹스러웠다.


밍밍한 봄이라도 찾아온 봄소식에 일말의 설렘을 갖고 일기예보를 살폈다. 귀한 눈 구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울산에는 매년 꽃샘추위와 봄비 소식이 맞아떨어지는 날 가지산에 틀림없이 춘설이 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때가 왔다. 평일에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산우와 함께 가지산으로 향했다. 

 

▲ 초입으로 향하던 도로 위에서 만난 하얀 가지산


코로나19가 창궐해 도심은 불안이 짙은 데 반해 운문령에는 산행하러 온 산객들의 차가 즐비하다. 산우와 함께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챙긴다. 불안은 접어두고 산행을 택했지만 과학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안전수칙은 꼭 챙긴다. 불안해하지 않는 것과 대비하지 않는 것은 별개다. 


배낭을 업고 출발하려는데, 산우의 표정이 울상이다. 급히 나오느라 아이젠과 장갑을 잊었다 했다. 우리는 이미 매점 하나 없는 산 중턱에 와있고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가져오지 않았으니 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떠올려 본다. 다행히 벗에게는 여분의 양말이 있었고, 등산 스틱이 있었다. 그리고 필자의 배낭엔 낙하산용 끈이 들어있었다. 

 

▲ 쌀바위로 향하는 길 산우

 

▲ 쨍한 하늘과 하얀 눈밭


양말을 손에 끼면 장갑 구실을 할 터이고, 낙하산용 끈으로 신발을 둘러주면 마찰력이 증가해 등산 스틱과 함께 미끄러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대안을 만드니 걱정도 사라진다. 우리는 스스로의 기지에 흐뭇해하며 웃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운문령의 청명하고 맑은 바람이 느껴진다. 


높은 산봉우리 사이 오목한 운문령은 사람도 동물도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바람 또한 쉬 넘어갈 수 있는 바람길이다. 되도록 야외활동을 자제하던 우리에게 매서운 바람이 반갑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 하얀 옷을 입은 가지산 뒤로 첩첩이 고산준봉들이 보인다


초입부터 길이 하얗다. 산을 오를수록 눈의 깊이도 점점 더 깊어진다.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져진 편한 길을 피해 부러 힘들게 눈을 밟으며 걷는다. 파삭파삭 눈을 밟는 촉감이 좋다. 비 온 뒤 청명한 파란 하늘과 하얀 눈의 색감이 참으로 좋다. 

 

▲ 가지산 중턱에서 뒤로 보이는 산하는 말갛다

 

▲ 흰 눈밭에서 마시는 따끈한 핫초코


쌀바위를 몇백 미터 앞둔 조망 데크에서 쉬어가며 경치를 감상한다. 산정은 하얀 세상이어도 산하는 말갛다. 다른 세상에 온 듯하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산우는 오후에 업무가 있어 3시까지는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산정을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빠듯해졌다. 귀한 눈 구경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산정에 가고 싶은 욕심 때문에 조바심이 난다. 욕심을 욕심이라고 인정해버린다. 우리는 무리하지 않고 되어지는 만큼만 가기로 했다. 세상에 예상대로만 되는 일이 몇이나 있을까. 목적에 도달해 느끼는 행복보다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이 더욱 크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냥 찰나에 집중하기로 했다. 


쌀바위 앞 대피소에 도착했다. 오래된 대피소에서는 산지기가 라면, 어묵 등을 판다. 추운 바람을 맞은 덕인지 허기가 진 탓인지 라면 냄새가 더욱 향기롭다. 밖이 잘 보이는 창 앞에 앉아 따뜻한 라면과 어묵을 받는다. 어느 누가 우리만치 행복할까.

 

▲ 뒤로 쌀바위가 보이는 쌀바위 대피소
▲ 쌀바위 대피소 안
▲ 쌀바위 대피소에서 먹는 점심

점심시간이 돼 좁은 대피소 안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산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옆자리를 내어주며 자리를 만든다. 산하는 불안으로 그득해 경계심이 만연한데, 하얀 산정의 세상엔 불안의 흔적이 없다. 대피소 안은 하얀 눈을 만난 흥겨운 목소리가 가득하다. 


노진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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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경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교육팀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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