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신선산에 저녁노을 비치니

이종호 기자 / 기사승인 : 2019-12-26 10: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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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특집-울산의 낙조

 

한 해가 저문다. 2019년 끝자락에 ‘저묾’을 생각한다. 정희성 시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떠오른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도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저물녘 흐르는 물에 고단했던 노동과 슬픔을 씻어 보내며 한 해를 갈무리할 시간이다.


새해 해돋이만 신년 특집으로 싣지 말고, 연말 해넘이도 송년 특집으로 다뤄보면 어떨까.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장에게 ‘울산 낙조’를 읊은 한시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김 관장은 송수환 박사가 역주를 달아 펴낸 <울산경승 한시선집> 세 권에서 10편의 시를 찾아 보내왔다. 


유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1879~1962)은 1927년 일제에 체포돼 1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병보석으로 잠시 옥중을 벗어난 그는 울산 백양사에서 요양했다. 김창숙은 ‘울주함월산팔영’을 지었는데 백양사 저녁 종소리, 무산 은월봉, 학성에 돌아오는 구름, 구강에 내리는 비, 삼산 염전연기, 어풍대 밀물소리, 염포에 돌아오는 돛배와 더불어 선암 저녁노을을 읊었다. “바닷가 신선산에 저녁노을 비치니/ 산과 바다 경치 모두가 아름답네./ 은거해 있으니 홀연히 병이 나아/ 술병 들고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네.” 신선산은 남구 선암동 선암호수공원에서 솔마루길을 걸으면 오를 수 있다. 요양 중인 몸을 이끌고 해거름 신선산에 오른 김창숙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선후기 문신으로 울산부사로 부임했던 학음 심원열(1792~1866)은 진주목사로 전임됐다가 옛 임지인 울산에 유배됐다. 심원열은 ‘울산팔경’을 지었는데 학성 아침 구름, 반구정 저녁비, 백양사 새벽 종소리, 태화강에 돌아오는 돛배, 이수 갈매기, 어풍대 밀물소리, 오산 달빛과 함께 삼산 저녁노을을 썼다. “갈대 노래 부르며 술 파는 아가씨가/ 삼산을 가리키며 저녁노을 짙다 하네./ 거친 들판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니/ 연기 피는 인가들이 꽃처럼 아름답네.” 유흥업소가 불야성을 이루는 요즘 삼산이 떠오른다. 심원열의 다른 시편 ‘울산 저녁 풍경’은 유배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헛되이 보낸 칠십 년 세월/ 공무 벗고 홀로 앉으니 마음이 처연하다./ 대나무 숲 너머로 해는 기울어가고/ 염호 절구소리가 하늘 멀리 울린다.” 태화강 십리대숲 너머 기우는 해를 바라보는 노론 시파 출신 옛 울산부사의 처연한 마음이 고스란히 읽힌다.


이휴정 이동영(1635~1667)은 ‘이휴정 팔경’을 남겼다. 태화강 달밤, 은월봉 아침노을, 이수 갈대꽃, 백양사 저녁 종소리, 연포 돛단배, 소금시장 푸른 연기, 학성 맑은 바람 외에 삼산 저녁노을을 덧붙였다. “바닷가 푸른 산에 저녁노을 비치는데/ 풍경이 너무 많아 이름 짓기도 어렵네./ 까마귀 높이 날고 물고기 뛰어오르니/ 시인은 저들에게서 고운 시정 살피네.”


반계 이양오(1737~1811)도 ‘석계팔영’에서 낙조를 읊은 시를 썼다. 현산 아침노을, 화암 저녁 종소리, 남쪽 밭 농부가, 서촌 목동 피리소리, 장택 저녁낚시, 송단 가을달, 석계 밤비와 나란히 운봉 저녁노을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구름 걷힌 봉우리에 저녁노을 붉게 지니/ 산 그림자 바라보며 동쪽 시내를 건넌다./ 까마귀떼 스스로 천지운행에 익숙해/ 금빛 햇살 안고서 숲속에 들어가누나.” 대운산 자락 붉게 지는 노을에 까마귀떼 나는 저녁, 웅촌면 석계리 회야강 상류 돌내(회천, 석계)를 건너는 시인의 발걸음이 느껴진다. 이양오는 ‘석계서사 십경’에서도 푸른 절벽의 꽃과 단풍, 병풍바위 아지랑이, 남쪽 밭 농부가, 북쪽마을 들불, 반계 낚시, 밤나무 숲 꾀꼬리 소리, 소나무 언덕에 남은 눈, 꽃밭 피리소리, 돌여울 빨래터와 함께 현산 저녁노을을 노래했다. “저녁노을이 현산 서쪽에 짙어져/ 하늘은 맑고 산은 그늘졌다./ 누가 꽃 아래서 흰 두건 거꾸로 썼나/ 백동제 부르는 아이는 보이지도 않구나.”


간우 이인중(1825~1886)은 ‘산수팔경’을 지었다. 웅봉 아침해, 학성 저녁구름, 삼산 염전 연기, 이수 고깃배, 구미 봉홧불, 병영성 화각 소리, 동암 종소리와 더불어 저두산 저녁노을이 들어간다. “바다 밖 푸른 산은 움푹한 뗏목 같고/ 햇빛은 화사하게 무릉도원을 비추네./ 저녁바람 불어와 산 모습이 바뀌니/ 오리떼 줄지어 저녁 갈가마귀와 어울리네.” 저두산은 남구 여천동에 있는 돋질산이다. 돋질산은 울산의 관문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다. 이인중은 오리떼와 갈가마귀가 어울리는 저녁 돋질산을 무릉도원이라고 읊었다.


돋질산 저녁노을은 소암 박시무(1828~1879)도 노래했다. ‘산수풍경 여섯 수’에서 웅봉 아침해, 이수 고깃배, 구미 봉홧불, 병영성 화각소리, 동축암 종소리와 함께 저두산 저녁노을이 등장한다. “신선은 눈앞에서 뗏목 타고 가버리고/ 깔려오는 저녁놀은 햇살 속에 빛나네./ 맑고 푸른 기운이 저 멀리 보이고/ 해거름 개인 하늘에 갈가마귀떼 날아가네.”


우산 김정묵(1894~1975)은 ‘문수산 낙조’를 읊었다. “동쪽으로 옮겨가는 해 그림자/ 떠오를 때 붉더니 질 때도 붉어가네./ 높은 문수봉 아침저녁 풍경 보면서/ 지팡이 세워두고 동자에게 길을 묻네.” 태화강을 거슬러 올라가 언양읍 구수리 무동의 저녁노을을 노래한 시도 있다. 학소 조학식(1833~1903)은 ‘무동 저녁노을’에서 “산그늘 어지러이 나무 그늘에 스며드니/ 은사들 사는 집이 몇 채이던가./ 햇살이 정자에 들어와 바위벽에 반짝이니/ 냇물에 떠내려 오는 복숭아꽃 같구나.”라고 읊었다. 


옛사람들의 시편에서 선암 신선산과 여천 돋질산, 삼산, 태화강 십리대숲, 문수산, 구수리 무동, 웅촌 석계의 저녁노을과 까마귀들의 무리춤이 펼쳐진다. 저물녘 태화강가에 나가 문수산 너머 붉게 물드는 낙조를 바라보며 2019년 한 해를 그윽히 보낼 일이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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